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80화 (완결) (180/189)

180화

한참을 울고 나니 머리가 아파 왔다. 사비나는 어느새 사위가 어두워진 것을 알아차렸다. 등잔의 불은 꺼진 지 오래였다.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 등잔을 덮어놓고 사비나는 몸을 일으켰다. 해가 떨어지고 아무도 불을 켜지 않은 미사실은 조용했다.

불이 꺼진 미사실. 기도를 올릴 사제는 아무도 없는 미사실. 산이라 쌀쌀하다고는 해도 계절은 아직 여름인데, 일렬로 늘어선 긴 의자 사이의 복도엔 겨울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깨에 걸칠 것을 가져올 걸 그랬다는 생각을 잠시 하면서, 사비나는 손으로 팔을 문질렀다. 메마른 온기가 잠시 옷깃에 머물다가 떠나 버렸다.

“언니.”

어디선가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비나는 흠칫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넓은 미사실에서는 어디서 소리가 나는지 알 수가 없어, 사비나는 의자의 가장자리를 짚고 가운데 복도로 걸어 나왔다. 중간쯤 걸었을 때, 일자로 뻗어있어야 할 의자의 실루엣 가장자리가 톡 튀어나온 것이 보였다.

“줄디즈…….”

어둠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새 빛에 적응했는지, 사비나는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야 의자에 앉아있는 아이가 줄디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니?”

“꿈에서 언니가 보이지 않았어요.”

“응?”

줄디즈가 앉아있는 자리까지 사비나가 다가오자, 아이는 냉큼 의자에서 내려와 그녀가 서 있는 반대편으로 기어나갔다.

“언니가 나를 해치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너를…….”

“언니를 그렇게 만든 게 나니까요.”

사비나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줄디즈의 말을 이해한 것은 아니다. 다만 생각보다 먼저 그녀의 몸이 반응했다. 본능이라는 것일까.

“언니를 그 자리에 밀어 넣은 게 나라고 밝히면, 당연히 복수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위험을 피하라고 꿈이 내게 회피할 방법을 보여 줄 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았어요.”

줄디즈는 꿈을 통해 미래를 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모든 미래를 다 엿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술사로서 미숙한 줄디즈는 자신에게 닥친 위험밖에 감지하지 못한다. 그녀의 목숨이 위태롭거나, 큰 슬픔을 겪을 일이 생기면 꿈은 그녀에게 예고한다. 그리고 피할 방법을 알려 준다.

꿈속에서, 줄디즈가 주술사라는 것을 알아차린 알렉세이는 그녀를 끌고 갔다. 줄디즈의 형제들을 죽여 만든 저주를 그녀의 몸에 꾸역꾸역 밀어넣고 삼키게 했다. 형제를 잡아먹는 끔찍한 꿈에서 깨어나, 줄디즈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미숙한 주술사. 겨우 세 살 반 어린아이였던 줄디즈에게 미래 자체를 새로이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험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물길을 틀었고, 결국 자신과 사랑하는 형제들의 목숨은 부지했다.

자신에게 다가올 끔찍한 미래는 결국 다른 사람에게 들러붙는다. 줄디즈는 사비나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알았다.

하지만 줄디즈는 망설이지 않았다. 제가 사는 것이 중했다. 제 형제를 살리는 것이 중했다.

누군가 하나가 희생해야 한다면, 적어도 그것이 자신과 자신의 형제만은 아니기를.

어린 줄디즈가 바랄 수 있는 것은 겨우 그것뿐이었다.

“무서웠어요. 언니가.”

“줄디즈…….”

“그런데, 그다음에는 이상했어요.”

자신의 죄를 마주하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줄디즈는 사비나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죄의 증거를 목도하는 일은 죽음보다도 더욱 끔찍한 일이었다. 그래서 줄디즈는 사비나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경고했지만, 사비나는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죽을 줄 알았어요. 못해도 나는 잘못될 줄 알았죠.”

풀린 것은 저주뿐, 주술사로서의 능력을 잃지는 않은 줄디즈는 마지막으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사비나에게 진실을 밝히고자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위험해지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사실을 알게 되면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복수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줄디즈가 무서워 피한 미래를 사비나가 대신 뒤집어썼다는 사실을 알면, 분명히 자신에게 복수할 거라고 생각했다. 사비나는 네나뷔스테처럼 키가 크지도 힘이 세지도 않지만 줄디즈는 아직도 어린아이였다. 성인 여자가 충분히 해코지할 수 있을 만큼 연약했다.

그러니 사비나가 줄디즈를 해치거나, 하다못해 폭력을 휘두르고 악을 쓰며 겁을 준다면 그것이 꿈에 보여야 하는데, 보이지 않았다.

사비나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줄디즈에게 보복을 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모를 잃고, 살던 마을로부터 벗어나, 저주를 삼키고 사람을 죽이는 삶을 살아야 했는데.

자신의 운명도 아닌, 타인이 회피한 운명을 대신 얻어맞는 바람에 비참하고 끔찍한 시간을 겪었는데.

어째서 줄디즈에게 복수를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왜 복수하지 않아요?”

“……나는 지금 알았는걸. 네가 이야기해서.”

“그럼 지금부터 나를 원망하고, 복수할 건가요?”

줄디즈의 질문에 사비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의 운명을 조율한 것이 줄디즈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사비나는 분노하지도 경악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복수 같은 거 안 해.”

“나를 용서하겠다는 거예요?”

“용서? 그런 거 아니야. 나는…….”

