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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5)화 (5/141)

5화

어쩌다 짐승이 되고 어쩌다 이곳까지 흘러들어왔는지, 다시 사람으로 바뀌긴 하는 건지 등 물어볼 건 많았다.

“바닥에 쓰는 게 힘들면 단어 하나만 써. 그럼 내가 추리해 볼게.”

테시우스가 생각하기에도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일 듯싶었다.

물론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는 없어, 앞발을 후들거리며 가까스로 단어 몇 개를 적었다.

각각 ‘마법’, ‘아침에’, ‘몰라’, ‘나’, ‘귀족’이었다.

이를 읽으며 아렌이 추리에 나섰다.

“그러니까……. 마법에 걸렸다, 하지만 모른다. 아침? 아침은 뭐야?”

“크앙!”

“아침에 걸렸다? 아니면 아침에 변했다? 뭐 그런 뜻인가?”

대충 아렌이 물어보고 맞으면 고개를 끄덕이는 식이었다.

“그리고……. 나, 귀족. 아하, 귀족이었구나. 어……. 음, 그럼 말도 높여야 해?”

테시우스가 글을 읽는 아렌을 보고 놀랐듯, 글자를 쓸 줄 아는 그를 보며 최소한 졸부 집 자제겠거니 하고 짐작한 건 아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솔직히 말을 높이긴 싫은데, 다행히도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제 와 말을 높이는 것도 웃기고 더구나 자기는 지금 짐승의 모습이 아닌가.

“고마워. 사람으로 돌아가면 그때는……. 높일게.”

끄덕끄덕.

“아, 그럼 혹시 ‘몰라.’라고 쓴 게 마법에 걸린 건지 모른다, 가 아니라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는 뜻이야?”

팡팡.

테시우스가 발을 두 번 구르자 아렌이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손가락을 탁 튕겨 보였다.

“둘 다 모른다는 거지?”

“크릉!”

“아, 이거 좀 재밌네. 난 혼자 지내서 혼잣말이 입에 뱄거든. 누구랑 대화하는 게 꽤 오랜만이야.”

그때 테시우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맨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들었던 의문이 다시 떠오른 탓이다.

어쩌다 여기서 혼자 살게 된 걸까?

부모님은?

테시우스가 꼬리로 글자를 지운 뒤 발톱을 세워 다시 하나를 더 썼다.

‘왜 혼자?’

“어…….”

바닥에 쓰인 글자에 아렌이 말끝을 흐렸다.

예상을 못 한 건 아닌데, 왜 혼자냐는 질문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녀가 아무 말을 못 하고 있자 테시우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어려운 질문이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던 찰나, 아렌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음……. 그러니까 나는, 부모님이 안 계셔. 아버지는 원래 안 계셨고 엄마는 내가 일곱 살 때 돌아가셨어.”

테시우스와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진실은 말해 줄 수 없지만, 적어도 이것 하나는 사실이었다.

아렌이 남장을 하기 시작한 것도 그날로부터였다.

“술 취한 손님이랑 몸싸움을 벌이다가……. 식탁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히셨대. 하지만 그 사람은 아무런 처벌도 안 받았어. 치안대가 잡아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망쳤다니까 그대로 손을 놔 버리더라고.”

내뱉는 목소리에 스며든 분기가 테시우스에게도 전해졌다.

동물이 되어서인지 몰라도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더욱 예민하게 느껴졌다.

“7살에 장례를 치르고 길에서 아무것도 못 하던 나를 주인님이 데려와 주셨어. 이 동굴을 찾아 주신 것도 그분이야. 여러모로 은혜를 많이 입었지.”

‘주인님?’

테시우스가 바닥에 글을 쓰자 아렌이 살짝 웃어 보였다.

“저 안에 책상 봤지? 그 위에 있는 것 모두 화장품이야. 내 주인님은 화장품을 만들어 상단과 거래하시는데 모습을 드러내는 걸 무척 꺼리셔서 내가 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어. 글을 읽을 줄 아는 것도 주인님이 알려주셔서 그래. 상단과 거래를 하려면 읽고 쓸 줄 알아야 하거든.”

