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89화 (외전 완결) (189/189)

189화

34. Epilogue

마을의 변화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일어났다.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는 없었으나 살아남은 이들도 어차피 예전 모습의 재현을 바라지는 않았다. 사라진 이들의 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질 터였기에.

마을 북쪽으로 이어지는 숲의 나무를 일부 베어내어 길을 내고, 베어 낸 나무로 교회 옆에 오두막을 새로 지었다. 오딜과 아페티트, 나자예프, 그리고 바르셀다가 머물 곳이었다.

“우리도 그냥 북쪽에서 살면 안 돼? 이 상황에서까지 금남구역인지 뭔지를 설정할 필요가 있나?”

나자예프의 불평은 누군가가 집어 던진 신발과 함께 날아갔다. 쏟아지는 맹비난에 쭈그러든 나자예프를 밀어내고 마을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건 바르셀다의 몫이었다.

아페티트는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가끔은 불에 타 무너진 창고 옆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다가, 교회 안으로 들어와 사비나와 에르잔에게 무슨 말을 건넸다가, 식사를 하러 달려온 나자예프를 보고 한심하다는 듯이 쏘아붙여 말싸움을 하기는 했으나 마을 사람들과 섞이지는 못했다. 겉돈다기보다는, 그 자신이 홀로 있는 쪽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내 거처 같은 건 필요 없어.”

유달리 빛깔이 고운 통나무로 집은 오두막을 보고, 오딜이 구시렁거렸다.

기본적인 설계는 함께했지만 자재를 운반하고 집을 짓는 작업에 오딜은 참여하지 못했다. 한쪽 팔이 없어도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건 문제 없다고 말했지만, 사비나가 그렇게 두지를 않았다.

오딜이 무리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는 한마디에 그는 순한 양처럼 그루터기에 앉아 대기했다. 다른 사람이 그 말을 건넸더라면 자신이 이깟 짐 좀 나르는데 무리할 만큼 허약한 남자로 보이냐며 호통을 쳤을 텐데, 사비나의 말 한마디에 바로 꼬리를 내린 개처럼 얌전해지는 오딜을 보고 마을 사람들은 다들 놀라워했다.

“나는 그냥 나무 그늘에서 자면 되는데.”

“날이 추워지면 어쩌려고요?”

“그럼 교회로 들어가면 되지.”

“목욕은 어디서 할 건데요?”

사비나의 질문에 오딜은 합 입을 다물었다. 위생과 청결에 관련해서는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처음 만났을 때 거렁뱅이 모습이었던 게 문제였는지, 아니면 사비나의 거처를 찾아간 날 에르잔에게 트집을 잡은 것이 문제였는지 사비나는 오딜의 약점을 공격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목욕은, 뭐…… 나 또 냄새나냐?”

“네.”

“그래? 일주일 전에 씻었는데…….”

“에르잔은 아침저녁으로 씻는데요.”

“…….”

에르잔과 비교를 하니 더욱 할 말이 없어졌다. 오딜은 큼, 목을 가다듬고는 헛간 옆에 자리한 커다란 목욕통을 향해 다가갔다.

“무슨 욕탕이 이렇게 작아? 퍼질러 앉기도 힘들겠구먼.”

“욕조가 크면 물 길어오기 힘들다고 오딜이 불평해서 작게 만든 거잖아요!”

사비나가 한 소리 하자 오딜의 불평이 쏙 들어갔다. 수건이나 빌려와야겠다면서 오딜은 뒷머리를 긁으며 사라졌다. 할 말이 없을 때 그는 늘 이런 식으로 자리를 피했다.

“사비나 아가씨. 오딜을 너무 몰아세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몰아세운 적 없어요. 에르잔한테 했던 딱 그만큼만 갚아 줄 뿐인걸.”

“……복수하는 데 낭비할 시간은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나 한정이죠. 에르잔을 건드리면 나도 가만히 안 있어요.”

사비나가 새침하게 대답했다. 에르잔은 그것이 미안하고 감사하면서도 또 사랑스러웠다. 사비나의 어깨를 살짝 붙잡고 끌어당겨 정수리에 입을 맞추자, 사비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에르잔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에르잔. 오두막 짓느라 고생 많았죠?”

“아닙니다.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뭘 배웠는데요?”

“우리가 머무는 오두막도 많이 낡지 않았습니까. 이번에 지으면서 구조를 익혔으니, 그곳도 보수를 해야…….”

“보수를 왜 해요?”

“예?”

