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페고라도 그랬어요. 누구를 원망하면 되느냐고.”
“…….”
“사실은 누군가를 원망한다고 낫는 상처도 아닌데.”
바르셀다가 쓰게 웃었다. 그가 웃자 사비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자리에서 가장 고통스러워했을 사람이 바르셀다였으므로.
알렉세이에게 이용당해 저주의 핵을 품고, 나자예프에게 가야 할 반동까지 한 몸에 받아 내느라 온몸에 털이 나고 팔다리가 기괴하게 자라 괴물 같은 몸이 된 채 15년간 고통스러워하며 살았음에도, 저주에서 풀려난 바르셀다는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았다. 나자예프의 목을 비틀지도 않았고, 에르잔이나 사비나에게 보복을 하지도 않았다.
“우리 형제들 천성인가 봐요. 뒤끝이 없는 거.”
“뒤끝이 없다고요?”
“나자예프 형도 그렇잖아요?”
나자예프는 사비나에게 단칼에 차인 이후로 광장을 떠돌며 슬퍼하다가 끼니때가 되면 냉큼 달려와 식사를 하고 다시 흐느끼며 떠나갔다. 말로는 실연의 상처가 가시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는데, 하는 행동을 보아하니 별로 상처받지도 않은 것 같다. 잘 먹고 잘 자고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며 ‘나 실연당했소’라고 동네방네 광고하는 나자예프의 모습은 지나치게 건강했으니까.
나자예프가 우는지 노래하는지 헷갈리는 소리를 지르며 광장을 돌아다니는 행동은 마을 사람들에게 일종의 시시한 볼거리처럼 여겨졌다.
“그런지도…….”
“그래서 말인데요, 사비나.”
“네?”
“오늘은 저 대신 카림에게 빵을 가져다주지 않겠어요?”
“내가요?”
“부탁할게요.”
바르셀다가 착잡한 듯이 웃었다. 카림의 기운을 북돋워 주기 위해 그동안 노력했지만, 며칠 동안의 고생 끝에 깨달은 사실은 자신으로서는 역부족이라는 것뿐이다. 바르셀다는 정이 많지만 말주변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나자예프처럼 정력적으로 나서서 사고를 쳐 구경거리를 제공하지도 않고, 카밀라처럼 말이 많아 우울해질 틈이 없도록 정신을 쏙 빼놓는 것도 하지 못한다.
“카림의 우울함을 거두려면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힘이 필요하거든요.”
“하지만 내가 가는 건 도리어 역효과 아닐까요?”
“그렇다고 우울해하는 카림에게 나자예프 형이나 카밀라를 보낼 수는 없잖아요.”
“……그야 그렇지만요.”
“당신이 오는 걸 싫어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뭔가, 계기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자극이 필요하다는 소리일까. 사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림에게 가는 것이 그 아이의 상처를 건드리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방에 틀어박혀 있도록 두는 것보다는, 차라리 상처를 건드려서 분노를 쏟아 내게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줄어들지 않는 통증이라면 차라리 비명이라도 힘껏 지르게 두는 쪽이 나을 것이다.
“알았어요. 갈게요.”
***
“방문객이 온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온 사비나를 보고 페고라가 냉랭하게 말했다. 그러나 말에 적의는 담겨 있지 않고, 심드렁한 얼굴로 벽에 기대앉아 고개만 까딱했을 뿐이다.
카림은 페고라가 덮고 있는 무릎담요의 한쪽을 베고 누워 있었다. 눈을 감고 있지만, 자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바르셀다가…… 바빠 보여서, 제가 대신 식사를 가지고 왔어요.”
“거짓말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냥 문 앞에 놓고 가도 되는 것을, 일부러 문을 열고 들어와 말을 거는 이유를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거든.”
“……미안해요.”
역시 예고도 없이 방문해서는 안 되는 거였을까. 사비나가 협탁에 빵이 든 바구니를 놓고 나가려 하자, 페고라가 그녀를 불렀다.
“왜 돌아가니?”
“당신이…….”
“내가 너에게 돌아가라는 소리를 했던가?”
그럼 뭐라는 건가. 사비나가 입을 다물고 가만히 바라보자, 페고라의 옆에 웅크리고 누워있던 카림이 부스스 일어났다.
“페고라. 그런 식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싫어해요.”
“싫어하라지. 내가 원해서 얻은 것도 아닌 겉모습 때문에 비난받을 바에야, 차라리 내 의지로 건넨 말 때문에 비난받는 게 낫단다.”
“말 때문에 호감을 사는 게 더 좋을 텐데…….”
“어린아이에게 호감을 구걸할 만큼 정에 굶주리지는 않아서.”
거기까지 말하고, 페고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담요를 탁탁 털었다. 그것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성큼 걸어오더니, 바구니를 들어 안을 보고는 빵 하나를 카림에게 던져 주었다.
“나는 식사를 하고 올게. 먹는 모습을 다른 사람한테 보이는 건 좋아하지 않아서.”
“페고라. 그럴 것 없어요. 내가 나갈 테니까…….”
“카림에게 할 말이 있어서 온 것 아니었니?”
페고라가 핵심을 찌르자 사비나는 말문이 막혔다.
