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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속의 불-181화 (외전) (181/189)

181화

“우리는 하나인 거예요.”

사비나가 고개를 숙여 에르잔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허리를 안고 있던 남자의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으나 괴롭지는 않았다. 에르잔의 팔이 자신을 강하게 안아 주는 것이 좋았다. 놓치지 않으려 단단하게 붙들어 주는 것이 좋았다.

“에르잔. 나를 놓으면 안 돼요.”

“놓지 않습니다.”

어쩌면 칭얼거림에 가까울지도 모르는 부탁을 하는데도 에르잔은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성실하게 대답했다. 사비나는 에르잔의 뺨을 더듬다가, 형태 좋은 귀를 지나 짧은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나는 에르잔을 만지는 걸 좋아해요.”

“아가씨?”

“에르잔이 나를 만지는 것도 좋아하고.”

“사비나 아가씨, 우선 식사를…….”

검은 눈동자 너머로 빛나는 욕망을 눈치챈 에르잔이 당혹스러운 듯이 말끝을 흐렸다.

사비나가 솔직하게 원하는 바를 요구하는 건 기쁜 일이고, 그 역시 그녀를 욕망하지만, 너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에르잔은 테이블 위의 요리를 흘끔 보았다.

“에르잔은 나보다 음식이 더 신경 쓰여요?”

“아닙니다. 하지만 요리는 따뜻할 때 드셔야 더 맛이 있기에…….”

“에르잔이 더 맛있는걸.”

“예?”

사비나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에르잔의 이마와 눈가에 쪽쪽 입을 맞췄다. 짧고 굵은 금발이 손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감촉이 신기하고 또 재미있었다. 에르잔은 키도 크고 체구도 크지만, 이렇게 그의 팔에 안겨 높은 위치에서 바라볼 때는 그 듬직함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다.

“배 속이 아니라, 다른 곳이 허기가 져요.”

머리가 아플 정도로 우느라 지쳤는데, 광장을 지나 이곳까지 뛰어오느라 몸의 근육은 또 잔뜩 흥분해 있었다. 사비나에게는 휴식과 안정이 필요했다. 물론 그녀에게 있어 휴식과 안정은 홀로 누워서 피로를 풀거나 수면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었다.

“에르잔. 응?”

촉촉한 혀가 가볍게 콧등을 핥고 지나가자, 어딘가 난감한 기색이 있던 남자의 표정이 단숨에 풀어졌다. 에르잔은 가볍게 후, 한숨을 내쉬더니 사비나를 한 팔로 고쳐 안았다.

“다음에는 식어도 맛있는 요리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다운 대답을 하면서, 에르잔은 성큼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음식 냄새를 빼느라 열어둔 창문을 닫을 새도 없이 침대 위로 두 사람의 몸이 쓰러졌다. 새로 짚을 넣은 건지 침대는 푹신했고 이불에서는 햇볕에 말린 듯 포근한 냄새가 났다. 내내 사람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을 텐데 침구는 언제 정리하고 빨래는 언제 한 걸까.

사비나는 꼭 칭찬이라도 하듯 에르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신발을 벗기던 에르잔이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푸른 눈동자에 어른거리는 욕망이 에르잔의 것인지, 그의 눈에 비치는 사비나의 것인지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했다. 눈을 감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이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졌다. 뜨거운 호흡. 옷 너머로도 확연히 느껴지는 거센 심장의 고동을 들으며 사비나는 팔을 뻗었다. 에르잔의 단단한 등이 만져졌다.

‘에르잔은 정말 크구나…….’

꼭 고목나무에 매달리는 기분이라고 할까. 침대에 눕기보다 에르잔에게 매달리는 쪽이 더 편안할 것 같았다.

사비나는 에르잔의 목 뒤로 팔을 두른 채 작은 혀를 바쁘게 움직여 그의 입술을 핥았다. 촉촉한 소리가 벌어진 입술 사이로 물안개처럼 퍼져나갔다.

“에르잔, 좋아…….”

