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가져 본 적 없는 것을 욕심내느라 확실한 행복을 놓칠 만큼 어리석은 남자가 아닙니다, 저는.”
“에르잔…….”
“사비나. 나의 아가씨.”
나의 아가씨.
에르잔에게 이름처럼 불리던 단어였는데, 소유격이 붙는 순간 어쩐지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사비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양 귀가 뜨거워졌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이건 어떤 기분일까.
“내가 에르잔의 아가씨라면…… 그러면, 에르잔은 나의 기사인 거네요.”
“물론입니다.”
호위기사가 아니라, 황실 근위대의 기사가 아니라, 제국에서 부여한 지위나 명성이 아니라, 사비나가 인정한 그녀만의 기사인 거라고.
붉어진 뺨에 꽃과 같은 미소가 피었다. 검은 눈이 행복으로 물들었다. 두 사람의 눈동자에 서로의 모습이 비친 것을 확인한 순간, 또다시 달라붙듯이 몸이 겹쳐졌다. 이제는 정말로 거리낄 것이 없어진 두 연인이 넘쳐흐르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갈급하게 입을 맞추려는데, 바깥에서 카밀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비나, 있어? 아직 자는 거 아니지?”
“헉!”
“카밀라, 잠깐! 들어오지 마세요!”
사비나가 허둥지둥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가리는 사이, 에르잔은 얼른 창문의 커튼을 당긴 뒤 로브를 걸쳐 입고 밖으로 나왔다.
“카밀라. 이런 아침 일찍부터 찾아올 이유가 있나? 저주가 풀렸으니 마음 편히 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우리 집을 부숴 버렸는데 어디서 편히 쉬라는 거야?”
카밀라의 지적에 에르잔은 할 말이 없어졌다. 카이라트가 끌고 온 북쪽 여인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주의를 끌기 위해 일부러 세 채의 오두막이 있는 쪽으로 나무를 베어 쓰러뜨렸으니까.
“미안하다. 오두막을 고쳐 주겠다.”
“고쳐서 어떻게 될 상태가 아니던걸. 그리고 이제 그쪽에는 갈 일 없어. 나도 북쪽으로 갈 거거든.”
“북쪽으로?”
“난 사람들 많은 곳이 좋아.”
서쪽에는 원래도 카이라트와 카밀라 남매밖에는 살지 않았다. 정화되었다고는 하나 우물 안에는 시체가 가득했었고. 활달하고 사교적인 카밀라로서는 북쪽 여인들과 같이 지내는 편이 더 마음 편할 것이다.
“그렇군…… 그럼 북쪽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하러 온 건가?”
“아니, 난 네가 아니라 사비나한테 물어볼게 있어서 온 건데.”
“사비나 아가씨께?”
에르잔이 살짝 옆으로 비켜서자 사비나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카밀라는 자기보다 키도 큰 사비나가 에르잔 뒤에 어린아이처럼 숨어 있는 모습을 이상하게 여겨야 할지 귀엽게 여겨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카밀라. 나한테 물어볼 게 뭔가요?”
“카이라트가 없어졌거든. 혹시 어제저녁 이후에 카이라트를 본 적 있어?”
“카이라트가 없어졌다고요?”
오두막이 부서지는 바람에 머물 곳이 없어 카밀라는 교회에서 지내기로 했지만, 카이라트는 굳이 부서진 오두막을 돌무더기와 판자로 보수해 놓고 그곳에 있기를 고집했다. 어차피 이제는 별로 말을 섞고 싶은 사이도 아니고, 함께 교회에 있고 싶은 기분은 더욱 아니었기에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아무리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형제라도 카밀라는 천성이 누군가를 내버려 둘 수가 없는 성미였다. 이제는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플 텐데도 식량을 나눠 달라며 찾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새벽에 살짝 찾아가 보았는데, 카이라트가 집 안에 없는 것이 아닌가.
“교회로는 오지 않았거든. 다른 곳들은 다 집이 무너져서 거처를 옮길 일도 없는데, 이상하더라고.”
서쪽에 있던 세 채의 오두막은 에르잔에 의해 부서졌고, 남쪽 집들은 이미 폐가가 된 지 오래였다. 오딜의 오두막도 박살이 났으니 카이라트가 머물 만한 장소는 어디에도 없는데, 대체 어디로 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시체는요?”
“응?”
“그 사람 시체, 어디 있어요?”
알렉세이의 시신. 모든 저주를 받아 낸 몸체. 카이라트가 일생을 바친 연구가 집약된 결정체.
욕망의 거울에 비춰주었을 때, 카이라트는 살아남기를 소망했다. 생존 앞에서는 진리나 영원을 향한 지식욕도 무가치했다.
하지만 살아남은 지금은.
***
“역시 없어졌어.”
카밀라가 동쪽 첨탑 앞의 공터를 보고 혀를 찼다. 시신을 끌고 간 듯한 자국이 있었다. 도중에 끊겨서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알렉세이 시체까지 끌고 숨을 만한 장소는 없을 텐데.”
“혹시…… 산 아래로 내려간 걸까요? 이젠 이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있으니까.”
“그렇지는 않을 거야. 나도 혹시나 해서 남서쪽 길을 살펴봤는데, 최근에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더라고.”
남서쪽 길이라면 에르잔과 사비나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올 때 거쳐 온 길이다. 마차로 한참을 타고 온 데다가 숲을 또 한 번 건너느라 꽤 오래 걸었던 기억이 난다. 탈것이 없으면 산행에 익숙한 사람이라도 꽤 오래 돌아가야 할 터인데.