고개를 돌려 카림을 보자, 카림은 듣지 못한 건지 관심이 없는 건지, 양손으로 빵을 쥐고 우적우적 먹고 있었다. 에르잔이 상당히 맛있게 구워 냈는데, 빵을 먹는 카림의 표정은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여기 있어도 괜찮아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니?”
“…….”
“허락 같은 거 구하지 말렴. 내가 허락할 일도 아니고, 네가 허락을 구해야 할 일도 아니니까.”
사비나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페고라의 의중을 한발 늦게 이해한 탓이다. 톡 쏘아붙이는 태도 때문에 눈치채기 힘들지만, 페고라는 말투가 공격적일 뿐 사비나를 혐오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죽음의 화신이 아니게 된 사비나에게는 아무런 적의가 없는 듯 보였다.
북쪽 탑의 지하에서 사비나를 걷어차며 저주의 근원을 물을 때 보였던 원망은, 정말로 ‘저주’ 그 자체만을 향한 것이었을까. 저주와 인간을 그렇게 딱딱 떼어 놓고 구분할 수 있다는 사실에 사비나는 조금 놀랐다.
“이야기 나누렴. 나는 식사하는 데 오래 걸리니까 부를 것 없단다.”
페고라는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문밖으로 나섰다. 무릎담요 아내로 긴 백발이 늘어졌다. 사비나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카림이 기침하는 소리를 듣고 얼른 문을 닫았다.
“괜찮니, 카림? 추워서 그래?”
카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빵을 다 먹어 치운 카림은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손가락으로 훑어 쪽쪽 빨고 있었다.
“카림. 양이 부족하면 더 가져다줄게.”
“또 오려고요?”
카림은 사비나를 쳐다보지 않은 채 물었다. 페고라와는 또 다른,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은 의문. 사비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카림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래. 또 올 거야. 네가 오지 말라고 하지 않는 한은.”
“…….”
“보기 싫으면 보기 싫다고 하면 돼. 그러면 오지 않을게. 하지만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나는 또 이곳에 찾아올 거야.”
바르셀다가 부탁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비나는 카림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그녀의 사과가 카림을 더욱 분노하거나 고통스럽게 할 것이 염려되어 망설였을 뿐.
“내가 말하는 대로 할 거예요?”
“네 의사를 존중하겠다는 거야.”
사비나는 카림의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아이와 눈높이를 완전히 맞출 수는 없었으나, 마주 보는 것은 가능했다.
“부딪칠지 피할지, 분노를 쏟아 낼지 회피할지를 네가 원하는 방법을 택해. 정답 같은 건 없어.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은 사람 저마다 다르니까.”
그래. 제각기 입은 상처가 다르듯, 제각기 낫는 방법도 다르다. 사비나는 알렉세이를 죽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줄디즈에게 복수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이제까지 자신이 겪어 왔던 비극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 고찰하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을 단죄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상처를 되새기려면 상처를 마주해야 한다. 떠올리기 싫은 끔찍한 기억을 떠올려야 한다. 이미 상처로 고통을 받아 왔는데, 일부러 고통받는 일을 자처할 만큼 사비나는 강하지 못했다.
그래서 행복해지는 길을 택했다. 상처를 돌아보기보다, 누군가를 원망하기보다, 에르잔의 곁에서 치유받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카림은 어떨까.
마을 북쪽의 여자들은 알렉세이를 죽이고 싶어 했다. 그녀들의 욕망은 처음에는 안식을 향했으나 그다음에는 복수를 향했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깨진 거울을 그의 몸에 찔러 넣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카림은 어느 쪽일까. 사비나는 아이의 잿빛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잿빛의 눈동자는 텅 비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반대로 속에 있는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문을 꼭 닫아 놓은 것 같기도 했다.
“카림. 나를 원망해도 돼.”
“…….”
“나는 네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어. 하지만…… 나 때문에 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어.”
부정하고 싶지만, 사비나에게는 그런 자격이 없었다.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
알렉세이가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 저주를 완성한 것은 사실. 그 저주로 사비나를 죽음의 화신으로 만든 것도 사실. 그녀로 인해 퍼져 나간 죽음의 주술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것도 사실이므로.
죽은 사람들이, 혹은 그들의 가족이나 친구가 사비나를 원망하는 것을 사비나는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미움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원하여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해서, 수많은 생명을 앗아 간 사실마저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네가 원망할 사람을 찾는다면, 그건 내가 되었으면 좋겠어.”
“……왜요?”
카림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의 눈은 여전히 흐리멍덩했으나 온전히 사비나를 향하고 있었다. 안개가 뿌옇게 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 너머에 존재하는 나무는 인지할 수 있는 것처럼, 카림은 사비나를 보고 있지 않으면서 동시에 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인지하고 있었다.
“나는 감당할 수 있으니까.”
살인자가 휘두른 칼에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칼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다. 그러나 사비나는 인간이었다. 알렉세이에게 도구처럼 이용당했다고 한들 그녀는 인간이었다. 그러니 칼이라면, 도구라면 대신 받아 줄 수 없는 원망도 받아 낼 수 있다.
“어디로 원망을 향해야 할지 모른다면, 나한테 향하면 돼. 모든 원망을 나한테 쏟아도 돼. 나는 그런 일에 익숙하거든.”
“적선이라도 하려는 거예요?”
“아니.”
사비나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편해지고 싶어.”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