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88화 (188/189)

188화

카림은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의 눈에 빛이 돌아오는 것을 사비나는 보았다. 처음으로 연못의 저주를 흡수했을 때, 교회로 달려가던 카림이 저를 보는 눈빛이 저러했던가. 뿌옇게 안개가 낀 것 같았던 잿빛 눈동자에 유리처럼 맑은 빛이 돌아왔다.

“나는 불행해지고 싶지 않아.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그래서 네가 일어서기를 원해. 나를 원망해서라도.”

“…….”

“원망받기를 바라는 건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야. 나는 네가 나를 원망하는 마음으로 일어나서 열심히 살기를 바라고, 또 너에게 원망받는다는 사실로 내 죄책감을 지우고 싶거든.”

사람을 찔러 죽인 칼이라면 느끼지 않을 죄책감을, 사비나는 인간이기에 느껴야 했다. 천벌을 받고 고통스럽게 남은 삶을 바칠 생각은 더 이상 없지만, 익숙한 원망을 끌어안고 사는 건 가능하다.

누구로부터도 원망을 듣지 않고, 호의와 감사 속에 사는 삶이야말로 사비나에게는 고통이었으므로.

“누나는 이상한 사람이에요.”

“나는 나쁜 사람이야.”

“나쁘지 않아요. 그냥 이상한 사람이에요.”

카림이 손등으로 뺨을 닦았다. 꾀죄죄한 몰골이었던지라 닦는다고 해서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카림은 의미도 없는 마른세수를 계속했다.

꼭 자신에게 들러붙은 고통을 떼어 내려는 것처럼.

“로스카옌 신부님이 그랬어요. 슬퍼하는 사람을 구원하는 건 기쁜 일이 아니라 이상한 일이라고.”

“이상한 일?”

“슬픈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기쁘고 행복해하는 사람을 마주하면 오히려 슬픈 마음이 더욱 커진대요. 자신이 비참해져서.”

그런데, 라고 카림이 말을 이었다.

“이상한 사람을 보면, 슬퍼하려던 것을 멈추고 그 이상한 사람을 지켜보게 된대요. 그 사람이 하는 이상한 짓을 구경하느라 슬픔을 잊는 거죠.”

“로스카옌 신부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

“네.”

카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입에서 예상치 못하게 로스카옌의 이름이 나오자 사비나는 조금 아연해졌다. 그녀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일기장을 읽을 때는 무척 겁이 많고, 감정적이고, 격정적인 사람이었는데.

카림에게는 상당히 엉뚱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네……. 촛불이 흔들리는 순간부터, 주위를 밝히려던 원래 목적은 사라지고 촛불을 꺼뜨리지 않게 하는 데 집중하게 된다고 했으니까.”

“네?”

“내가 카림이 더는 아파하지 않도록 해 줄게.”

사비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아이의 손을 붙잡았다. 사비나보다도 작은 손.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그 손에 살짝 힘이 실리더니, 아이가 사비나의 손을 잡아끌어 뺨에 가져다 대었다.

“그때도 누나가 이렇게 만져 줬더니, 아프지 않게 되었어요.”

카림은 손의 온기를 느끼듯 눈을 감고 사비나의 손바닥에 뺨을 부볐다. 아이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손끝을 스쳤다.

“누나는 신기한 사람이에요.”

“아까는 이상한 사람이라더니?”

“이상하고 신기한 사람이에요. 꼭 마법 같아.”

카림이 반짝 눈을 뜨더니 사비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웃지는 않았지만, 눈빛에 더 이상 괴로운 기색은 없었다.

“엄마가 계속 차가운 물속에서 살아 있으면서, 내가 구해 주길 기다리고 있었더라면 더 괴로웠을 거예요.”

“카림. 네 엄마는…… 네가 연못을 떠도는 걸 걱정하셨을 거야.”

“그래요. 누나가 그걸 멈추게 해 줬죠.”

카림은 사비나의 손등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녀의 손목을 양손으로 감쌌다. 아이의 두 손은 자그마했으나 사비나의 손목을 감싸기에 충분했다.

“누나한테 고마워한 걸, 엄마는 싫어할지도 몰라요.”

“네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나 때문이니까…….”

“하지만 내가 행복해지면, 엄마는 좋아할 거예요. 그건 분명해요.”

15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그날의 충격적인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군인들의 손에 떠밀려 연못에 처박히는 사람들. 카림이 칼에 찔리지 않도록 몸으로 보호하던 어머니는 결국 아이를 안은 채 물에 빠져 버렸다.

“엄마가 그랬어요. 조금만 참았다가, 군인들이 돌아가면 헤엄쳐서 연못을 벗어나라고.”

헤엄도 치지 못하면서, 필사적으로 카림의 몸을 떠받치며 아이의 어머니가 말했다. 자신의 생존보다도 아이의 안전을 택했던 것이리라.

“군인들에게 복수해 달라고 하지 않았거든요.”

“…….”

“내가 위험해질까 봐 걱정하신 걸 거예요. 어쩌면 복수심이 내 행복을 가로막을까 걱정하셨는지도 모르고.”

그래서 카림은 연못 주위를 맴돌았다. 어머니를 죽인 군인들을 쫓아가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어머니를 걱정해서. 연못 주위를 빙빙 돌았다.

어머니의 복수를 하기보다, 어머니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욕망이 더욱 컸기 때문에.

“다시 만났어요. 그리고는 엄마가 하늘로 갔죠. 나는 여전히 살아 있고요.”