거짓말이었지만 동시에 사실이었다.

아렌은 지금껏 화장품을 만들어 파는 동안 가상의 인물을 대신 내세웠다.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게 7살 때인데 그 어린아이가 귀부인들이 환장하는 화장품을 만들었다고 하면 믿지 않을 사람이 태반인 데다, 어디서 배웠고 어떻게 만들었냐 캐물을 게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렌은 일찍이 가짜 주인님을 만들었다.

‘그럼 밭은 누가?’

테시우스가 한 번 더 바닥에 글자를 써 보이자 아렌이 대답했다.

“내가 만든 거야. 닭장도 그렇고 대문도 그렇고. 왜? 그게 신기해?”

끄덕끄덕.

“물론 처음에는 못 했지. 그런데 주인님이 혼자 사는 법을 알려주셨어. 예전에 말해 주셨는데, 주인님은 외진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서 아주 어릴 때부터 밭을 갈고 작물 키우는 법을 배워야만 했대. 농부의 자식은 부모님의 일을 도와야 하니까. 다 커서도 제국에 큰 기념일이 있을 때면 돌아가서 음식도 만들어야 했대. 아무튼 그런 것들을 나한테 다 알려주신 거야.”

‘착한 사람.’

푸핫, 아렌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가.

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전부 다 내 얘기지만.’

콩을 심고, 메주를 띄우고, 장을 담그고, 다 큰 성인이 되어 화장품 공방을 차린 후에도 매년 돌아오는 명절이면 본가에 내려가야 했다.

굳이 명절이 아니어도 한창 바쁜 수확 철이면 연차까지 써서 밭일을 도왔다.

덕분에 휴가는 아주 드물게나 갔지만 결과적으론 다행이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난 세상에서, 저가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한식을 구현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여기에 화장품은 덤이지.’

7살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렌은 화장품을 만들 생각은 못 했다.

사실 만들 생각은 했는데,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현대에서 사용하던 재료가 여기에도 있는지 모르는 데다 있는지 알아보는데도 돈이 필요했다.

더구나 화장품은 귀족의 전유물인데 평민 남자애가 만든다고 해 봤자 팔릴 리도 없거니와 사치품이라 평민을 대상으로 팔 수도 없다고, 그렇게 지레짐작했다.

그래서 포기했다.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엄마는 지금쯤 살아계시지 않을까?

주점에서 힘들게 일할 일도, 술 취한 손님을 만날 일도 없지 않았을까?

아렌은 매 순간 외면하면서도 물밀듯 몰려오는 후회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네 성은 뭐야? 오늘 마을에 내려가니까 신문이라도 구해 줄게.”

일순 테시우스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렌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잔뜩 경직된 기색이 역력했다.

“왜 그래……? 말해 주기 좀 그래?”

좀 그런 정도가 아니라…….

‘조금만 더 지나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쓰일 텐데.’

2황자 테시우스 폰 아이테라, 실종되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선명한 문구가 어른거렸다.

이를 어쩌지, 이미 귀족이라고 말했는데 마땅한 변명거리가 없었다.

테시우스는 끙끙대며 머리를 쥐어 짜냈다.

천만다행으로 머지않아 번뜩하며 한 가지 이름이 떠올랐다.

슥슥, 뾰족한 발톱이 바닥에 글자를 써 나가자 아렌이 이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친……구, 오웬? 백작가? 그리고 편……지.”

친구, 오웬 백작가, 편지?

곰곰이 생각하던 아렌이 짝! 하고 박수를 한 번 쳤다.

“오웬 백작가에 친구가 있으니 편지를 보내라고!”

그렇지!

테시우스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꼬리를 팡팡 내려쳤다.

아렌도 마찬가지로 신이 났다.

한 번 알아맞힐 때마다 꼭 퀴즈 게임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편지는 뭐라고 보내면 돼? 네 사정을 다 써도 돼?”

