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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화 (1/141)

1화

여름이 코앞으로 다가온 봄의 끝자락, 작은 흥얼거림이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갔다.

“……음흠흠, 내 돈줄. 음흠흠, 클리프가 좋아할 거야. 그날엔 삼겹살을 먹어야지! 월급날은 고기 파티! 맛있는 삼겹살!”

얼핏 노랫소리같이 들리는 목소리가 퍽 어렸다.

책상 앞에 서 빈 용기에 향기로운 액체를 붓는 아이의 새하얀 이마 위로 이슬 같은 물방울이 송글거렸다.

온통 삐뚤빼뚤한 밀색 머리며 입고 있는 옷이며 목소리까지 여느 남자아이와 다를 바 없었지만, 말간 얼굴 위 오목조목 자리한 이목구비는 손으로 빚은 인형 같았고 사슴처럼 큰 눈동자는 찬란한 바닷빛으로 반짝였다.

남자아이치곤 지나치게 예쁘장하게 생긴 아이는 올해로 열두 살이 된, 아렌이었다.

“……다 됐다! 주문 끝!”

아렌은 이마 위로 배어 나온 진땀을 쓱 문지르며 뿌듯하게 웃어 보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짬짬이 만든 것인데 이번에도 석 달이 지나기 전 주문 수량을 모두 채운 부지런한 자신이 무척이나 대견했다.

“여기에 특별 선물도 준비했지. 클리프가 분명 좋아할 거야!”

안 봐도 뻔한 그의 호들갑을 상상하니 절로 피식하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물론 그것보다 좋은 건 그의 부하가 건네줄 묵직한 돈주머니지만.

아직 받지도 않은 돈인데 이미 받은 것처럼 마음이 풍족해, 아렌은 책상 끄트머리 액자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투명한 유리 너머 소중하게 보관된 그림 속 여인은 아름다웠다.

아드리아나 프리테.

타오르는 화염 같기도, 최상급 비단 같기도 한 윤기 어린 붉은 머리칼은 강렬했으나 유명한 휴양지의 에메랄드빛 바다를 고스란히 담아온 듯한 눈동자엔 언제나 따듯한 온기가 어려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은 아렌이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었다.

“엄마 딸 능력 좋지? 황후 폐하도 내가 만든 화장품만 쓰는데, 이렇게 가다가는 진짜 백만장자 될까 봐 무서울 정도야!”

물론 황후는 ‘아렌’이 아닌 ‘아실라’로 알고 있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쨌든 다 저가 이룬 것이라 아렌은 헤실헤실 웃음을 흘렸다.

“빨리 어른이 됐으면 좋겠다, 그럼 내 명의의 살롱도 세울 수 있는데. 지금은 돈이 많이 모자라지만 그때쯤이면 다 모이겠지? 참, 살롱 이름은 엄마 이름으로 할까 싶어. 나중에 아빠가 찾아올 수도 있잖아. 그리고 아빠를 만나게 되면…….”

돌아오는 대답도 없는데 아렌은 혼자서 주절주절, 마치 대화하듯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몸은 바쁘게 움직였다.

오전 중엔 밭일을, 낮엔 화장품만 만들다 보니 온몸이 땀으로 끈적거려 계곡에서 시원하게 씻고 올 참이었다.

완성된 화장품은 책상 한편에 밀어 놓고, 자잘한 뒷정리를 마친 뒤엔 갈아입을 옷과 몸을 씻을 때 쓸 비누, 수건 등을 빠짐없이 천 가방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빈 양동이까지 챙긴 아렌은 씩씩한 목소리로 액자를 향해 외쳤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씻고 금방 돌아올게요!”

호기롭게 동굴을 나선 아렌은 작은 공터를 지나 진작 파 둔 개구멍 위의 돌덩이를 치웠다.

동굴과 공터를 빙 둘러싸듯 자란 나무는 얇고 빽빽하게 얽혀 있어 굳이 울타리를 칠 필요가 없었지만, 그런 만큼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어 개구멍으로만 통과할 수 있었다.