“카림.”

“15년 동안 괴로워했어요. 더는 괴로움이 나를 좀먹게 하고 싶지 않아.”

아이의 목소리에 갑자기 힘이 실렸다. 카림은 사비나의 손목을 놓고, 뒷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버석버석한 잿빛 머리카락이 앙상한 손가락 사이에서 흐트러졌다.

“이제는 내가 어른이 되는 데 집중할래요.”

카림의 나이를 계산해 보면, 사실은 사비나보다도 두 살이 더 많다. 그런 카림에게 ‘누나’라고 불리는 것이 어쩐지 민망했다. 하지만 모로 보아도 어린아이인 카림을 자신보다 연상의 남자로 간주하는 건 더 이상했다.

“카림은 이미 어른이야. 하지만 앞으로는 더 훌륭한 어른이 될 거야.”

“내가 어른이 되면, 누나한테 청혼해도 돼요?”

“……응?”

사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카림이 피식 웃었다.

“나자예프 아저씨가 차였다고 들었거든요.”

누가 이야기를 한 걸까. 카림에게 식사를 가져다주는 바르셀다인가. 아이에게 별소리를 다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가, 바르셀다로서는 카림의 기운을 북돋워 주기 위해 마을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이야기를 들려준 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나자예프의 동생이면서 그런 이야기까지 하다니…… 바르셀다는 나자예프를 걱정하지 않나 봐.’

물론 걱정하는 것도 이상하기는 했다. 나자예프 본인은 진지하게 슬퍼하는 것 같지만, 그 일을 언급하는 바르셀다의 모습은 전혀 형제를 걱정하는 것 같지 않았다.

마치 ‘형이 또 미친 짓을 하는구나’라고 측은한 눈으로 지켜보는 것 같다고 할까. 그렇다면 바르셀다가 나자예프의 이야기를 카림에게 한 것도 이해가 간다.

슬픔을 잊게 하는 데는 기쁜 것보다 이상한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하지 않았나.

“카림. 나를 원망해도 좋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아무 말이나 막 건네면 안 돼.”

“정말인데.”

카림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사비나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진심일까. 모로 봐도 고백처럼은 들리지 않았지만, 어린아이의 말이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사비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카림, 나는 에르잔을 좋아해.”

“지금은 형이 멋진 남자지만, 10년 뒤에는 아저씨일걸요. 나는 청년이고.”

이미 에르잔보다 일곱 살이나 나이가 많으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사비나는 나이를 지적하는 대신 말을 돌렸다.

“그때는 카림에게 어울리는, 좋은 사람이 나타날 거야. 나 같은 건 생각도 나지 않게 될걸.”

“그럴까요?”

“그럼.”

“나자예프 아저씨 고백도 이렇게 거절했어요? 그러면 저 반응이 설명이 안 되는데.”

“응?”

사비나가 되묻자, 카림이 방긋 웃었다. 아. 그제야 카림의 의도를 알아차린 사비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카림. 일부러 그런 거니?”

“하지만 궁금했단 말이에요. 대체 무슨 말로 거절당했기에 저렇게 세상이 다 떠나가게 우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울면서도 광장을 누비며 돌아다니고, 때 되면 교회로 달려와 배불리 식사를 하고 기어들어 가서 잠을 잘 수 있는지.

“그거야말로 바르셀다에게 물어보지 그랬니?”

“바르셀다 형은 말하는 게 재미없어요.”

상당히 신랄한 평이었다. 사비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바르셀다는 이제까지 카림을 걱정해서 매 끼니 식사를 가져다주고, 그간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을 텐데.

“카림. 어른을 놀리면 못써.”

“이게 내가 슬픔을 잊는 방법인걸요.”

당돌하게 대답한 카림이 발딱 일어났다. 계속 방 안에만 앉아 있어서 움직이기 힘든 것 아닐까 걱정한 게 무색하게도, 아이의 다리는 튼튼했다.

“누나. 주방에 빵이 더 있을까요?”

카림이 손바닥으로 배를 문질렀다. 양이 부족하다는 걸까. 사비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고는, 함께 일어나 카림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스튜를 먹는 편이 더 든든할 거야. 함께 갈까?”

“좋아요.”

연약하다고만 생각했던 아이의 손에 힘이 실렸다. 카림이 호수를 빙빙 돌면서 공중제비를 넘고, 언덕을 오르내리면서도 호흡 한번 흐트러진 적이 없었던 건 저주로 인한 회복력 덕분이 아니라, 카림 자체가 워낙 기운이 넘치는 덕분인 듯했다.

‘카림은 건강하구나.’

몸도 마음도, 어린아이의 회복 속도는 어른보다 훨씬 빠르다.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고 하여 좌절할 필요는 없다. 상처가 남는다고 하여 자신이 망가지는 것은 아니다.

달리다 넘어져 무릎에 피가 났다고 해서, 그 흉터가 사라지지 않았다고 해서, 일생 뛰지 않으려 든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무릎의 상처는 뛰고자 하는 의지를 막을 수 없다.

카림이 겪은 불행은 이 아이가 앞으로 겪을 미래의 행복을 결코 막을 수 없으리라.

“카림. 내일도 함께 식사할까?”

“모자라지 않겠어요?”

“안 모자라. 에르잔의 1인분은 아주 양이 많거든.”

문이 열고 밖으로 나오자 서늘한 저녁 바람이 두 사람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카림과 사비나는 서로 마주 보며 한번 웃고는, 에르잔이 있을 주방으로 향했다.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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