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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2)화 (2/141)

2화

“…….”

거친 숨소리를 내며 앉아 있던 흑표범이 터벅터벅 그녀에게로 걸어왔다.

그리고 흉악할 게 당연한 맹수는 바로 옆에 앉아 마치 사람처럼, 아렌의 작은 어깨 위로 머리를 기대었다.

‘이게…… 뭐야……?’

그 말도 안 되는 행동에 아렌은 누군가 입을 틀어막기라도 한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려 흑표범이, 어깨에 머리를 기대다니!

허기가 졌다면 달려들고도 남았을 텐데, 달려들긴커녕 사람처럼 기댈 줄은 상상도 못 했던지라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흑표범은 그녀를 잡아먹는 대신 얌전히 기대고만 있었다.

‘혹시……. 사람이 길들인 맹수인 걸까?’

왜, 전생에선 돈 많은 부자들이 호랑이도 키우고 그랬잖아.

그래서 이렇게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것 아닐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꼭 사람 같은데…….

아렌은 혼란스러움에 안쪽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 상황에서 확실한 건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도망칠 수 없어.’

열두 살짜리 어린아이의 몸이 아니라 성인의 몸이래도 표범에게선 벗어날 수 없다.

여기서 흑표범은 마치 알아 달라는 것처럼 주둥이로 옆구리를 찔러 보여 주기도 했고, 지금은 어깨에 머리까지 기대고 있었다.

분명 짐승인데 하는 행동은 꼭 사람 같은 것이, 어째 순순히 보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따라올 것 같달까.

이유는 모르지만 마치 본능처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아렌은 한참을 고민한 끝에 말도 안 되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저기 있잖아…….”

“……컹.”

“우…… 우리 집으로 갈……래……?”

짐승이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리도 없는데 의문형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면서도 마치 변명하듯 아렌이 덧붙였다.

“그……. 고, 고기는 없지만 다른 음식은 있어. 그거 줄 테니까 나는 먹지 말고, 또 상처 연고도 있으니까 그거라도 발라 줄게. 가, 간지럼증은 잘 모르겠지만…….”

“크릉……!”

“조, 좋다는 거야?”

“컹!”

흑표범은 벌떡 일어나 아렌을 마주 보고 섰다.

그리곤 히 하며 번들거리는 송곳니를 드러냈다.

‘……웃는 건 아니겠지?’

아렌은 지나치게 긴 이빨을 보며 몸을 떨었다.

정말 혹시나 해서 말한 건데 어떻게 꼭 다 알아듣는 것처럼 대답하는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하지만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고 가까스로 일어난 순간 아렌은 보고 말았다.

어서 가자는 듯,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흑표범을.

그 부담스러운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아렌이 말했다.

“그럼…… 가자.”

“푸릉……!”

“그, 근데 나 무서운데 네가 앞장서면 안 돼……? 아, 기……길을 모르는구나…….”

뒤에서 흑표범이 졸래졸래 따라온다니.

상상만으로도 무서운데 방법이 없었다.

아렌은 아까 흑표범이 지은 표정보다 더욱 울상이 되어 마지못해 앞장섰다.

‘엄마…….’

제발 하늘에 있는 엄마가 자신을 지켜 주길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 * *

천만다행으로, 흑표범은 아렌이 했던 상상처럼 졸래졸래 따라오기만 했다.

뒤에서 덮친다거나 하는 일 없이 얌전히.

‘전생을 통틀어서도 이런 경험은 한 번도 없었는데.’

아니, 나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있긴 할까?

아렌은 잠시간 생각해 봤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너무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우선은……. 연고부터 발라 주고 보자.’

마침 간지럼증도 심해 보이고 하니 연고를 발라 준 뒤엔 맛있는 음식으로 깜박 잊게 만드는 거지.

그래야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렌은 제 딴엔 나름 치밀한 계획을 세우며 곧 개구멍 앞에 도착했다.

그러고 보니 씻으려고 간 건데 씻긴커녕 이런 엄청난 혹을 달고 오게 될 줄은…….

