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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6)화 (6/141)

6화

한편 그 시각, 산티노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한 여관.

방의 주인으로 보이는 사내의 황금 같은 머리칼이 마구잡이로 흐트러져 있었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비탄에 빠진 남자는 다름 아닌 1황자, 바스토르였다.

‘테시우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오늘 이른 아침, 한창 짐을 싸느라 부산스러워야 할 시각에 난데없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름 아닌 어린 시녀의 것으로 테시우스의 시중을 맡은 아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바스토르는 상황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몰랐다.

갑작스런 비명 소리에 이제 막 잠에서 깬 참이었고, 서둘러 방을 나왔을 땐 기사들이 테시우스의 방에 우르르 몰려 들어간 채였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전하……!”

“그, 그것이…….”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저들도 모르겠다는 듯 여러 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불안한 느낌에 일단 방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기사들은 필사적으로 그를 만류했다.

“전하, 이곳은 위험합니다……!”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이미 2황자 전하께서 당하셨습니다!”

순간 바스토르의 눈이 크게 벌어진 건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당하다니?

당하긴 누가 당한단 말인가?

‘테시우스가? 그 아이가 당했다고?’

“어서 비켜라!”

“전하……!”

“한 번만 더 날 막는다면 감히 황명을 거스른바, 이유를 막론하고 목을 칠 것이다!”

“…….”

그제야 기사들이 비켜섰다.

여전히 그를 보호하듯 감싼 채였지만 적어도 쇠갑옷에 가려졌던 시야는 뻥 뚫렸다.

그리고 그곳엔, 한 마리의 짐승이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새까만 몸집과 흉흉하게 일렁이는 금빛 눈동자.

기사들이 치켜든 창보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송곳니까지.

제국에서도 보기 드문 흑표범이었다.

“……이게 ……대체…….”

테시우스는 어디에도 없었다.

저와 마찬가지로 이제 막 잠에서 깼을 게 분명한데,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바스토르의 보랏빛 눈동자가 흑표범의 금안과 마주친 순간.

맹수는 그대로 몸을 돌려 창문을 깨부수고 도망쳤다.

당연하지만, 여행은 중단되었다.

‘이대로 황성에 돌아갈 수는 없어.’

바스토르가 얼굴을 감싼 손을 내리며 입술을 짓이겼다.

모든 것이 이상했다.

기사들은 테시우스가 당했노라 말했지만, 맹수와 사투를 벌인 흔적은커녕 핏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입고 잠든 옷은 불에 태우기라도 한 것처럼 완전히 사라졌으며, 짐승이 방 안에 침입한 흔적 또한 없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

테시우스의 것과 똑같은 금안.

테시우스의 흑발과 똑같은 새카만 몸통.

이것만큼 확실한 정황이 있을까?

‘분명 그 흑표범이 테시우스일 거야.’

사람을 짐승으로 바꾸는 마법에 대해선 들은 바가 없으나 그게 아니라면 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테시우스는 기본적인 수업을 제외한 시간은 모두 연무장에서 보냈다.

그렇게 몸을 단련한 아이가 제아무리 맹수라 한들 반항 한 번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애당초 짐승이 침입한 흔적도 없는데 당했다고 믿는 게 더 이상했다.

‘하지만 누가? 무슨 이유로?’

사실 가장 유력한 후보를 꼽자면 단연 그의 어머니, 알라니아 황후라 말할 수 있었다.

황제는 강력한 우군이 필요하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알라니아를 황후로 들였으나 진정한 정인은 리아누 황비였다.

그러나 제아무리 정인이 따로 있다 해도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다른 여인만을 바라보는 남편이다.

보기 좋을 리도 없거니와 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알라니아는 리아누 황비는 물론이고 황제 또한 싫어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테시우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해치실 분은 아닌데.’

그건 누구보다도 바스토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알라니아는 질투심에 눈이 멀어 사람을 해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정략혼이기도 했거니와 그 정도로 투기심이 많은 편도 아니었으니까.

바스토르가 유력한 후보로 어머니를 꼽은 데엔 그저, 테시우스에게 적대감을 보이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테시우스는 진작 후계자 수업을 포기했고 자신은 차기 황태자로 내정되었다.

즉 어머니가 그를 견제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누가?

대체 왜?

‘알 수 없다. 정말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

왜 굳이 짐승으로 바꾸는 술수를 썼을까.

제거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는데 왜 하필 동물로 바꿔 놓은 걸까.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널 찾아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테시우스.’

여행은 중단되었으나 바스토르는 떠날 수 없었다.

이복동생이긴 해도 테시우스는 제게 하나뿐인 동생이었다.

가뜩이나 혼란스럽고 무서울 텐데 말도 못 하는 짐승이 되었으니 오죽할까.

‘무사하기만 하면 된다. 살아만 있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든 찾을 수 있을 거야.’

창밖에 내려앉은 어둠이 사뭇 신경 쓰였다.

새까맣게 물든 하늘이 제 동생에겐 조금만 다정하기를.

바스토르는 간절히 바라며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 * *

막 동이 튼 아침.

짹짹대며 지저귀는 새 소리와 더불어 새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가 아렌을 깨웠다.

산에서, 그것도 농사를 지으며 살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은 필수라 아렌은 이른 시각임에도 홀린 듯이 몸을 일으켜 눈을 비볐다.