낡은 집에 계속 있겠다는 뜻인가? 에르잔이 의아하게 묻자, 사비나가 까치발을 뜨고 고개를 들어 에르잔의 턱에 키스했다.

“우린 금방 떠날 건데.”

“떠나신다고요? 어디로요?”

“어디긴 어디예요. 에르잔과 내가 있을 곳이지.”

“……설마, 콘바야젠 백작가로 돌아가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백작 아니고 공작이라고 했어요. 작위를 받는다고 저택이 갑자기 넓어지지는 않았겠지만.”

에르잔은 당황했다. 콘바야젠 백작가는 사비나를 불행하게 만들었던 장소가 아닌가. 그곳으로는 눈길도 두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그녀가 나고 자란 이 마을이 고향이고, 삼촌인 오딜도 있으니 당연히 이곳에 정착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에르잔의 집이잖아요.”

“저는 괜찮습니다. 귀족의 삶을 바란 적도 없고…….”

“내가 주고 싶어요.”

사비나가 손을 뻗어 에르잔의 입술을 더듬었다. 에르잔. 그녀의 기사. 그녀가 있던 자리의 원래 주인. 그리고 지금부터 앞으로도 계속, 같은 자리에 함께 있을 반려.

“우리가 처음 만난 장소잖아요.”

사비나와 에르잔이 처음 만난 장소. 사비나의 인생에 빛이 스며든 첫 순간. 계단을 내려와 홀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 서로를 눈에 담았던 소중한 기억이 깃든 장소였다. 잃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랬잖아요. 나는 욕심이 많다고.”

“원하는 건 저 하나뿐이라고 하셨으면서.”

“에르잔 하나뿐이에요. 그래서 에르잔에게 전부 주고 싶어요.”

원래는 에르잔의 것이었던 자리. 한때 사비나가 빼앗았던 자리. 그 자리를 벗어나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차지하기 위해서.

“에르잔. 이번엔 내가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게요.”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이것이 행복일까. 에르잔은 벅차오르는 심정을 숨기지 못하고 사비나를 끌어안았다.

“벌건 대낮에 뭐하는 짓들이야!”

별안간 오딜의 호통이 날아들었다. 에르잔이 움찔 몸을 굳히며 팔을 내렸으나 사비나는 에르잔의 허리를 더욱 꼭 끌어안으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뭘 하긴요. 에르잔이 좋아서 끌어안고 있는 건데.”

“뭐?”

“에르잔이 안아주면 따뜻해서 기분 좋단 말이에요. 나는 이러고 있는 게 편하니까 상관하지 마세요.”

“어른 앞에서 별 소리를 다 하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어른 앞이 어때서요. 나도 어른인데. 그렇죠, 에르잔?”

사비나가 다시 고개를 들어 발돋움하자, 에르잔은 잠깐 오딜의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사비나의 뺨에 키스했다. 입술에 하지 않은 것이 그의 마지막 양심이었으나 사비나는 불만족스러운지 입술을 씰룩거리더니, 혀를 내밀어 에르잔의 입술을 핥았다.

“저, 저……!”

오딜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뻐끔거리더니, 가지고 있던 수건을 쥐어뜯을 기세로 움켜쥐었다.

기가 막힌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는 오딜 때문에 에르잔은 조금 마음이 켕겼으나 사비나를 떼어놓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 앞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게 남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은 알지만, 사비나가 원한다면 에르잔은 수치 따위는 언제든 버릴 수 있었다. 그녀보다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목욕을 하셔야 할 테니 자리를 비켜드리죠. 편히 쉬십시오, 오딜.”

“뭐야?”

“가시죠, 사비나 아가씨.”

“이봐, 애송이! 야! 너희들 또 대낮부터 그짓하러 가는 거 아니지? 이 자식아, 대답은 하고 가!”

뒤에서 오딜이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에르잔은 사비나를 안아든 채 느긋하게 걸었다. 한낮의 태양빛을 받은 길이 엷은 모래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오딜은 정말, 목소리만 크고…….”

“아가씨를 걱정하시는 겁니다.”

사비나는 못마땅한 듯이 미간을 찌푸렸으나 결국 수긍했다. 오딜이 그녀를 걱정하는 것은 알고 있다. 여동생인 올가는 죽었고, 그 딸인 사비나는 어엿한 성인이니 더는 상관하지 않겠다고 말해놓고서도, 오딜은 번번이 사비나를 애 취급했다.

“말만 조카라서 아낀다고 하면 뭐해요. 내가 싫어하는 일만 하는데.”

