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83화 (183/189)

183화

삐죽삐죽. 유리거울의 조각과도 같은 것이 온몸을 빼곡하게 둘러싼 알렉세이의 시체가 보였다. 카이라트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알렉세이의 시신을 들여다보았다. 달빛이 제법 밝았으나 거울 조각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기에 얼굴을 파악하는 것은 힘들었다. 카이라트는 조금 더 고개를 숙여 냄새를 맡았다.

‘분명 숨은 끊어졌는데…….’

죽은 지 이틀이 지났음에도, 시신에서 썩은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검은 피는 이미 전부 증발했으나 조각을 밀어 넣으면 부드럽게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피부는 아직 말랑했다.

카이라트는 조금 고민하다가 알렉세이의 손등에 박힌 조각을 빼냈다. 커다란 손등에 깊게 남아 있던 상흔이 마치 피부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줄어들더니 이내 깨끗하게 사라졌다.

‘불로불사의 몸…… 이거다. 내 연구는 역시 틀리지 않았어.’

그토록 거대한 저주를 집어삼키고, 욕망의 거울에 의해 온몸이 난도질을 당했음에도 알렉세이는 죽지 않았다. 정확히는, 알렉세이는 죽었으나 그의 육체는 죽지 않았다. 숨을 쉬지 않고 피가 돌지 않는 것은 불사의 저주를 유지하는 몸에 굳이 산소와 혈액 공급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카이라트는 바닥에 떨어진 은색의 조각과, 여전히 알렉세이의 몸에 박혀 있는 거울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욕망의 거울을 찔러 넣으면서 마을 사람들이 절규하듯 외쳤던 것이 기억난다.

「알렉세이, 죽어!」

네 개의 핵을 통해 완성된 불로불사의 저주. 비록 반동까지 한 번에 집어삼키느라 몸이 한 번 부서졌다가 재조립되는 고통을 겪었겠지만 알렉세이는 불사의 몸을 얻었을 터였다.

고통으로 실신할지언정 죽지는 않는 불사의 몸. 그러나 그의 몸에 꽂힌 거울에는 알렉세이의 죽음을 바라는 수많은 이들의 욕망이 깃들어 있었다.

몸은 죽지 않는데 욕망은 알렉세이의 죽음을 원하니, 불사의 몸은 그의 영혼을 몸 밖으로 밀어냄으로써 안정을 꾀한 것이리라.

그 증거로 카이라트가 뽑아낸 거울은 아직 은색의 빛을 띠고 있음에도, 알렉세이의 몸에 남아 있던 상처는 아물었다.

즉, 이 몸은 더 이상 ‘알렉세이’가 아니라는 것. 몸 주인의 숨이 끊어진 이상 이 불로불사의 육체는 발견자인 카이라트의 차지다.

‘이 몸에 주술도구를 심어 제물로 삼으면 나는 늙지도 죽지도 않고, 어떤 위험에도 당하지 않아.’

카이라트는 가슴이 뛰었다. 그가 일생을 바쳐 연구하던 불로불사의 결과물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의 손에 떨어졌다.

독을 마셔도 죽지 않고, 칼에 찔려도 죽지 않으며, 음식을 먹지 않아도 잠을 자지 않아도 상관없다. 무한한 생명력을 지니고 영원한 삶을 살게 된다면 자신은 얼마나 더 것을 연구할 수 있을까. 세상의 비밀을 파헤칠 수 있을까.

‘주술도구…… 주술도구가 필요한데.’

사비나는 알렉세이에게 저주를 모두 넘겨주면서 평범한 인간이 되어 버렸고, 주술에 해박한 로스카옌은 죽어 버렸다. 나자예프나 바르셀다는 알렉세이의 실험체였을 뿐 주술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뭘 하고 있습니까? 카이라트.”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놀란 카이라트가 몸을 굳혔다가, 서서히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새하얀 달빛 아래 드러난 붉은 머리카락에 황금빛 눈. 뱀처럼 웃고 있는 아페티트는 마치 악마처럼 보였다.

“알렉세이의 시체로 또 뭔가 연구하려는 겁니까?”

“왜요, 관심이 있습니까? 아페티트.”

순간 압도되기는 했으나 카이라트는 태연한 척 몸에 힘을 빼고 대답했다. 아페티트는 벌써 한참 전에 저주의 힘을 잃어버리지 않았던가. 더는 그에게 카이라트를 조종할 힘은 없을 것이다. 아페티트가 자신을 위협할 수 없으리라고 판단한 카이라트는 몸을 바르게 하고 허리에 손을 짚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시체를 움직이는 일에 관심이 있었지요.”

“그냥 움직이는 게 아니라 조종한다고 해 주셨으면 하는군요. 어느 쪽이든 알렉세이의 시체로 그런 짓을 하고픈 생각은 없지만.”

아페티트의 웃음이 묘하게 신경에 거슬려, 카이라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한때마다 카이라트를 조종했다는 사실로 꼭 두 사람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한 듯 구는 아페티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주술이 아니라도 체격으로나 체력으로나 카이라트는 아페티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카이라트는 가면 같은 미소를 띠며 뽑아낸 거울 조각을 신발로 밟아 가렸다.

“알렉세이의 시체에 관심이 없다면 다행이군요. 저는 알렉세이의 몸을 연구 자료로 쓸 생각이었거든요.”

“저한테 굳이 그런 변명을 하는 의도는?”

변명. 상당히 거슬리는 단어 선택이었다. 일생 저주를 연구했던 자신이 문맹인 아페티트에게 조종당한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인데, 알렉세이의 시체를 처리하는 일에서까지 아페티트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알렉세이의 시신에는 아무도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하니, 어떤 이유든 붙여 카이라트가 처리해 준다면 마을 사람들로서는 다행이 아닌가. 카이라트는 그를 상대하지 않기로 하고, 준비해 온 장비를 꺼내 알렉세이의 시신을 밧줄로 묶었다.

