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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3)화 (3/141)

3화

날카로운 끝이 땅에 닿자 제 의지만큼 잘 움직이는 것 같진 않지만 글자라고 알아볼 수는 있는 형태가 바닥에 그려졌다.

아렌의 바닷빛 눈동자가 이보다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벌어졌다.

‘글자를 쓸 줄 안다고?’

어떻게 짐승이, 글자를 쓸 줄 알지?

물론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바닥에 쓰인 글자는 엉성하긴 해도 분명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테오’였다.

아렌은 놀라 침을 꿀꺽 삼키면서도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호, 혹시……. 이, 테오라는 게 네……이름이야……?”

“컹컹!”

“마,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놀란 나머지 손으로 이마를 짚는 와중에, 흑표범 테오는 자기야말로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저런 감정 표현도 표정으로 무척 잘 드러났다.

대답도 곧잘 하고, 말도 분명 알아들었다.

여기에 글자까지 쓰다니.

이젠 단순히 똑똑하다고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이건 확신이야.’

“그러면……. 넌 혹시 사람이니?”

“크릉!”

테오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히 하고 이빨을 드러냈다.

역시 저게 웃는 거였구나.

아렌은 눈을 끔벅거리며 이마를 짚은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정말 다행이다…….”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조금 똑똑한, 그리고 이상한 짐승이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았는데 여기서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거잖아.’

밤중에 덮쳐 잡아먹으면 어쩌나 하는 고민이 한순간에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아렌은 안도감에 눈물을 글썽거리다가 냉큼 훔치곤 후 하고 낮게 숨을 내뱉었다.

“나, 나는 네가 나를 잡아먹을까 봐 엄청 걱정했거든…….”

“캉!”

“그, 그치? 너도 사람인데 사람을 잡아먹을 리가 없잖아.”

끄덕끄덕.

“다행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변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다면 도와줄게. 아 참, 나는 아렌이야.”

“크릉!”

“으응. 나도 반가워, 테오.”

테오는 더 이상 무시무시한 흑표범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강아지와 섞인 커다란 고양이처럼 보인달까.

“……참, 그러면 아까 땅바닥에 몸을 비빈 건……. 혹시 간지러워서 그래?”

“꺼엉엉!”

듣기만 해도 속상하다는 듯 테오가 울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아, 조금 귀엽다.

비단처럼 윤이 흐르는 까만 털을 만지고 싶은 욕구가 퐁 하고 솟았다.

순간 아렌은 저도 모르게 손을 살짝 뻗었다가 “아차.” 하며 냉큼 거두었다.

“그, 연고는 지금 굳히는 중이니까 이따가 발라 줄게. 간지럼증은 내가 나중에…….”

“크릉?”

“아, 아무것도 아냐. 그건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하마터면 ‘간지럼증에 좋은 화장품을 만들어 줄게.’ 하고 말할 뻔했다.

아렌은 빠르게 말을 수습하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보다 배고프진 않아? 이제 곧 저녁땐데…….”

테오는 잠시간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다, 아렌이 작게 덧붙였다.

“그럼 같이 먹자. 음……. 잠깐만 있어 봐.”

아렌은 연고를 넣어 둔 마도구, 일명 ‘프리지’를 열어 안에 있는 재료를 살폈다.

점심에 먹고 남은 찬밥에 달걀 몇 개가 전부였다.

원래는 계곡에서 씻으면서 겸사겸사 우렁이도 잡아 올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일이 틀어져서 아무것도 못 한 것이다.

‘그래도 아직 많이 늦진 않았어.’

고기는 없으니까 이런 거로라도 어떻게 해결해 봐야지, 뭐.

아렌은 동굴 밖을 응시하며 대충 시간을 가늠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을래? 돌아오면 맛있는 걸 해 줄게.”

이번에도 테오는 아렌의 말에 황금색 눈동자 위로 길게 뻗은 수염 사이를 좁혔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말을 참 잘 듣네.

원래도 순한 성격인 걸까?

아렌이 생각하며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

다녀온다는 말을, 엄마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하게 될 줄이야.

아렌은 새삼스러운 기분에 볼을 살짝 긁으며 빈 양동이와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개구멍을 통과해 사라진 순간, 얌전히 앉아 그 뒷모습을 지켜만 보던 테오의 콧등이 잔뜩 찌푸려졌다.

“끄엉어……!”

* * *

수치스러워 죽을 것 같다.

테시우스는 고통스럽다는 듯 양 앞발로 눈을 덮으며 짐승의 낮은 울음소리가 섞인 신음성을 흘렸다.

‘제길, 내가 어쩌다……!’

그가 누구던가, 엔하시아 제국에서 네 번째로 고귀한 핏줄이었다.

테시우스 폰 아이테라.

제국민이라면 모두가 아는 이름, 제국의 2황자가 바로 그였다.

‘그런 내가! 저런 평민 아이에게……!’

배를 내보이는 걸로도 모자라 뺨을 핥기까지 했다.

그는 올해로 열다섯이 되었지만 자신을 ‘아렌’이라 소개한 남자아이는 기껏해야 열 살쯤 되었을까, 이것만큼 파렴치한 짓도 없을 터다.

어디 그뿐인가.

저가 사람이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해, 그리고 따라가기 위해 어깨에 머리도 기대고, 순한 강아지처럼 왕왕대며 아렌이 하는 말마다 대답도 열심히 했다.

결과적으론 사람이라는 것도 알렸고 첩첩산중 어두운 숲속에서 밤을 지새우는 대신 아늑한 은신처까지 오게 되었지만, 막상 혼자 남고 보니 뒤늦게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바스토르…….’