“그 길은 멀잖아요. 지름길로 간 게 아닐까요? 이곳에 사는 사람이라면 산을 타는 데는 익숙할 테니까.
“카이라트는 한 번도 마을 밖으로 나가 본 적 없어.”
“예전에는 산 아래 도시까지 종종 나갔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거야 오딜 아저씨나 바르셀다처럼 덩치 좋은 남자들이 길잡이 겸 짐꾼 겸해서 다녀온 거지. 산세도 험하고, 다니던 길이 아니면 맹수들이 나타나서 안전하지 않으니까. 카이라트는 허약해서 그런 일 해 본 적 없는걸.”
망나니인 나자예프는 몇 번 데려갔다가 방해만 되어 버려두고 갔지만, 원체 집안에 틀어박혀 연구만 하던 카이라트는 힘이 약한 데다가 걸음도 느려 애초에 데리고 나가지를 않았다. 이론에는 빠삭해도, 정작 마을 밖으로 나가 본 경험은 전혀 없다는 뜻이다.
“공범자가 있을 가능성은요? 카이라트 말고, 또 사라진 사람이 있나요?”
“딱히…….”
“없을 겁니다. 카이라트가 누군가를 신뢰하는 타입은 아니라서.”
카밀라의 말을 자르며 끼어든 것은 아페티트였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다가와 끌린 듯한 자국이 있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간밤에 찜찜한 기분이 들어서 나와 보았지요. 카이라트가 수레를 끌고 어딘가로 가고 있더군요.”
“어디로요?”
“모르겠습니다. 꼭 환각처럼 금방 사라져서, 순간 악마의 장난인가 했으니까요.”
아페티트가 씩 웃었다. 어딘가 만족스러워 보이는 듯한 미소였다. 마치 포식을 하고 난 짐승이 만족한 듯 배를 깔고 누워 있는 듯한, 여유로운 모습. 피 색깔에 가까운 머리카락이 섬뜩하다고 생각했는데 햇살 아래서 바라보니 그렇게 무섭지만도 않았다.
“어쩌면 정말 악마가 데려가 버렸는지도 모르지요.”
***
수색대를 보낼 상황이 아니었다. 오딜은 부상자였고, 바르셀다도 완전히 회복이 되지 않았다. 나자예프는 도움이 되지 않고, 아페티트를 혼자 보내기는 불안했다.
저주에서 겨우 벗어났을 뿐인 마을은 아직 다른 일에 눈을 돌릴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카이라트가 정말로 산 아래 도시로 내려갔는지 불확실할뿐더러, 알렉세이의 시체로 뭔가를 연구한다고 해서 당장 이 마을에 다시 해를 끼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에 카밀라는 이 일을 덮어두기로 했다.
본래 카이라트의 연구는 자신의 불로불사를 위한 것이었지, 타인을 조종하거나 누군가를 짓밟아 뭘 어떻게 하는 것은 아니니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탓도 있었다.
마을을 재건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아무래도 힘을 쓸 수 있는 장정들이 부상자인 데다, 에르잔을 제외하고는 다들 요리에 젬병인 까닭에 그가 식사 준비를 도맡았기 때문이다. 자연히 사람들은 교회에 모이게 되었고, 신에게 기도를 올리기 위해 지어진 건물은 상처받은 이들이 시름을 잊고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카림은 어쩌고 있어요?”
식량을 챙기러 온 바르셀다에게 사비나가 묻자, 청년이 조금 난감한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페고라와 함께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질 않아요. 빵을 주면 먹기는 하는데…….”
페고라는 백색증 때문에 햇빛 아래를 돌아다니기 힘들어해서, 카림은 방 밖으로 나오지를 않아서 세 사람분의 식사를 운반하는 것은 늘 바르셀다의 몫이었다.
사비나는 걱정이 되었다. 마을 북쪽에서 카림을 만났을 때도 아이는 그다지 우울해하지 않았다. 자신을 보살펴 주는 사람이 없는데도 혼자서 언덕을 달리고 나무를 오르며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르겠어요. 카림을 억지로라도 데리고 나오는 게 좋을지, 아니면 내버려 두는 게 좋을지…….”
“미안해요. 내가 여기에 있어서 카림이 못 나오나 봐요.”
“아니에요. 당신 탓이 아니니까!”
바르셀다는 서둘러 부정했다. 그는 늘 사비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을의 은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믿지 못하고 경계해서. 그다음에는 로스카옌과 올가 사이의 비밀을 노출한 것이 자신이라서.
“나쁜 건 알렉세이 형이지 당신이 아니에요. 카림도 그걸 모를 만큼 어리지는 않으니까.”
열 살 어린아이지만, 마을의 시간이 멈춘 지 15년이 지났으니 실제 나이는 스물다섯 살쯤 될까. 아이로 살아온 세월이 긴 데다 정상적인 교류를 하지 못한 지 오래되었으니 실제 스물다섯 청년만큼 사고하고 행동하지는 못할 테지만, 그렇다고 상처받은 경험을 떨치지 못할 만큼 나약하지도 않다.
“시간이 흐르면 결국은 무뎌져요. 지금은 그저…… 어디로 원망을 향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겠죠.”
마을을 초토화시킨 장본인인 알렉세이는 죽었다. 마을 하나를 희생해 만든 저주의 화신인 사비나는 그녀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비나는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했다. 그녀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 이들을 위해.
사실 아무런 관계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사비나가 로스카옌과 올가의 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마을의 저주가 모두 풀린 이후였으니 그녀의 희생이 위선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페고라도 그랬어요. 누구를 원망하면 되느냐고.”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