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85화 (185/189)

185화

“싫었어요?”

“아, 아닙니다!”

에르잔이 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곤란해하는 이유는 사비나의 행동이 불쾌해서가 절대로 아니었다.

평범하게 깨우면 반짝 눈을 뜨고 일어나 그녀에게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을 보일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깜짝 놀라게 하면 아무래도 허둥대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에르잔은 그것이 부끄러웠다.

“에르잔은 내 옆에서 일어나는 게 아직 익숙하지 않은가 봐요.”

사비나는 눈을 떠서 에르잔의 얼굴이 보이면, 그와 몸을 맞대고 있음을 자각하면 편안하고 행복한 기분이 드는데, 에르잔은 그렇지 않은 걸까.

그녀가 갑작스러운 행동으로 에르잔을 깨우면 그는 늘 당황하는 것 같다. 그 점이 조금 야속했다.

“나랑 같이 자는 거, 불편해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히려?”

“……사비나 아가씨께서 불편하시지 않을지 걱정이 됩니다. 침대가 그리 큰 것도 아닌데, 제가 몸집이 커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이리저리 시선을 방황하며 에르잔이 말끝을 흐렸다. 확실한 대답을 들려주지 않는 것은 아쉽지만 에르잔의 당황한 표정을 보는 것은 싫지 않았다. 사비나는 에르잔에게 기대어 나른한 콧소리를 냈다.

“에르잔. 나를 좋아하나요?”

뜬금없이 건넨 질문에 당황했는지 그가 낮게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사비나의 예상과는 달리, 에르잔은 곧바로 대답을 들려주었다.

“예, 아가씨. 저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말끝을 흐리던 방금 전과는 달리, 흔들림 없는 또렷한 목소리. 사비나는 고개를 들어 에르잔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올곧게 자신을 향하는 것이 보였다.

에르잔의 푸른 눈은 맑은 여름 하늘 같았다. 사비나는 그와 얼굴을 마주한 채로 당돌하게 물었다.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예?”

에르잔의 벙찐 표정을 보고 사비나가 키득거렸다. 얼마나 좋아하느냐니, 어린아이 때나 해 볼 법한 유치한 질문이지 않은가. 그러나 사비나는 물어보고 싶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질문을 건넸던 적이 없었기에.

누군가 자신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호의와 신뢰와 애정을 얻으니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이 기대해도 되는 애정의 최대치는 어느 정도일까 하고.

“에르잔. 대답은?”

“앗, 예. 저기…….”

에르잔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뭐라고 말은 해야겠는데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이. 말로 내뱉은 것도 아닌데 그의 표정에서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져, 사비나는 생긋 웃으며 에르잔의 뺨을 쓰다듬었다.

“에르잔. 대답하기 곤란해요?”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제가 말주변이 없어…….”

“그럼 좋아하는 만큼 키스해 주세요.”

새파란 눈이 동그랗게 떠지더니 입이 허 벌어졌다. 놀랐다기보다는 얼이 빠진 듯한 표정. 어쩌면 바보 같다고 생각할 법한 표정인데도 사비나는 에르잔의 그 표정이 무척 귀엽게 느껴졌다.

“키스 안 해줄 거예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다시 물어보자 파란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눈가가 붉은 것을 보면 불쾌해서 그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에르잔의 표정을 더 자세히 관찰하고자 사비나가 고개를 들이밀자, 커다란 손이 그녀의 뒷머리를 감쌌다.

“아침 식사는 거르셔야 할 겁니다.”

뜨거운 입술이 입술을 덮고, 커다란 혀가 입안을 꽉 채웠다. 갑작스럽게 입안을 침범하는 에르잔의 혀에 잠시 놀랐으나, 사비나는 곧 기분 좋은 듯한 콧소리를 내며 에르잔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역시 음식보다 에르잔의 혀를 맛보는 쪽이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

“응, 음…….”

타액이 섞이는 소리마저 경쾌하게 들리는 것은 아침이기 때문일까. 부스럭거리는 이불이 거추장스러워 몸을 들썩여 밀어내자, 에르잔의 손이 그것을 휙 집어 아래로 끌어 내렸다. 의복을 걸치지 않아 맨몸이었으나 살을 맞대고 있어 춥지는 않았다. 사비나가 몸을 바짝 붙여 오며 가슴을 비비자, 에르잔은 그녀의 뒷머리를 쓰다듬고는 각도를 바꾸어 다시 키스했다.

코로 숨을 쉬는데도 역시 입안을 커다란 혀가 가득 채우는 것은 조금 부담이 되었는지 사비나가 숨을 헐떡였다. 에르잔은 쪽 소리와 함께 입술을 떼고는 사비나의 눈가에 잔키스를 퍼부었다.

“제 마음이 아가씨께서 감당하기 힘드신가 봅니다.”

“그런 게, 후우. 아니거든요?”

역시 숨이 찼던 모양이다. 사비나의 눈가가 촉촉했다. 그녀는 작게 어깨를 들썩이며 가쁜 숨을 내쉬고는 에르잔의 턱에 쪽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호흡이 한결 편해진 것을 확인한 에르잔이 다시 키스하기 위해 고개를 기울이려는데, 사비나가 물었다.