아렌은 양동이 먼저 건너편으로 밀어 넣고 뒤따라 구멍을 통과했다.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로 입구를 가린 뒤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을 내려갔다.

“빨래를 다 하면, 집에 돌아와서 우렁이 된장국을 끓일 거야. 맛있는 된장국! 맛있는 쌀밥! 그리고 달걀 프라이까지 해 먹을 거야!”

입만 열었다 하면 음률이 들어간 혼잣말이 자동으로 흘러나왔다.

아렌은 양동이를 든 팔을 붕붕 흔들며 길이 없는 험한 산을 다람쥐처럼 날래게 타고 내려왔다.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가까워졌을 땐 발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그렇게 도착한 계곡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자연이었다.

구불구불한 계곡 곳곳에 크고 작은 바위가 튀어나와 있었고, 모기인지 하루살이인지 모를 작은 벌레들이 왱왱거리며 날아다녔다.

모두 그녀의 눈에 익숙하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딱, 하나만 빼고.

“크앙……! 캉!”

* * *

‘저게……. 뭐야……?’

기다랗고 부드러워 보이는 꼬리는 퍽 길었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검은 털은 꼭 비단같이 보였다.

접힌 뒷다리는 고양잇과가 분명했고, 몸통 또한 길쭉했다.

익숙한 풍경 속 유일하게 이질적인 존재는 다름 아닌 흑표범, 그것도 제 몸집만 한 짐승이었다.

‘여기에 왜 표범이 있는 거야……?’

아렌은 너무 놀란 나머지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가늘게 떨었다.

산속에서 산 지 삼 년이 지나도록 몽실한 토끼털 한 번 본 적이 없는데 이런 날벼락이라니!

아렌이 굳이 이 산을 선택해서 들어온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일찍이 사냥꾼들이 짐승의 씨를 말린 탓에 제 목숨을 위협할 만한 큰 맹수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물론 천연 요새 같은 동굴이 있다는 점도 한몫했지만 어쨌든 근 십 년간 멧돼지 한 마리 나타난 적이 없다 들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표범이 나타나냐고……!’

심지어 흑표범은 하는 짓도 이상했다.

대뜸 자갈밭 위에 발라당 뒤집어 눕고는 연신 비비적거리다가, 또 벌떡 일어나서는 두꺼운 나무 둥치에 옆구리를 마구 비벼 대며 울었다.

“크헝……. 크르릉……!”

“…….”

원래 흑표범이 저렇게 울던가……?

다소 경박한 울음소리에 아렌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저런 행동을 어디선가 본 것도 같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머릿속에 한 가지 이미지가 떠올랐다.

‘설마 번식기?’

사실 표범은 처음 보지만 그래도 고양잇과가 아닌가.

아렌은 길고양이들이 교미할 때가 오면 이곳저곳 몸을 비비적대며 독특한 울음소리를 내는 걸 몇 번 보았다.

그리고 흑표범의 행동은 그것과 꽤 흡사했다.

‘……어쩌면 그래서 이 산까지 흘러 들어왔을 수도 있겠어.’

꽤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하지만 번식기든 뭐든 간에 저 살벌한 송곳니를 가진 짐승이 육식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라, 아렌은 잔뜩 긴장한 채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도망쳐야 해.

그러나 그 순간, 뒷걸음질에 치인 돌멩이 하나가 잘그락 소리를 내며 근처에 나가떨어졌다.

나무 둥치에 몸을 비비느라 정신이 없던 흑표범이 아렌을 향해 번쩍 고개를 돌렸다.

‘안 돼……!’

저를 정확하게 응시하는 흉흉한 금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아렌은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아직은 거리가 좀 있긴 하지만 이대로 전력 질주를 한들 표범의 속도를 이길리가, 그렇다고 망부석처럼 가만히 서 있을 수도 없고……!

머리는 생각으로 바삐 돌아가는데 몸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사이 기다랗고 새하얀 송곳니를 드러낸 맹수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정확히, 아렌을 향해.

“크르르…….”

“오, 오지 마……!”

짐승이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리도 없는데 다급한 마음에 본심부터 튀어나왔다.

