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자는구나.’
여러 갈래로 뭉친 머리칼을 타고 차가운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계곡에서 씻고 돌아오는 내내 수건으로 물기를 열심히 털어내긴 했지만 아렌의 머리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런데 막상 돌아와 보니 흑표범 테오는 곤히 잠든 채였다.
‘조금만 이따가 깨울까.’
지금쯤이면 프리지에 넣어 둔 연고가 모두 굳었을 테지만, 당장 해야 할 일들도 있으니 조금 더 재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아렌은 곧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곡에서 떠온 물은 오크통에 부어 두고, 성냥을 찾아 촛대를 밝혔다.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한 번 더 탈탈 턴 다음엔 계곡에서 잡은 우렁이를 감싼 젖은 수건을 꺼냈다.
낮에 계곡에 갈 때 생각했던 것처럼 오늘은 우렁이 된장국을 끓일 생각이었다.
물을 끓이는 동안 테오에게 연고를 발라 주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잠시 후 대충 할 일을 마치고 나온 아렌은 주춤주춤 그에게로 다가갔다.
‘……설마 물진 않겠지?’
속은 사람이라지만 지금은 짐승이라, 자다가 깜짝 놀란 나머지 제게 확 달려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결국 아렌은 멀찍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저기……. 테오.”
“…….”
“테, 테오야……. 일어나 봐. 여기……. 연고 가져왔어.”
하지만 그는 쉬이 일어나지 않았다.
어떡하지, 아렌은 발을 동동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다 곧 동굴 공터 주변을 빙 둘러싸듯 자란 나무 덩굴로 다가갔다.
꽤 긴 나뭇가지를 하나 골라 뚝 꺾은 후엔, 역시나 멀찍이 서서 테오의 몸을 쿡쿡 찔렀다.
“일어나, 테오. 어, 얼른……!”
“……캉!”
꽤 뾰족한 나뭇가지가 몸을 쿡 찌르고서야 테오는 깜짝 놀랐는지 그 자리에서 팔짝 뛰며 일어났다.
그러나 순간 드러난 날카로운 발톱에 아렌이 “힉!” 하며 몸을 뒤로 뺐다.
역시 이렇게 깨우길 잘했다, 간담이 서늘해져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 그게 연고가 다 굳어서…….”
“……크릉.”
“미, 미안해. 괴롭히려던 건 아니야.”
변명하듯 대답했으나 테오는 심기가 퍽 불편한지 콧등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아렌은 슬그머니 땅바닥에 나뭇가지를 내려놓고 다가갔다.
“연고 먼저 발라 줄게. 저녁은 이후에 먹자.”
“푸릉…….”
긴 꼬리가 팡팡 소리를 내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지만 다행히 거부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이에 아렌은 연고 통을 열어 당장 눈에 보이는 상처에 발라 주기 시작했다.
옆구리와 어깻죽지, 겨드랑이 등 털이 뭉텅이로 빠진 곳이라면 딱지가 앉지 않아도 일단 발라 주었다.
그러나 아렌은 몰랐다.
이 순간 테오가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랐는지.
* * *
‘미치겠군.’
테시우스는 까득 이빨을 악물고 이상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아렌의 서늘한 손가락이 몸 곳곳에 닿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떨었다.
진물이 흐르고 딱지가 앉은 상처는 예민하고 민감했지만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이런 곳까지……!’
아렌의 작은 손은 테시우스의 넓적한 허벅다리 안쪽까지 들어왔다.
아직 상처는 없고 털만 빠진 곳이었는데, 그런 곳마저 스스럼없이 연고를 발라 주니 수치심과 부끄러움에 딱 죽을 것 같았다.
검은 털로 뒤덮여 있지 않았더라면 분명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켰을 거라고, 테시우스는 생각했다.
‘설마 까먹은 건가? 내가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아무리 같은 남자라지만 어떻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연고를 발라 주는 모습에 괜스레 민망해졌다.
예민한 상처에 서늘한 손길이 닿을 때마다 전신의 털이 쭈뼛 서는 것이 느껴졌다.
‘제발 빨리 끝나라, 제발.’
오로지 그 생각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세상사는 언제나 내 뜻대로만 흘러가진 않는다던가.