“에르잔은 내가 아가씨라서 좋아요?”

“예?”

“나는 이제 아가씨가 아닌데, 계속 ‘사비나 아가씨’라고 부르니까…….”

알렉세이 콘바야젠 공작은 그녀의 친아버지가 아니다. 그러니 사비나는 귀족이 아니었다. 오히려 귀족의 피를 이어받은 것은 에르잔 쪽이 아닌가. 비록 그의 혈통을 증명할 문서나 인장 같은 것은 없지만, 에르잔의 정화 체질은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였다.

그러니까 원래는 귀족인 에르잔이 평민인 사비나를 주인 아가씨로 여겨 존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에르잔은 내가 귀족인 게……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귀족 흉내는 내는 게 좋은가요?”

알렉세이는 이 마을로 오기 직전, 사비나의 존재를 공표하고 그녀를 후계자로 삼겠노라고 말했다. 사비나 에이다나 콘바야젠 소공작. 죽어 버린 그가 남긴 이름을 바꿀 권한은 지금의 사비나에게 없었다. 사비나가 진짜 ‘사비나’인 채로는, 평생 자신의 신분을 되찾을 수 없는 것이다.

“사비나 아가씨.”

“그러니까 나는 아가씨가…….”

“저는 당신이 귀족이라서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에르잔의 손끝이 사비나의 뺨을 톡 건드렸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콧등에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에르잔은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귀족이 아니라도, 기사가 아니라도, 당신의 곁을 제 자리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저의 아가씨로 여기는 겁니다.”

“……에르잔은 자기 신분을 되찾고 싶지 않아요?”

“되찾는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는 한 번도 욕망한 적이 없거든요.”

귀족의 신분도, 명예도, 혈육도 모두. 에르잔에게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다. 가져본 적 없는 것이 사실은 잃어버린 거였다는 사실을 알아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것을 가졌을 때의 느낌을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으니까.

“제가 처음으로 욕망한 건 당신입니다.”

“하지만 내 호위기사가 된 건, 당신이 황실 근위대의 기사고 그 사람이 황제 폐하의 대리인이라서…….”

“사비나 아가씨. 어둠 속에서 작은 촛불을 들고 걸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방랑자의 손에 쥐어진 작은 촛불.

그러나 꺼질 듯 말듯 위태로운 촛불.

그녀는 바로 그 촛불 같은 존재였다.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단 하나의 불빛. 그러나 그것은 방랑자를 인도하는 빛이 아니라 방랑자가 돌봐 주지 않으면 금세 사라져 버릴 듯 위태로운 빛.

처음에는 분명 어둠을 밝히기 위한 수단이었을 터인데, 위태롭게 흔들리며 불이 꺼질락 말락 하는 모습을 보이는 순간부터 방랑자는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인다.

어둠을 밝혀 주변을 파악하고자 했던 당초의 목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로지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데만 집중하게 만드는 존재.

그래서 방랑자는 어둠을 밝혀 여행을 계속하는 대신, 불빛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그 자리에 멈춰 선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빛을 얻은 방랑자는 어느새 빛을 지키기 위해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고 말지요.”

불꽃이 사그라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보호하면서. 무자비한 바람이 이 애처로운 불빛을 꺼뜨리지 않도록.

“그럼 내가, 당신을 방해한 건가요?”

“아닙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있을 자리를 찾고 싶었다. 자신의 역할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사비나의 호위가 되었다. 그녀는 그가 지켜야 하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그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주인은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처럼 덧없는 존재였다. 그것이 에르잔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쥐었던 검은 어느새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고쳐 쥐고, 연약한 몸을 품에 안고,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숨소리와 심장의 고동에 신경을 기울이면서. 그녀를 단단히 받치고, 그 자리에 멈춰 서게 되었다.

자신의 자리를 찾는 여행, 자신의 역할을 찾는 여행.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의 불빛을, 이정표를, 서둘러 붙잡지 않으면 안개처럼 사라져 버릴 그녀를 끌어안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방랑하던 자에게 꺼질 듯 말듯 위태로운 촛불을 건네는 일은 오히려 걸음을 멈춰 세우고 여행을 중단하게 방해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얼마나 가야 하는지, 자신이 그곳에 도달할 수는 있는지 아무런 보장도 없이 어둠 속을 헤매는 것보다는, 이 미약한 불빛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일이 더욱 보람 있지 않겠는가.

머물 곳도, 도달할 곳도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바람이 되기보다는, 이곳에 멈춰 서서 소중한 것을 돌보는 삶을 살고 싶지 않겠는가.

“제가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알려 주셨습니다.”

빛이 없었다면 여전히 그는 정처 없이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자리에 어디에 있을지, 있기는 할지, 있다고 한들 자신이 그곳을 찾아갈 수 있을지 아무런 기약도 없는 채로.

하지만 촛불을 지키기 위해 멈춰 선 지금은 헤맬 필요가 없다. 망설일 필요도 불안해할 필요도 없다. 그저 눈앞의 것을 지키는 일에만 집중하면 된다.

“가져 본 적 없는 것을 욕심내느라 확실한 행복을 놓칠 만큼 어리석은 남자가 아닙니다, 저는.”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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