아렌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면서도 시선은 표범을 향해 고정한 채였는데, 원체 급해서일까.

아까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말았다.

“……꺄악!”

미처 보지 못한 돌부리를 디딘 순간, 발목이 꺾여 넘어짐과 동시에 언제나 조심조심 내려가던 비탈길에서 주르륵 미끄러졌다.

저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은 아렌은 머지않아 상대적으로 평평한 지반에서 멈췄다.

하지만 멈췄다는 것을 알고도 두 눈은 여전히 감은 채였다.

여기서 눈을 뜨면 아까 본 맹수의 일렁이는 금안을 바로 코앞에서 마주할 것 같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갈 줄이야…….’

질끈 감은 눈꺼풀 사이로 눈물 한 방울이 새어 나왔다.

아렌은 짐승의 날카로운 송곳니에 찔려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하는 죽음을 직감하고 바들바들 떨었다.

하지만 그 순간.

“……어?”

아렌은 놀라 번쩍 눈을 떴다.

얼굴에 닿은 것은 뾰족한 이빨이 아닌, 따듯하고 말캉하면서 축축한 무언가의 감촉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앞에는, 짐승인데도 불구하고 어딘가 울상이 된 듯한 표정의 흑표범이 혀를 비죽 내민 채 얌전히 앉아 있었다.

“크릉……. 크허엉……!”

아까와 마찬가지로 흉악한 맹수답지 않은, 조금 경박한 울음소리를 내면서.

“뭐, 뭐야?”

머릿속에 물음표 하나가 떠오른다면 딱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아렌은 당황한 나머지 혼잣말 같기도, 흑표범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한 의문을 내비쳤다.

“커헝!”

그러자 흑표범은 난데없이 고개를 돌려 옆구리 쪽을 주둥이로 쿡쿡 찔렀다.

그리곤 다시 아렌을 쳐다보며 또다시 울상지었다.

‘……뭐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아렌은 마치 사람 같은 표정에 홀린 듯 시선을 옮겨 옆구리를 빠르게 훑었다.

“응……?”

순간 아렌은 허탈하게 웃을 뻔했다.

그도 그럴 게 멀리서는 그저 까맣게만 보이던 몸통엔 우습게도, 커다란 땜빵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털이 한 뭉텅이 빠졌다고는 볼 수 없는 땜빵이었다.

‘딱지가 앉았네?’

얼굴을 들이밀어 유심히 살펴보니 옆구리 말고도 곳곳에 크고 작은 땜빵들이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딱지가 떨어져 나가 피 섞인 진물이 나거나, 아니면 피부가 발갛게 부어오른 것들이었다.

“캉……!”

그때, 조금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흑표범은 또 한 번 발라당 뒤집어 땅바닥에 몸을 이리저리 비벼 대기 시작했다.

동시에 아렌의 머릿속 의문이 더욱 짙어졌다.

‘……그것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뭐지?’

동물이 몸을 사방에 마구 비비는 이유가 또 뭐가 있더라?

땜빵에 딱지, 그리고 부비부비.

그러면 남은 건…….

‘혹시 간지러운 걸까?’

왜, 곰도 등이 가려우면 나무에 기대고 비비잖아.

아렌의 눈살이 더욱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 한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손을 뻗어 맹수의 몸을 긁어 줄 용기는 없었다.

더구나 딱지까지 앉은 상처는 긁을수록 독이 되는 걸 아는지라 대놓고 긁어 달라 해도 해 줄 수 없었다.

그러나 한참 동안이나 자갈밭 위에서 몸을 굴리다 씨근덕대며 지친 숨소리를 내뱉는 흑표범은 지켜볼수록 어딘가 안쓰럽고, 또 불쌍했다.

결국 아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마음 같아선 도망치고 싶은데 뒤에서 덮칠까 봐 얌전히 있는 것도 있었다.

당장은 순해 보여도 허기지면 달려드는 게 짐승이라, 그것도 육식을 즐기는 최상위 포식자를 고양이 대하듯 만져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뭘 어째야 할까, 아렌이 고민하던 그때였다.

“……푸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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