“……다 됐다!”
마침내!
“연고는 내일 또 발라 줄게.”
안 돼!
아렌의 말 한 마디에 시시각각 감정이 바뀌었다.
테시우스는 절망에 빠져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런 그의 속을 알 리 없는 아렌이 말간 얼굴로 물었다.
“응? 배고파서 그래?”
“크릉……!”
“어……. 그럼…….”
와중에 테오의 시선은 닭장 쪽을 향해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아렌은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슬슬 잠들 기미를 보이는 닭들을 발견했다.
잠시 후, 아렌이 테오를 향해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닭은……. 안 돼, 내 유일한 단백질 공급처란 말이야. 잡아먹으면 안 돼, 알았지?”
“크앙!”
그건 나도 싫어!
난 사람이라고!
‘살아 있는 닭을 잡아먹는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테시우스가 반발하듯 울자 아렌이 덧붙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맹수로 변하면서 입맛도 바뀌었을지.”
“…….”
그러고 보니…….
하지만 그건 제국의 황자가 아닌 사람으로서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짐승으로 변했다 한들 진짜 짐승처럼 살고 싶진 않았다.
테시우스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제 강력한 의지를 피력했다.
“안 먹는다는 거지?”
“크릉……!”
“그래, 먹으면 안 돼. 대신…….”
아렌은 동굴로 총총 달려가 달그락 소리가 나는 양동이를 가져왔다.
이윽고 안을 들여다본 테시우스의 눈동자가 순간 미묘하게 좁아졌다.
‘달팽이?’
처음엔 달그락 소리가 나기에 웬 조약돌을 가져오나 싶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동그란 달팽이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이게 대체 뭐람?
그가 생각하던 찰나 아렌이 답했다.
“오늘 저녁 메뉴야. 우렁이 된장국!”
우…… 뭐?
난생처음 들어 보는 단어에 테시우스는 사뭇 당황했다.
발음하기도 어려워 보이는 언어라는 것도 그렇지만 더 큰 문제는 이걸 가지고 저녁 메뉴라 했단 점이다.
‘달팽이를 왜 먹지?’
산에 먹을 게 없어서 그런 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달팽이를 잡아먹다니!
테시우스는 기겁해 슬슬 뒷걸음질 쳤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꼬박 굶은 만큼 허기가 졌으나 저것만큼은 절대 먹고 싶지 않았다.
“조금 이상할 수도 있지만 맛있을 거야.”
“…….”
“얼른 들어와, 이제 곧 추워질 텐데.”
아무래도 아렌은 생각을 바꿀 의향이 없어 보였다.
결국 테시우스는 뒤를 따르긴 했지만 줘도 안 먹을 생각으로 동굴 바닥에 잠자코 앉아만 있었다.
그런 그 대신 아렌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냄비 속 물이 보글보글 끓어오르자 아렌은 소금 조금과 몇 차례 더 물에 씻은 ‘달팽이’를 몽땅 투하했다.
그리곤 작은 도기에서 쿱쿱한 냄새가 나는 흙덩어리를 퍼내 새 냄비에 담았다.
그 외에도 새까만 물 한 스푼, 다진 마늘 한 스푼, 검은색 종이 몇 조각, 바싹 마른 작은 생선 몇 마리 등 별 기기괴괴한 것들을 넣었다.
이에 테시우스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저게 뭐든 간에 절대 먹지 않으리라고.
이후로도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아렌은 요리가 끝나자 벽에 기대어 세워 둔 낮은 상을 펼치고, 달걀 프라이 두 개를 올린 간장 계란밥과 제가 먹을 찬밥에 총각김치, 우렁이 된장국 등을 올렸다.
소박하지만 완벽한 한상차림이었다.
“그럼 맛있게 먹어!”
큰 그릇에 담아 줬으니 알아서 잘 먹겠지 하는 생각으로 아렌은 냉큼 수저를 들었다.
찬밥 위에 올린 노른자를 푹 찌르자 영롱한 반숙이 주륵 흘러내렸다.
그렇게 밥과 함께 한 술, 아삭한 총각김치 한 입, 마지막으로 뜨거운 된장국을 한 모금 떠먹으니 이곳이야말로 지상 천국이었다.