“사비나 아가씨. 오딜의 말투가 거칠긴 하지만 처음에 비하면 굉장히 조심하고 있는 겁니다.”

“에르잔한테 호통을 치잖아요. 나한테만 말 곱게 하면 무슨 소용이에요?”

사비나가 에르잔의 가슴에 기대 뺨을 부볐다. 에르잔은 그녀가 이렇게 투정부리듯 매달릴 때마다 웃음을 참느라 고생했다. 별것 아닌 말 한마디에도 가슴이 간질간질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으나 싫지는 않았다. 사비나가 늘 다른 사람보다도 에르잔을 신경 쓴다는 것이 그녀의 대인관계를 위해서는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를 말리고 싶지 않았다.

“사비나 아가씨께서 떠나시면 오딜도, 이 마을 사람들도 쓸쓸해할 겁니다.”

“아주 못 보는 것도 아닌걸요. 이 산도 콘바야젠의 영지니까, 원하면 언제든지 올 수 있어요.”

“그건 그렇군요.”

알렉세이가 죽었으니 콘바야젠 가문을 통솔할 권리는 소공작인 사비나에게로 넘어간다. 초대 콘바야젠 백작의 피를 이은 직계 자손이 모두 저주받아 죽어 없어진 상황이니 만약 사비나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가문이 와해되어 흩어질 것이나, 사비나는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에르잔에게 콘바야젠의 성을 돌려주고, 그가 가문을 되찾도록 하고 싶다는 사비나의 말에 에르잔은 순순히 고집을 꺾었다. 그녀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주고 싶었으므로.

“어라? 에르잔. 이 길이 아닌데요?”

동쪽에 있는 두 사람의 오두막으로 돌아갈 줄 알았던 사비나는 에르잔이 숲 속으로 들어오자 의아해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북쪽 숲. 북쪽 탑이 있는 언덕이 멀리 보였다. 사비나는 에르잔이 향하는 방향을 가늠하고는 아, 작게 감탑하고는 얌전히 안겨 있었다. 사박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멈추고 탁 트인 공터가 나타났다.

그곳은 사비나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추억의 장소. 그녀가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장소다.

“에르잔. 왜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어요?”

“사비나 아가씨의…… 아버님께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아버지의 법복은 교회에 있는데.”

“그건 로스카옌 신부님의 것이지요.”

저주로 인해 온몸이 녹아내린 로스카옌은 관에 담을 시체조차 건질 수 없었다. 결국 로스카옌이 죽을 때 입고 있던 검은 법복과, 북쪽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널브러져 있던 법모를 회수해 장례를 치렀다. 더 이상 신에게 예배를 올리지 않는 교회에는 이 마을의 마지막 사제가 입었던 검은 사제복만이 남아 있다.

“사비나 아가씨께서 ‘아버지’를 묻어드린 곳은 이곳이지 않습니까.”

에르잔은 조용히 사비나를 내려놓고 바로 섰다. 두 사람의 앞에 있는 것은 사람의 무덤이라기엔 너무 작고, 그냥 쌓아놓은 흙더미라기엔 세심하게 돌본 흔적이 가득했다.

그 밑에는 로스카옌의 일기장 열다섯 권이 묻혀 있었다.

“어머니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이곳밖에 없었어요.”

북쪽 언덕 아래에 묘비가 늘어서 있지만,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아 어느 것이 올가의 묘인지는 마을 사람들도 알지 못했다. 사비나는 아버지를 어머니의 옆에 묻고 싶었으나, 부부라는 언약을 맺지 못한 남녀는 죽어서도 함께할 수가 없었다. 수많은 무덤들이 섞여 있어 찾을 수 없는 어머니. 그리고 시체조차 건지지 못해 ‘무덤’을 만들 수 없는 아버지. 고약한 운명은 두 사람의 만남을 끝내 방해했다.

그래서 사비나는 로스카옌의 일기장을 이곳에 묻었다. 자신과 어머니가 살던 장소에.

“이곳에 와보고 싶은데 와보지 못했겠죠. 이곳에서 8년 동안 나와 어머니가 어떻게 살았는지 아버지는 몰라요.”

사비나는 무덤가에 쪼그리고 앉아, 흙 위에 떨어진 나뭇잎을 걷어냈다.

“그리고 나와 어머니가 서로 다른 의미로 이곳을 떠난 이후 아버지가 15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어머니는 알지 못하죠.”

