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84화 (184/189)

184화

동쪽 첨탑을 지나 마을 북쪽을 가로막은 숲으로 두 남자가 들어왔다. 이 길은 익숙하다. 페고라로부터 마지막 저주의 핵을 흡수한 사비나 일행을 이곳에서 사로잡았으니까. 아페티트는 공터를 지나, 카이라트가 세 사람을 가두었던 토굴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긴 북쪽 탑의 지하로 이어지는 토굴이지 않습니까?”

“이 토굴이 왜 생겼는지 아십니까, 카이라트?”

모른다. 마을 북쪽은 여자들의 구역이었다. 물론 이 토굴은 북쪽 숲에서 이어지니 여자들이 사는 구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으나, 보통은 접근할 일이 없는 장소였다. 카이라트도 북쪽 여인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존재를 알았으니까.

“원래는 저 너머에 우물이 있었으니, 수로를 연결하기 위해서 만들었거나…… 그랬겠지요.”

“이렇게 눈에 띄는 걸 만드는 이유는,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서랍니다.”

“시선?”

“이것을 감추려고.”

아페티트가 뒤쪽 바위를 손으로 밀어내자,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밀릴 것 같지 않았던 바위가 가볍게 밀려나며 밑으로 구멍이 뻥 뚫렸다.

“토굴……? 이곳에도 토굴이 있었다니,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지금 사람들은 거의 모를 거라고 하더군요. 알렉세이의 모친이 만든 거니까.”

“알렉세이의 모친? 아…….”

영주를 찾아가 귀족의 아이를 임신하겠다면서 마을을 떠난 알렉세이의 모친. 그녀가 어떤 방법으로 이 산을 내려가 도시로 향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장정도 몇 명씩 조를 짜서 다녀야 하는 위험한 산길을 아무런 무기도 지니지 않은 여자가 다녀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건 카이라트가 너무 어렸을 적의 이야기라 당연히 과장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로 길이 있었을 거라고는.

“이 토굴이 어디까지 뚫려 있는 겁니까? 깊이가 꽤 되는 것 같은데.”

이 마을을 둘러싼 산은 꽤 높으니 토굴이 산 아래까지 닿는 것은 아닐 터였다. 카이라트가 대답을 보채듯이 시선을 보내자, 아페티트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비비 꼬면서 고개를 돌렸다.

“글쎄요. 저도 너무 오래전에 다녀와서 잘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만…… 적어도 마을 사람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흔적을 발견할 수 없는 거리까지는 이어질 겁니다.”

“그렇군요.”

토굴은 성인 여자 한 명이 충분히 지나갈 만한 크기였다. 체격이 좋은 아페티트나 알렉세이라면 조금 불편할지 모르나 카이라트에게는 이 정도 넓이면 충분했다. 알렉세이의 시신도 궤짝 안에 구겨 넣었기에 토굴을 통과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여기라면 들키지 않고 산 아래로 내려갈 수 있겠어. 그리고 도시에 가면, 주술도구를 만들 주술사도 찾을 수 있겠지.’

아페티트에게 주술도구 만드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가 헛방을 쳐서 비웃음을 사는 것보다야, 도시로 내려가 주술사를 찾는 편이 이득이다. 게다가 넝마가 된 연구 자료보다야, 도시로 내려가서 주술 관련 서적을 손에 넣는 쪽이 연구를 계속하기도 수월하리라. 카이라트는 미소 지었다.

“아페티트. 한 가지 더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만.”

“또 부탁입니까? 뭐죠?”

“저한테 이 길을 안내한 것…… 아니, 오늘 밤 저를 만났던 일 자체를 모두에게 비밀로 해주겠습니까?”

“당신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카밀라가 찾을 텐데요.”

“걱정해서 찾는 것은 아닐 테지요.”

그건 그렇겠지만, 이라고 말을 받으며 아페티트가 웃었다. 또 그 기묘한 웃음이다. 그러나 이미 도시로 내려갈 계획을 세운 카이라트는 아페티트의 기분 나쁜 미소 정도는 가볍게 흘려넘길 수 있었다.

“좋습니다. 비밀을 지키지요.”

“대가로 뭔가를 요구할 줄 알았는데.”

“이미 받았습니다.”

아페티트가 카이라트를 가리켰다. 설마 자신을 내쫓는 게 목적이었던 건가. 그렇다면 순순히 빠져나가는 길을 알려 주고, 자신과 마주친 사실을 비밀로 하겠다는 약속도 납득이 간다.

‘하긴. 주술로 조종했던 내가 같은 마을에 있으면 언제 보복을 당할까 신경 쓰였겠지.’

아페티트의 사고방식이라면 있을 법한 일이다. 그 자신도 생각이 많은 편은 아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튼 신세 졌습니다. 다음에 만나면 갚도록 하죠.”

“다음은 없습니다.”

아주 만나고 싶지 않다는 뜻일까. 그건 카이라트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럼 안녕히.”

아페티트에게 무성의하게 인사를 건네고, 카이라트는 궤짝을 끌며 토굴 속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밤, 깊은 굴속은 카이라트와 궤짝의 흔적을 금방 감춰 주었다.

아페티트는 토굴 안에서 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바위를 끌어와 구멍을 감추었다. 바위 속은 비어 있어 가벼웠다.

“알렉세이가 한 말이 정말이었군.”

감정을 다스리면, 행동을 조종하는 것은 쉽다고 했던가.

아페티트는 눈속임용으로 뚫어 놓은 넓은 토굴 쪽으로 몸을 돌렸다.

“15년 전에는 우물이 막혀 있었지만 말이야…… 지금은 어떨까.”