‘……나도 모르겠다…….’

아렌은 차마 대놓고는 못 하고 속으로만 한숨을 내쉬며 개구멍을 가린 나뭇가지를 치웠다.

“여, 여기로 들어오면 돼.”

아직도 이게 잘하는 짓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데려온 마당에 뭘 어쩔 수는 없어 아렌은 빈 양동이 먼저 건너편으로 넣은 뒤 뒤이어 들어갔다.

이윽고 커다란 앞발이 불쑥 튀어나오며 흑표범 또한 유연하게 개구멍을 통과했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아렌은 구멍 밖으로 팔을 뻗어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로 맞은편 입구를 가리고, 커다란 돌덩이로 안쪽 입구 또한 막았다.

그사이 흑표범은 어딘가 멍한 시선으로 가만히 앉아만 있을 뿐이었다.

“여기가 내 집이야.”

“…….”

“잠시만 기다릴래? 내가 뭣 좀 가져올 게 있어서…….”

“……크릉……!”

그 질문에 퍼뜩 정신을 차린 듯 흑표범이 낮게 울었다.

왜 아까부터 말을 다 알아듣는 것 같지?

‘대답도 꼬박꼬박 잘하고 말이야.’

아렌은 가늘게 눈을 뜨면서도 주춤주춤 걸음을 옮겼다.

그와 조금 멀어져서는 타닷 하며 거의 뜀박질하듯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후우…….” 하는 본심 어린 한숨이 튀어나왔다.

아렌은 빈 양동이와 가방을 내려놓기 무섭게 책상 위 소중한 액자를 집어 들었다.

“엄마……. 나 이제 어떡해……?”

집에 짐승을, 그것도 육식하는 맹수를 들였어.

말을 알아듣기는 하는 것 같은데 이제 불안해서 잠은 어떻게 자지?

밤중에 갑자기 덮치면 어떡해?

그리고, 어떻게 돌려보내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막막함을 대변하듯 바닷빛 눈동자에 심란함이 깃들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뭐야, 다 썼잖아?’

아렌이 종종 만들어 쓰는 천연 상처 연고는 보관 기간이 길어 보통 한 번 만들 때 넉넉하게 만들어 두는 편이었는데, 생필품을 담아 두는 상자엔 빈 연고 통만 남아 있었다.

만드는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난이도가 높은 편은 아니니 지금도 충분히 할 수 있긴 하지만…….

‘저 표범에게 보여 줘도 될까?’

이유는 모르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가지고 있던 전생의 기억은 아렌에게 있어 축복이자 저주였다.

그것도 민주주의가 아닌 신분제 사회에선 더더욱.

강탈당하고 빼앗겨도 억울함 한번 제대로 호소하지 못하는 곳에서, 어린아이가 백만금을 갖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언제 살해당해도 이상할 게 없는 세상인 것이다.

그래서 아렌은 천연 화장품 공방을 차렸던 전생의 기억을 살려 지금도 열심히 만들고는 있으나, 줄곧 ‘아실라’라는 가상의 인물 뒤에 숨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체를 밝히는 건 아무래도 꺼려졌다.

동굴 밖 공터에 앉아 있는 흑표범은 단순히 짐승이라고만 생각하기엔 지나치게 이상하고 독특했기 때문이다.

특히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대답하는 것이 유독 마음에 걸렸다.

이 세상엔 마법이라는 것도 존재하는데, 혹시 알아?

저게 짐승이 아니라 사람일지.

‘물론 말도 안 되는 생각이긴 하지만…….’

일단 숨기자.

그래도 연고는 간단한 편이니까 괜찮을 거야.

아렌은 애써 자위하며 책상 위의 상품들은 한쪽으로 밀어 치워 두고, 화장품 제작에 필요한 마도구를 꺼냈다.

그 옆엔 연고에 들어가는 재료 몇 가지와 계량스푼, 용기 등을 익숙한 배치대로 놓았다.

자주 하는 일이라 준비는 금세 끝났다.