이제 어떡하지?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 거야?

애초에, 원래대로 돌아올 수는 있을까?

떠나기 전 허공에서 마주친 보랏빛 눈동자가 떠올랐다.

하루 새에 미칠 듯이 그리워진 얼굴을 생각하니 괜스레 울컥했다.

‘왜 하필 짐승이지? 더구나 이 상처들은 또 뭐고?’

그는 당장 어젯밤만 하더라도 사람의 모습으로 잠들었다.

몸 곳곳에 난 상처와 딱지도 본래 없던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 이른 아침.

원인 모를 간지럼증에 일찌감치 눈이 떠졌다.

그때 세숫물을 들고 온 시녀가 방문을 열자마자 기겁하며 도망치는 걸 선두로 저를 호위하던 모든 병력이 창과 칼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유리창에 비친 그는, 한 마리의 맹수가 되어 있었다.

* * *

검을 잡아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은 고양이의 것처럼 말랑한 발바닥으로 변해 있었고, 전날 입고 잠든 옷 대신 윤기 어린 검은 털이 전신을 덮은 채였다.

그저 평소처럼 잠들고 일어났을 뿐인데, 모두가 그를 보며 고함을 치고 날붙이를 들이밀었다.

결국 테시우스는 무작정 창문을 깨부수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없는 곳이 나올 때까지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점심때가 한참 지났을 즈음.

그는 어느 이름 모를 산에 와 있었다.

인적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숲은 험하고 무성했다.

그러나 미칠듯한 가려움증은 아무리 땅바닥에 몸을 비벼 대도 가라앉지 않았다.

그때 마주친 것이 아렌이었다.

‘……여자……. 아니, 남자인가?’

이제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남자치곤 지나치게 예쁘장한 얼굴이긴 했으나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도 그렇고 복식도 남자아이의 것이다 보니 대충 ‘남자구나.’ 하고 짐작했다.

여기에 말을 하지 못하니 수치심을 참아가며 몸짓으로 소통을 시도했는데 그 노력이 가상했는지 함께 갈 것을 허락해 주었다.

그렇게 아렌을 뒤따라 작은 개구멍을 통과한 순간 테시우스는 진심으로 놀라고 말았다.

일직선으로 깎인 절벽 아래 위치한 동굴 앞 넓은 공터의 하늘은 뻥 뚫려 있었고, 동굴 입구를 중심으로 양옆엔 푸릇한 새싹이 옹기종기 솟은 텃밭과 닭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동굴 입구 옆에는 대나무를 엮어 만든 뗏목 같은 것이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었는데 입구 바로 앞에는 기다란 수로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테시우스가 놀란 건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글을 읽다니?’

대부분 평민은 배움의 기회가 적어 듣고 말할 줄은 알아도 읽고 쓸 줄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산속 동굴에 사는 아이가 귀족일 리는 없으니 당연히 글을 모르는 평민일 거라 생각했다.

바닥에 ‘테오’라는 글자를 쓴 건 그저 저가 사람이라는 걸 공고히 하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아렌은, 읽었다.

‘뭔가 이상해.’

이질적인 공간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아이.

이런 깊은 산속에서 혼자 사는 것도 그렇고, 이만한 생활 공간을 구축해 놓은 것도 그렇고, 평민이면서 글을 읽는 것도 그렇고, 또…….

‘마도구를 가지고 있었어.’

멀찍이서 지켜보기만 해서 정확히 뭘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테시우스는 아렌이 책상 앞에서 만지던 것이 마도구라는 걸 눈치챘다.

평민은 절대 살 수 없는, 비싼 마력석이 박혀 있었으니까.

그건 아렌이 연고 통을 넣어 둔 마도구도 마찬가지였다.

그 철판 상자에선 서늘한 냉기가 흘러나왔는데, 테시우스는 일찍이 그러한 마도구를 본 적이 있었다.

‘수도에 한차례 열풍을 몰고 온 마도구니까. 황실 주방장이 무척 좋아했다 들었어.’

마력석을 박아 넣은 마도구는 원래도 있었지만 식자재를 늘 일정한 온도로 유지시켜 주는 ‘프리지’는 아니었다.

듣기로는 어떤 여자가 처음 주문을 넣어 만들게 된 것이라는데, 지하 저장고나 식자재실에 통째로 냉기 마법을 거는 것보다 활용도가 월등히 높았다.

마력석을 박아서 마나 스크롤보다 훨씬 오래가기도 했고.

그러니까 마도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아렌을 단순한 평민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래서 테시우스는 진명이 아닌 ‘테오’라는 아명을 대신 알려주었다.

적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오늘 처음 만난 아이에게 진짜 정체를 알려줄 수는 없으니까.

물론 제 발로 들어온 산에서 마주친 아렌이 제게 이상한 술수를 건 사람일 리는 없지만.

‘그럼 대체 누가?’

왜 굳이, 또 무슨 이유로?

짐승으로 바꾸는 술수를, 그것도 병인지 저주인지 모를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새에 걸었다면 그건 저를 언제든지 제거할 수 있다는 방증이나 마찬가지일 터인데.

왜 하필 그런 술수를 부린 건지, 그리고 이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푸릉.”

테시우스는 그로부터 한참 동안이나 골머리를 앓았으나 끝내 명확한 답은 찾지 못했다.

아렌이 돌아온 건 그가 뒤늦게 몰려온 피로에 기절하듯 잠든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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