“사비나 아가씨,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조금도 떨어지기 싫다는 듯이 달라붙어 오며 몸을 비비는 사비나의 행동이 곤란했는지, 에르잔이 떨리는 손으로 사비나를 침대 위에 눕히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시선은 사비나에게 계속 둔 채로, 에르잔은 옷을 한 번에 벗어 냈다.

커다란 손이 몸 위로 한번 슥 지나간 것만으로 탄탄한 남자의 상체가 드러나는 모습은 꼭 마법 같았다. 사비나는 홀린 듯한 표정으로 에르잔의 몸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웠다.

사람의 몸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아니, 에르잔이기에 특별하게 느껴지는 걸까.

고운 찰흙을 꽉 눌러 빚은 것처럼 치밀하면서도 윤기가 흐르는 피부는 사비나의 것과는 달리 생기가 넘쳤다. 문득 그 피부를 핥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사비나는 혀로 입가를 핥았다.

그것이 꼭 입맛을 다시는 동작 같아, 에르잔은 사비나에게 먼저 저녁 식사를 먹이는 편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

“에르잔. 내 옷도…… 벗겨 줘요.”

사비나가 입고 있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보챘다. 헐렁한 로브라면 그냥 걷어 올려 벗을 수 있지만, 오늘 그녀가 입은 건 가슴 쪽의 여밈끈이 조여져 있어 손으로 걷어 올릴 수가 없었다. 에르잔은 사비나의 옷을 벗기며 다음에는 끈의 매듭을 묶고 푸는 방법도 가르쳐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커다란 손이 의외로 섬세하게 움직이며 옷감이 상하지 않도록 끈을 하나하나 풀어 가는 모습이 의외였는지 사비나가 작게 키득거렸다.

“에르잔 옷은 그냥 막 벗었으면서.”

“카밀라에게 빌려 온 옷이지 않습니까.”

“하긴. 그동안 많이 찢어 버렸죠…….”

에르잔이 찢은 건 아니지만, 침대에서 옷을 벗기며 그런 말을 들으니 괜히 양 귀가 뜨거워졌다. 에르잔은 짧게 헛기침을 하고는 사비나의 옷을 풀어 헤쳤다. 순간 드러난 새하얀 알몸을 보고 얼른 눈을 돌린 에르잔이 벗어 낸 옷을 개려는 듯 몸을 일으키자, 사비나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에르잔, 놓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아, 아닙니다! 놓으려는 것이 아니고, 옷이 구겨질까 봐, 개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어차피 빨아야 하는걸.”

어리광을 부리듯 그의 가슴에 뺨을 부비는 동작은 천진해 보였으나 눈빛에서는 숨길 수 없는 열망이 흘러넘쳤다. 그 눈빛을 마주하자 꼭 배 속에서 불길이 훅 일어난 것처럼 뜨거워졌다. 에르잔은 결국 쥐고 있던 옷을 침대 밑으로 밀어 떨어뜨리고, 제 허리를 안고 있던 사비나의 몸을 안아 뒤집었다.

“꺄아!”

삽시간에 위치가 뒤바뀌어, 사비나는 에르잔의 가슴에 등을 기댄 채 그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은 자세가 되었다. 귓가에 닿는 에르잔의 숨이 뜨거웠다.

“사비나 아가씨. 자꾸 이러시면 저도 자제하는 게 잘되지 않습니다.”

자제를 하기는 했던가? 문득 그런 의문이 떠올랐으나 사비나는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허리에 두르고 있는 남자의 팔을 가슴으로 끌어 올렸다. 남자의 손이 본능적으로 풍만한 가슴을 움켜쥐자 사비나가 기분 좋은 듯이 콧소리를 냈다.

“에르잔이 이렇게 감싸 주면, 따뜻해요.”

“사비나 아가씨…….”

처음에는 알몸을 보인 것만으로 그렇게 부끄러워했으면서, 언제부터 이렇게 적극적이 된 걸까.