끄덕끄덕.

“알았어. 그럼 써서 부치고 올게.”

마침내 결론이 났다.

아렌은 피식 웃고는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잠깐 쉬고 있을래? 난 설거지 좀 하고 올게.”

“크릉!”

아렌은 팔을 걷어붙이고 나와 아까 미뤄 둔 설거지를 빠르게 해치웠다.

이후론 세수에 양치까지 꼼꼼히 하고 돌아와 낮은 서랍 위에 놓인 화장수를 집어 들었다.

아무리 어려도 피부 관리는 필수였다.

한편 테시우스는 그런 아렌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하루가 이다지도 길었던가, 온통 신기한 것투성이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린 나이인데도……. 대단하군.’

그래, 다른 것보다도 이 생각이 제일 컸다.

7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했다.

눈으로 보이는 나이는 기껏해야 열 살 남짓이다.

그럼 최소 3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글을 배우고, 밭일을 배우고, 요리를 배우고, 이 독특한 자기만의 안식처를 만들어 왔다는 것인데 테시우스의 눈엔 그게 못내 대단해 보였다.

‘난 어땠더라.’

일찍이 후계자 수업을 포기한 탓에 기본 수업을 제외하면 주로 연무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바스토르만큼 빡빡한 일정이 아니어서 하루가 늘 널널했다.

그래서인지 조금, 부끄러웠다.

‘난 벌써 열다섯인데. 이 아이만큼 성장하진 못한 것 같아.’

어른스럽기로는 저보다 아렌이 더했다.

테시우스는 새삼 윤택하게 살아왔던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며, 다시 황성으로 돌아간다면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이제 잘 건데……. 너는 어떡할래?”

그때 잘 준비를 마친 아렌이 물었다.

해는 다 진 참이지만 아직은 이르지 않나?

하지만 막상 쳐다본 아렌은 무척 피곤해 보였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봐.’

하긴, 어릴 때는 낮잠도 많이 자고 밤에도 일찍 자니까.

그건 그렇고…….

‘땅바닥에서 자긴 싫은데.’

넓은 콧등이 찌푸려지며 길게 뻗은 하얀 수염이 실룩거렸다.

“크르릉…….”

“왜? 아직 안 졸려?”

아렌이 고개를 갸웃하자 테시우스는 곧 침대 위로 훌쩍 올라왔다.

푹신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땅바닥에서 자는 것보단 나았다.

“같이 자겠다고?”

“크앙!”

그게 아니라 바닥에서 자기 싫어!

같은 남잔데 뭐 어때!

테시우스가 울며 꼬리로 팡팡 담요 위를 쳐 댔다.

아렌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그래, 뭐.” 하곤 알아들은 건지 뭔지 촛불 하나만 남기고 모두 후 불어 끄고는 담요를 겹겹이 쌓아 만든 침대 위로 올라갔다.

면적이 그리 넓지 않아서 누우려면 이 흑표범에게 딱 붙어 자야 했다.

“자다가 밀치면 안 돼? 난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한단 말이야.”

끄덕끄덕.

“그래, 그럼 잘 자.”

어둠이 내려앉은 동굴 안에서 거의 다 닳은 짤막한 초 하나만이 불안하게 일렁였다.

보드라운 털과 맞닿은 작은 몸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퍽 따듯했다.

‘뭔가 꿈을 꾸는 것 같아.’

테시우스는 끔벅끔벅 눈을 감았다 뜨며 생각했다.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난 일들이 하나같이 다 꿈만 같은 것들이라 자고 일어나면 다시 제 방 침대 위에서 눈을 뜰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지, 아침에 막 일어났을 적만 하더라도 세상이 무너진 것 같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는데.

물론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조금 더 계속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 또한 들었다.

이 아이와 보낸 하루가 그만큼 즐거웠던 걸까.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그래, 적어도 아렌이라면.

조금 더 짐승으로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아.

테시우스는 생각하며 머지않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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