저주의 화신이 아니게 된 지금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지만, 마을의 우물을 가득 채우는 지하수가 토굴을 완전히 메우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는 것 정도는 아페티트도 알 수 있었다.

“네크로멘서가 되지 않아도, 주술을 사용하지 않아도, 욕망에 미친 인간을 조종하는 건 시시할 정도로 간단한걸.”

아페티트는 팔짱을 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게 빛나는 달이 꼭 하늘에 난 구멍에서 쏟아지는 빛 같았다.

33. 네가 있는 세상

저주가 거두어졌을 뿐 밀집해 있던 나무들의 키가 작아진 것도 아닐 터인데 이상하게 날이 밝았다. 기울어진 창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셔 사비나는 눈을 감은 채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체취와 온기가 느껴졌다. 눈을 뜨니 넓은 가슴이 보여, 사비나는 안도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일어나서 에르잔을 찾지 않아도 되겠네.’

돌방에서는 늘 혼자 잠들고 일어났는데, 지금은 에르잔이 곁에 있다. 15년간 겪어 온 세월에 비하면 에르잔과 함께 잠들고 일어나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사비나에게는 벌써 에르잔이 없는 아침이 낯설었다.

가만히 눈을 굴려 위를 보자 새근새근 자고 있는 남자의 평온한 얼굴이 보였다. 다부진 턱이나 높은 콧대가 인상적이라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긴 속눈썹이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가볍게 흔들렸다. 감은 눈을 뜨면 또 예쁜 파란 눈동자가 보일 것이다. 사비나는 에르잔을 깨우는 대신, 그가 눈을 뜨는 모습을 상상하며 자는 얼굴을 감상했다.

매끄러운 뺨에 두툼한 귓불. 목에서부터 어깨까지 이어지는 선이 굵직한데도 피부는 윤기가 흘렀다. 겉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성인 남자인데, 피부가 고운 거나 가끔 보이는 순진한 표정을 보면 역시 어리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자는 얼굴도 그렇고.

‘내 피부에는 금방 자국이 남는데…… 에르잔도 그럴까?’

사비나는 제 가슴 위에 남은 붉은 흔적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에르잔의 가슴팍을 보았다. 그녀의 몸에는 무슨 꽃물을 들인 것처럼 울긋불긋한 흔적을 남겨 놓고, 에르잔의 살결은 얼룩진 곳 하나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묘하게 심통이 난 사비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에르잔의 가슴팍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전에는 소리 내서 입을 맞추는 바람에 에르잔을 깨웠는데. 이번엔 조심해야지.’

과연 그를 깨우지 않고 가슴에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묘하게 호기심과 의욕이 발동한 사비나는 조심조심 몸을 움직여 에르잔과 밀착한 뒤, 그의 가슴팍에 혀를 가져다 댔다.

‘와. 매끄러워…….’

근육이 탄탄하게 자리한 가슴이라 딱딱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에르잔의 가슴은 탄력이 있었다. 꽉 압축해 놓은 고무공 위로 매끄러운 비단 천을 두른 쪽에 가까울까. 혀로 눌러도 움직일 만큼 표면은 말랑말랑한데, 꾹 찔러 보면 어느 지점 이후로는 전혀 들어가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밀어낼 만큼 탱탱했다. 말랑한 건지 탱탱한 건지 부드러운 건지 단단한 건지 한 가지로 콕 집어 말할 수 없다고 할까.

에르잔의 피부를 핥는 것이 재미있었는지, 사비나는 그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해서 혀를 움직였다. 그와 키스할 때와는 조금 다른 맛이 느껴졌다. 이것이 에르잔의 피부일까.

‘그런데 자국이 남지 않네. 더 세게 빨아들여야 하나?’

에르잔이 그랬던 것처럼 입술로 감싸 세게 빨아들이거나, 이로 깨물었다간 그를 깨울 것 같다. 사비나는 에르잔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혀로 입가를 핥았다.

에르잔을 꼭 깨우지 말아야 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불쑥 솟았다. 함께 잠들 때는 사비나가 먼저 눈을 뜨고는 했지만, 에르잔은 원래 더 일찍 일어나 주변을 정리하고 청소에 아침 준비까지 완벽하게 마치고는 했다. 날이 밝으니 기상 시간치고 이르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에르잔은 이미 사비나를 원한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의 잠을 깨운다고 미움받을 것 같지는 않았다.

“에르잔, 일어나요.”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그를 불렀다. 에르잔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차피 들리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 속삭인 말이었으나 어쨌든 사비나는 분명히 깨우긴 깨웠다.

말로 깨워도 일어나지 않으니, 행동으로 그를 깨울 정당한 명분을 마련한 사비나는 입을 벌려 에르잔의 가슴팍을 꽉 깨물었다.

“앗!”

외마디 비명과 함께 에르잔의 눈이 번쩍 떠졌다.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는 에르잔의 허리를 끌어안고, 깨물었던 부위를 입술로 감싸 ? 빨아들이자 키스할 때와는 다른, 뭔가 빨아먹는 듯한 소리가 났다.

“아, 아가씨! 잠깐…….”

“에르잔도 자국이 생기네요. 신기해라.”

자던 중에 봉변을 당한 에르잔과는 달리, 사비나는 에르잔의 가슴에 남은 붉은 자국이 신기한지 눈을 빛냈다. 에르잔의 몸에 사비나의 흔적이 남았다. 그것이 어쩐지 기뻤다.

“사비나 아가씨. 미리 말씀을 하셨으면…….”

“싫었어요?”

“아, 아닙니다!”

에르잔이 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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