에르잔은 사비나를 파악하는 일이 힘들었다. 그녀는 늘 그를 욕망하면서 동시에 밀어냈다. 닿기만 해도 화들짝 놀라 경계하는가 하면 그녀 스스로 다가와 품에 안기기도 하고, 살갗을 문지르면 간지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파르르 떨면서도 더 만져 달라는 듯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에르잔을 바라보기도 했다.

저주 때문에 타인에게 닿기를 극도로 꺼려 했던 사비나. 타인의 온기를 낯설어하지만, 반대로 무척 그리워하는 사비나. 그녀가 이런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에르잔과는 달리, 사비나에게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안겼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리라.

“제가 만져 드리는 것이 기분 좋으십니까?”

“응…… 좋아요.”

나른하게 한숨을 내쉬며 사비나가 에르잔에게 등을 기대 왔다. 에르잔은 떨리는 손으로 가냘픈 몸을 끌어안았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연약한 생명체가 자신에게 의지하는 느낌은 눈물이 나올 만큼 따뜻했다. 동시에 그런 존재에게 욕정을 느낀다는 사실이 배덕하게 느껴졌다.

“만지는 것만으로 괜찮으십니까?”

“응……?”

“저는 이렇게 하고 싶은데요.”

커다란 손이 양 가슴을 들어 올렸다가 가볍게 주무르자, 사비나의 어깨가 움찔 진동했다.

“앗, 에르잔!”

“이제 저는 호위기사가 아니니까요.”

상처 입은 그녀를 감싸 안고, 보호하고, 지키고 싶었다. 아주 소중하게 보듬어 주고 싶었다. 그저 그것만을 바라던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 마음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신에게 닿고 싶습니다.”

단지 지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감싸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알고 싶었다. 손으로 만져 감촉을 알고, 혀로 핥아 맛을 보고, 귓가에 숨을 불어넣어 소리를 듣고 싶었다. 팔딱팔딱 맥이 뛰는 심장이 제 손길이 거듭될 때마다 점점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고 싶었다. 창백하던 피부가 붉게 달아오르고, 살짝 체온이 낮은 그녀의 몸속이 놀랄 만큼 뜨겁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닿아도 될까요?”

“지금, 만지고 있으면서…….”

“더 가까이서 느끼고 싶습니다.”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꽉 억누르며 애원하자 긴장한 듯 굳어 있던 어깨에 힘이 빠졌다. 사비나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다리를 조금 더 벌렸다. 단단한 허벅지 위로 새가 날개를 펴듯 통통한 허벅지가 내려앉았다.

“에르잔. 나를 놓지 않는다고 했죠?”

“예.”

“그럼 허락 같은 거 구하지 마세요.”

내가 밀어내더라도, 나를 놓지 말고 꼭 안아 줘요.

콧노래를 흥얼거리듯 가벼운 울림이 귓가에 닿았다. 에르잔은 깊게 숨을 내쉬고는 손을 미끄러뜨렸다. 납작한 아랫배를 지나 내려간 손이 음부를 감싸 쥐자 사비나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가, 곧 의식적으로 힘을 빼며 에르잔에게 기대 왔다.

“에르잔은 손이 커서, 다 덮이네요…….”

“불편하면 말씀하십시오.”

“불편하지 않아요. 기분 좋아…….”

커다란 손바닥이 한 번에 음부를 문질러 주는 것이 기분 좋은지, 사비나가 작게 허리를 털며 더운 숨을 뱉었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 새가 날개를 터는 모습이 이와 같을까. 에르잔은 품 안의 그녀를 세게 움켜쥐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열기를 띠기 시작하는 피부에 입을 맞추었다.

달콤한 향기가 난다. 에르잔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어깨를 깨물 뻔한 것을 가까스로 멈추고 혀로 살갗을 쓸었다. 몇 번이나 이 살결을 가까이서 느껴왔음에도 닿는 것만으로 가슴이 떨려와, 에르잔은 애무를 하는 중간 중간 숨을 골라야 했다.

긴장하면 안 되는데 왜 이렇게 떨리는 걸까.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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