하지만 그때, 잠자코 기다리고 있던 흑표범의 인내심도 끝을 보였다.

“컹?”

“어……. 와, 왔어?”

동굴 안으로 들어온 흑표범이 책상 건너편에 서 있는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일순 불안해졌지만, 아렌은 빠르게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어차피 말도 안 통하고, 본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괜히 불안해할 필요 없어.

아렌이 태연한 척 말했다.

“거, 거기 얌전히 앉아서 기다릴래? 내가 할 일이 있어서…….”

“크릉……!”

“고, 고마워.”

보이는 태도는 순한데 아무리 그래도 제 몸집만 한 짐승이다 보니 여간 무서운 게 아니었다.

아렌은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책상 위의 마도구, 핫플레이트의 회전 장치를 차르륵 돌렸다.

핫플레이트는 그녀가 일찍이 주문을 넣어 만든 마도구로, 사각형의 납작한 상자 같은 형상에 옆부분엔 손잡이가 달려 있었으며, 중심부엔 쇠로 만들어진 동그란 원판이 붙어 있는 모양새였다.

그 밑에 달린 회전 장치를 돌리면 장치에 새겨진 눈금이 마치 시곗바늘처럼 숫자를 가리키며 지정한 온도로 달아올랐다.

원하던 온도로 핫플레이트가 뜨겁게 달아오르자 아렌은 빈 용기를 올린 뒤 병풀과 카렌듈라 오일, 그리고 밀랍을 계량해 넣었다.

밀랍이 모두 녹았을 땐 핫플레이트에서 내려 잠시 식히고, 라벤더와 티트리에서 추출한 에센셜 오일을 넣어 섞었다.

천연 상처 연고는 이대로 용기에 부어 굳기만 기다리면 끝이었다.

원체 쉬운 레시피라 만드는 데 걸린 시간도 짧았다.

와중에 아렌은 빈 용기에 연고를 부으면서도 힐끔힐끔 흑표범을 살폈는데, 그는 연신 고개를 갸웃대며 아렌이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게 꼭 사람처럼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여러모로 혼란스러웠다.

‘정말 짐승이 맞나……?’

어떤 강아지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지만.

흑표범이 아렌에게 보여 준 행동은 여느 동물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육식을 하는 맹수이면서 잡아먹긴커녕 주인이라도 만난 듯 뺨을 핥질 않나, 주둥이로 옆구리를 쿡쿡 찔러 몸에 난 상처를 보여 주질 않나, 끝으론 어깨에 머리를 기대기까지 했다.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대답도 곧잘 하고, 묘하게 웃는 듯 히 하며 입꼬리를 끌어 올리기도 했다.

‘세상 어느 동물이 이렇게 행동하겠어? 마법에라도 걸리지 않는 이상.’

그러고 보니 전생에서 읽은 동화에 마녀와 함께 다니는 검은 고양이가 종종 나왔던 것 같은데.

사람처럼 말을 하기도 하고, 사람처럼 생각하기도 하고.

어쩌면 저 흑표범도 그런 게 아닐까?

아렌의 머릿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난 의구심은 곧 질문으로 튀어나왔다.

완성된 연고를 또 다른 마도구에 넣는 동안 곁에 다가와 눈을 동그랗게 뜬 짐승에게, 그녀가 물었다.

“저기……. 마, 말도 안 되는 소리긴 하지만 정말……. 정말 혹시나 해서 그런데…….”

“푸릉?”

“너……. 혹시 사람 말을 알아듣는 거야……?”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원인 모를 긴장감에 아렌이 침을 한 번 삼킨 순간.

“크르릉……!”

흑표범은 벌떡 일어나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녀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누가 봐도 기분이 좋을 때 나오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아렌이 진짜 놀란 건 그다음이었다.

주변을 돌던 흑표범은 대뜸 우뚝하고 멈춰 서더니, 곧 땅바닥을 유심히 쳐다보며 커다란 앞발을 척 들었다.

뭉뚝하기만 하던 앞발에 감춰진 발톱이 툭 튀어나온 그때였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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