반면 테시우스는 그런 아렌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달팽이에 진흙을 넣은 스튜를 저리 맛있게 먹다니.’ 하는 생각이었다.
미묘하게 찌푸려진 콧등이 이를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걸 어떻게 먹으라고.’
짐승도 아닌데 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먹으라니!
하지만 뭉뚝한 앞발은 스푼을 쥘 수 없었다.
배는 고픈데 체면 없이 먹긴 싫고, 이래저래 짜증이 났다.
“왜 안 먹어? 그건 맛있는 거야.”
“크앙!”
차라리 직접 먹여 주던지!
이게 뭐야!
테시우스는 불만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긴 꼬리가 팡팡하며 바닥을 내리쳤다.
“야아, 먼지 날리잖아……! 그만해!”
“크르릉…….”
직접 먹여 달라고!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
테시우스는 오른쪽 앞발로 상을 퍽퍽 쳤다.
스푼이 놓인 자리였다.
“……뭐야, 먹여 달라고?”
“컹!”
“되게 까다롭네, 일부러 달걀도 두 개나 줬더니…….”
아렌은 샐쭉해진 눈으로 그를 은근히 노려보았다.
하지만 계속 흙먼지를 풍기게 둘 수는 없어 마지못해 수저를 들고 크게 한술 떴다.
“자, 아- 해 봐.”
쩌억.
그 말 한마디에 벌어진 입이 어찌나 큰지 아렌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뾰족한 이빨은 살벌하게 번들거렸고 입 안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내 머리 정도는 한입에 삼키겠어.’
아렌은 조금 질겁한 얼굴로 수저를 그대로 뒤집었다.
수저 위에 한가득 올라간 간장 계란밥이 혓바닥 위로 떨어지자마자 냉큼 손을 뺐는데 역시나 금세 텁 하고 입이 닫혔다.
우물우물.
나름 입을 다물고 씹는다고는 하는데 잘 안 되는지 큰 머리통이 좌우로 살짝씩 흔들거렸다.
이러니까 사람이 아니라 진짜 고양이, 그것도 엄청나게 큰 고양이를 보는 것 같네.
한편 그녀의 눈에 저가 어떻게 보이는지 알 리 없는 테시우스는 입 안에서 느껴지는 새롭고 참신한 맛에 무척 놀랐다.
‘생각보다 맛있잖아?’
고소하고, 짭짤하고, 촉촉하고, 진득하고, 기본적으로 식감도 독특했지만 맛 또한 그러했다.
아까 보니 달팽이를 넣은 스튜에 들어간 검은 물을 여기에도 넣던데.
어떤 소스인가 싶었는데 이런 맛을 내는 소스라면 황성에 가져가고 싶을 정도였다.
‘달라고 하면 주려나?’
대충 어떻게 만드는지 봤으니 주방장에게 말하면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테시우스는 생각하면서도 연신 우물거리며 목구멍 너머로 삼키자마자 넙죽 입을 벌렸다.
입이 커져서 그런지 영 감질맛만 났다.
그래도 먹여 주는 게 어딘가 싶어 이 정도에서 만족할 참이었다.
“자, 여기.”
졸지에 아기 새한테 밥 주는 어미 새 모양이 되었지만 아렌은 간장 계란밥을 꾸준히 먹여 주었다.
이후 그릇이 다 비워지고서야 수저를 들고 제 식사를 다시금 시작했다.
테시우스는 그런 아렌을 또다시 빤히 쳐다보았다.
기다란 오이 피클같이 자른 채소를 빨갛게 절인 것도 그렇고, 괴상한 냄새가 나는 달팽이 스튜도 신기했다.
저게 정말 맛있나? 하는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물론 먹을 생각은 없지만.’
다만 그 시선이 퍽 부담스러웠던 아렌은 노란 눈동자를 애써 외면하며 꾸역꾸역 밥을 먹었다.
그렇게 때늦은 저녁 식사가 마무리되었다.
여기에 대충 뒷정리만 하고 돌아온 아렌이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 중요한 게 남은 탓이다.
“그럼 우리 대화 좀 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