사실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났다.

어제 테오와 얘기를 나누자마자 예정보다 빠르게 마을에 내려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어차피 다 만들어 놓기도 했고. 재료도 받아올 겸.’

아렌은 거의 석 달에 한 번꼴로 카리아 상회와 화장품 거래를 하고 있었는데, 어쩌다 테오가 저런 짐승의 모습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제 들은 대로 편지라도 빨리 써서 부치고 올 참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테오는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렌은 그런 그에게 담요를 덮어 준 뒤 서둘러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양치도 꼼꼼히 하고 비누로 얼굴도 씻고, 오늘은 계곡에 갈 생각이 없으니 미리 받아 둔 물로 머리도 감았다.

옷을 갈아입은 후엔 책상 위에 있는 화장품들을 모조리 천 가방에 집어넣었다.

겉보기엔 무척 허름하고 낡아 보이지만 이공간 마법에 경량화 마법까지 걸려 있어 어지간해선 무겁지 않고, 거의 끝없이 들어가는 수준으로 물건을 넣을 수 있는 가방이었다.

그만큼 비싸긴 했지만 어린아이의 몸은 한계가 있어 어쩔 수 없었다.

아렌은 상단에 화장품 먼저 넘길 생각으로 돈은 따로 챙기지 않고 대신 간단한 아침상을 차렸다.

“그럼 다녀올게.”

곤히 잠든 귀여운 흑표범을 향해 작게 웃어 보이며, 아렌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호기롭게 길을 나섰다.

테시우스가 눈을 뜬 건 그로부터 한참이 더 지난, 해가 중천에 다다랐을 때였다.

* * *

정갈하고 깔끔한 사무실 안, 책상 앞에 앉은 남자가 가늘게 웃는 낯으로 서류 뭉치를 툭툭 두드렸다.

빛바랜 회색 머리칼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사내, 수도의 유행을 주도하는 화장품을 독점 공급하는 카리아 상회의 주인.

클리프였다.

‘오늘은 오려나.’

이런 변방 분점에 처박혀 있을 사람이 아니었으나 그는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선 줄곧 델리움에 머물렀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갓 열두 살이 된 꼬맹이를 만날 때마다 퍽 즐거웠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넘어와야 할 텐데.’

클리프의 사무실 한편엔 어린 남자아이가 좋아할 만한 물건은 물론이요, 성인 여성에게 맞춘 와인이며 보석이며 포장된 지 오래인 선물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모두 아렌을 설득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아직도 오 년 전 그날의 기억이 선명했다.

나름 깨끗하게 입는다고 입었지만 얼굴엔 땟국물이 줄줄 흐르던 아이.

대뜸 화장수 하나를 들이밀며 계약을 해 달라던 맹랑한 남자애.

그날을 떠올리니 다시금 얼굴 위로 수려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누군가 똑똑하고 닫힌 사무실 문을 두드려왔다.

보나 마나 로한이라, 클리프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들어와.”

슬슬 기름칠을 해야 할 것 같은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곳엔 곰 같은 덩치의 사내가 서 있었다.

역시나 로한이었다.

“무슨 일이지?”

“아렌 님이 오셨습니다.”

그 한마디에 클리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워낙 급하게 일어나 의자가 뒤로 나동그라졌으나 전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정말?”

“예. 지금 프라이빗 룸에 가 계십니다.”

“그럼 빨리 여기로 데려와야지, 뭐 하고 있어!”

“……부담스럽다고 하셔서.”

젠장, 그럼 그렇지.

클리프는 아렌과 처음 거래를 튼 이후로 그의 주인을 만나고자 무던히도 노력했으나 어린애가 어쩜 그리 입이 무거운지 주인과 관련해선 입 딱 다물고 아무 얘기도 해 주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늘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철저하게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그는 정말 진심으로 그 주인이라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아실라, 대체 당신이 누구기에.’

클리프가 아는 건 ‘아실라’라는 계약서에 적힌 이름 석 자와 그 이름을 바탕으로 추측한, 성별이 여자라는 것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만드는 화장품들은 내놓는 족족 완판에 품절 대란을 일으켰다.

아기의 땀띠를 예방해 주는 분가루와 귀부인을 대상으로 한 주름 개선 크림, 갓 빤 빨래 냄새가 나는 향수며 머리를 감거나 몸을 씻을 때 쓰는 세정 화장품이며,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온갖 기기묘묘한 화장품을 만들어 냈다.

심지어는 시장에 그녀의 화장품을 처음 내놓고 불과 1년 만에 황성에까지 불려갈 정도였다.

‘나 같은 일개 평민이 황후를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귀부인들과의 티타임을 통해 처음으로 아실라의 화장품을 접한 황후는 그녀를 제 아래에 두고 싶어 했으나 클리프도 모른다는 얘기에 크게 실망하며, 동시에 황성에 우선 공급할 것을 명했다.

머지않아 황후가 쓰는 화장품에 대한 소문이 상회의 성장에 더욱 부채질을 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그는, 아렌의 주인에게 아주 아주 큰 은혜를 입은 셈이다.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클리프는 간절한 바람을 담아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감정이 실린 발걸음이 쿵쾅쿵쾅 계단을 울렸다.

그만큼 다급한 걸음이었다.

“……아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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