사비나는 로스카옌의 일기를 읽으면서 그동안 아버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지만, 죽어버린 어머니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한 곳에 두고 싶었다. 추억이나마 함께 하길 원해서. 단절된 두 사람의 과거를 하나로 이어주고 싶어서.

“그런 거라면 그분의 유품도 이곳에 묻는 게 좋지 않았겠습니까?”

“아버지는 ‘사제’로서는 이곳에 묻히고 싶지 않을 걸요.”

사제 로스카옌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하지 않는 삶을 택했다. 칼과 같은 죄책감을 가슴에 품고 묵묵히 기도하며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니 사제인 그를 이곳에 묻을 수는 없다.

하지만 기억은, 추억은 묻을 수 있지 않은가.

“사비나 아가씨. 콘바야젠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시는 이유가…… 혹시 이 마을에 남아있는 것들이, 아가씨를 괴롭게 하기 때문입니까?”

“아뇨.”

사비나는 깔끔하게 부정했다.

“이 마을에는 참 괴로운 추억이 많아요. 즐거운 일보다 서글픈 일이 가득하죠. 하지만 내가 마을을 떠나 콘바야젠 저택으로 가려는 건 이 장소에 상처가 가득하기 때문이 아니에요.”

“그러면요?”

“내가 행복해지고 싶어서요.”

사비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에르잔을 올려다보았다. 에르잔은 그녀의 무릎에 달라붙은 흙먼지를 털어주려 몸을 굽혔으나, 사비나가 그를 끌어안는 바람에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무엇을 원했는지는 몰라요. 복수를 바랐을 수도 있고, 잊히지 않도록 두 분을 기억하는 무언가를 남기길 바랐을 수도 있죠. 반대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싶어 했을 수도 있고.”

죽은 사람의 욕망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사비나에게 존재하지 않는 이들의 소망을 읽어내는 능력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아요. 내가 행복해지길 바라셨다는 거.”

무언가를 남기고 싶었는지, 없애고 싶었는지, 바꾸고 싶었는지 그대로 두고 싶었는지 사비나는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알고 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딸인 사비나가 행복해지기를 염원했다는 것.

“그래서 에르잔의 자리로 가려는 거예요.”

에르잔의 자리.

사비나의 자리가 아니라, 에르잔의 자리.

그녀를 사랑하는 에르잔의 자리. 그녀가 사랑하는 에르잔의 자리.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두 사람이 온전히 하나로 있을 수 있는 자리. 그곳에서 행복을 찾고 싶었다.

키가 큰 에르잔은 몸을 웅크려야 사비나와 겨우 눈높이가 맞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다가, 신호도 하지 않았는데 동시에 눈을 감고 입을 맞추었다.

“그럼 가실까요? 나의 아가씨.”

“그래요.”

여덟 살 겨울, 사비나는 이 마을을 떠나야 했다. 낯선 이들의 손에 이끌려서.

그리고 스물세 살 여름, 그녀는 또다시 이 마을을 떠난다. 이번에는 그녀 자신의 의지로.

뒤집어진 세상이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어른이 된 소녀는 원래 세상에 머무르기를 바라지 않았다.

상처받은 과거를 없앨 수는 없지만, 잊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래를 희생할 이유는 없다. 과거의 불행을 긍정한다고 하여 현재의 행복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니까.

사비나는 과거를 버리지 않았다. 지우지도 않았다. 인정하고 직시하되, 내버려두었다. 그래서 그녀의 뒤에는 이제까지 걸어온 길이 만들어지고 앞으로 갈 방향을 제시해준다.

“에르잔. 어둠 속에서 하나뿐인 불빛이 흔들리면 방랑자는 멈춰 서서 불빛을 지키는 데 몰두하게 된다고 했잖아요.”

“그랬지요.”

“하지만 불빛은 자신의 빛으로 방랑자를 이끌고 싶어할 거예요.”

“사비나 아가씨…….”

“나는 에르잔을 이끌고 싶어요.”

행복이 있는 자리로.

“저는 지금도 행복합니다.”

“그럼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기로 해요.”

에르잔의 자리는 무척 커서 사비나가 함께 있어도 넘치는 일이 없다. 한없이 자신을 받아주는 편안하고 안온한 자리를 얻었다면 인간은 다음으로 무엇을 욕망할까.

“나와 함께.”

멈춰 있던 시간이 흐르고 방황하던 자리에 길이 생겼다. 상처는 흉터로 남았으나 두 다리는 온전하니 얼마든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늪이 마르고 나타난 단단한 바닥에 두 발을 디딘 연인이 나란히 섰다. 푸른 하늘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 완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