“뭘 하는 겁니까? 카이라트.”

“온몸에 거울 조각이 꽂혀 있으니 맨손으로는 운반할 수 없지 않습니까. 묶어서 끌고 갈 것을 가져왔지요.”

“그게 진짜 거울 조각은 아닐 텐데요.”

은빛 거울은 욕망의 주술. 알렉세이를 향한 살의만을 담은 그것을 다른 사람이 만진다고 베이거나 찔릴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온몸에 날카로운 조각을 꽂고 있는 남자의 시신을 직접 운반할 만큼 카이라트는 담대하지 못했다.

그는 아페티트의 말을 무시하고 밧줄을 매듭지은 후, 시신을 질질 끌어당겨 바퀴가 달린 궤짝에 밀어 넣었다. 아마도 굴려서 가져갈 심산인 듯했다.

“카이라트. 알렉세이의 시신을 어디로 가져갈 겁니까?”

“연구 자료로 쓰겠다고…….”

“오두막이 박살 나서 당신 몸 하나 누이기도 빠듯해 보이던데, 시신을 감추긴 어렵지 않겠습니까?”

아페티트가 상관할 바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카이라트는 입을 다물었다. 아까부터 아페티트의 웃음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던 탓이다.

달빛을 가로막는 것은 없었으나 산중의 밤은 어두워 상대의 표정을 완전히 파악하는 건 어려웠다. 카이라트는 눈을 가늘게 하고 아페티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확실히 묘했다. 아페티트의 미소는 카이라트를 비웃는 것 같기도 했지만, 어떤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적의와는 다른, 호기심이 깃든 표정.

그러고 보니 알렉세이의 시신 앞에서 카이라트가 장비를 챙기고 있는 것을 보고도 태연하게 말을 걸면서 다가온 데다가, 연구 자료로 쓰겠다는데 놀라지도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아페티트.”

“할 말이 있는 건 제가 아니라 당신일 텐데요.”

“뭐라고요?”

“저는 그다지 생각이 많은 편이 아니라서.”

아페티트의 커다란 입이 딱 다물리더니, 양 끝이 갈고리처럼 올라갔다. 저 뱀 같은 웃는 얼굴이 기분 나쁘다며 마을 사람들은 아페티트를 피했다. 그가 시체를 다루는 네크로멘서가 되길 희망했던 건, 살아 있는 사람과는 멀쩡하게 교류할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카이라트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아페티트. 당신이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흐음. 제가?”

아페티트는 능청스럽게 말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다 알고 있으면서 여유를 부리는 것처럼 보이는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카이라트는 애써 불쾌함을 지우려 노력했다.

자신이 한때 아페티트의 주술에 조종당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건 알렉세이가 배후에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처럼 불사와 영원의 진리를 탐구하겠다는 목적도 없이, 그저 동물 사체나 가지고 장난치던 멍청한 사내가 아닌가. 알렉세이와 교류하면서 특유의 속내를 보이지 않는 태도를 익힌 듯했지만 그래 봤자 겉모습뿐이다.

‘알렉세이도 이용했는데, 내가 못할 것 없지.’

카이라트는 작게 큼, 목을 가다듬고는 머리를 굴렸다.

주술도구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 달라는 주문은 너무 뻔했다. 자신의 패를 전부 보일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아페티트는 저주의 화신으로서 카이라트를 조종했던 거였으니, 주술도구를 제작하는 방법은 모를 가능성도 있다.

카이라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알렉세이의 시신이 담긴 궤짝을 가리켰다.

“알다시피 제집과 연구실은 폐허가 돼서 연구를 할 만한 장소가 없습니다. 게다가 알렉세이의 시신으로 연구를 하려는 걸 카밀라가 알기라도 했다가는 또 시끄러워질 테니까요.”

“흐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마을을 빠져나가는 방법, 아페티트 당신이라면 알고 있겠지요?”

“이런.”

마을을 빠져나가리라고까지는 예상 못 했는지, 아페티트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짓고는 헛웃음을 삼켰다. 뱀처럼 여유롭던 미소가 무너진 것만으로 카이라트의 속이 조금 풀렸다. 카이라트는 심리전에 딱히 재주가 없었으나 아페티트를 구슬리는 데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지는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그 예측대로, 아페티트는 순순히 뒤로 물러나 카이라트에게 손짓했다.

“길을 알려 드리는 거야 어렵지 않지요. 당신이 할 수 있는가는 별개지만.”

“길이라고요?”

“산 아래 도시로 내려가는 길을 물어본 거 아니었습니까?”

“길이 있습니까?”

19년 전 알렉세이가 사라졌을 때는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산 아래 도시로 물건을 팔러 나가는 장정들이 숲 주변을 뒤지며 찾아다녔으나 알렉세이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알렉세이의 모친이 그랬던 것처럼, 알렉세이도 신출귀몰한 방법으로 이 산을 내려갔으리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길이 있을 정도면 마을 사람들이 몰랐을 리가 없는데?’

마을 주위를 검은 사철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어, 밖에서는 이 마을의 존재조차 알 수 없지만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 빽빽한 숲 따윈 그저 장애물이 조금 많은 앞마당에 불과했다. 사람이 다닐 정도로 다듬어진 길이 있다면 알아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알려 달라면서요? 안 따라올 겁니까?”

“……갑니다.”

궤짝이 꽤 무거웠으나 아페티트는 시신 운반까지 도와주지는 않았다. 카이라트도 거기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으므로, 남은 밧줄을 궤짝에 묶어 끌면서 아페티트를 따라갔다.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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