사비나의 운명이 원래 그렇게 정해져서가 아니라, 그저 줄디즈가 받을 미래를 대신 받았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미 알렉세이는 죽었고, 사비나는 콘바야젠 가문의 주술사가 아니게 되었으며, 그녀가 죽여 버린 이들을 되살릴 방법은 전무했다.

“너를 비난하거나 해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어차피 지나간 과거는 바뀌지 않으니까, 잊어버리겠다는 건가요?”

“……더 이상 원망하는 일에 내 감정을 쏟고 싶지 않다는 뜻이야.”

줄디즈에게 왜 그랬냐고 묻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녀가 사실을 밝혔을 때 사비나는 줄디즈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살고 싶어서. 자신이 사랑하는 형제를 살리고 싶어서 대신 타인의 인생을 불구덩이로 밀어 넣었다.

사비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이 용서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사비나는 알았을 뿐이다. 왜 자신이 고통받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은 역시 무의미한 일이었다고. 주술사가 되어, 사람을 죽이는 삶을 사는 것이 반드시 <사비나>여야 했던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고.

자신을 덮친 불행은 이유가 없는 것이었고, 또한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네가 튕겨낸 미래가 왜 나한테 왔는지 운명한테 물어볼 수는 없잖아.”

“…….”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항상 포기가 빠르거든. 나는.”

왜 자신이어야 했는지, 왜 자신이 이런 불행을 겪어야 했는지. 사비나는 알지 못한다. 그것은 줄디즈도 알지 못한다. 운명은 답하지 않는다. 그저 일어난 현상일 뿐이다. 이 마을을 덮친 비극처럼.

그녀가 잘못해서 이런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저 천재지변처럼 닥쳐온 불행이 그녀의 삶을 덮쳤을 뿐임을.

“죽어 가던 이들도, 살아남은 이들도, 묻고 싶었을 거야.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느냐고.”

사비나는 페고라의 말을 떠올렸다. 북쪽 탑 지하에서 자신을 가차 없이 걷어차며 내뱉었던 날카로운 말을. 이 고통과 불행의 원인이 사비나인 것 같다고.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동시에 누구의 탓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운명은, 불행은, 재앙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저 감내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패배하고, 포기하고, 체념하며 살아가는 것을 사비나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운명이 자신의 힘으로 거스를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도리어 위안이 되었다.

사비나가 어떤 죄를 지어서 그런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사비나가 어떤 죄를 지었다고 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불행해져도 되는 인생 같은 건 없어. 그건 그냥 비극이야.”

행복해질 수 없는 인생 같은 것도 없다. 불행은, 행복은, 운명은, 미래는, 어느 날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이니 막을 이유도 받을 명분을 마련할 이유도 없다.

사비나가 불행한 삶을 살아와야 했던 데에 이유가 없듯이.

사비나가 행복한 삶을 얻는 데에도 이유는 필요 없다.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 자격이 없어도 된다.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줄디즈. 나는 너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아. 네가 불행해지기를 바라지도 않아. 너는 그저 살고 싶어 했을 뿐인데, 그 이유로 네가 벌을 받고 미래가 비참해진다면 나 또한 그렇게 될 테니까.”

자의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이 반드시 벌을 받고 불행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비나에게는 이제까지 자신이 경험했던 불행의 원인이 누구로부터 기인했느냐를 따지는 것보다, 앞으로 자신이 반드시 불행해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더욱 중시하기로 했다.

행복에도, 불행에도 자격은 필요 없다.

욕망하는 대로 움직이면 된다. 운명은 어차피 찾아올 테니까.

“줄디즈. 너는 네가 바라는 삶을 살아. 나도 그럴 테니까.”

“……욕망을 따르라고, 말하는 거예요?”

“원하는 삶을 사는 데에만 전부를 쏟아도 부족한데, 낭비할 시간이 없잖아.”

사비나의 대답에 줄디즈가 아, 입을 벌리고 작게 탄식했다. 사비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가, 머리를 쓰다듬는 대신 어깨를 두드려 주고 자시를 벗어났다.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사비나의 걸음이 점차 빨라지더니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

광장은 넓었으나 장애물이 없어 달리는 것이 힘들지 않았다. 사비나는 무너진 울타리를 넘어, 잡초가 무성한 밭을 지나 불빛이 스며나오는 오두막으로 뛰어갔다.

로스카옌 사제가 안내해 준 두 사람의 거처. 에르잔과 사비나가 처음으로 서로를 알게 된 장소.

사비나는 창밖에서, 테이블에 음식을 차리고 있는 에르잔의 이름을 불렀다.

“에르잔!”

“사비나 아가씨?”

저녁 준비를 하는 데 여념이 없어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에르잔이 당황한 얼굴로 문을 열고 뛰어나왔다. 그는 사비나를 보자마자 허둥대며 상황을 변명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사비나 아가씨. 저, 아가씨의 말을 무시하려던 것이 아니고…… 힘드실 때는 우선 식사를 하고 편히 쉬시는 것이 제일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내가 안 먹으면, 버릴 거예요?”

“요리 말입니까?”

사비나는 대답하지 않고 에르잔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급작스러운 상황에서도 그녀를 놓치는 일이 없는 듬직한 팔이 사비나의 허리를 안았다. 맞닿은 가슴 너머에서 심장이 크게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꼭 종이 울리는 소리 같았다.

“버리지 마세요.”

“버리지 않습니다. 아가씨께서 드시지 않으면…… 제가 먹으면 되니까요.”

“저렇게 많은데?”

“1인분입니다.”

테이블 다리가 가엾게 느껴질 정도로 가득 차려놓은 요리의 어디가 1인분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덕분에 속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에르잔의 1인분은 너무 많아요.”

“저어…… 죄송합니다.”

“에르잔은, 정말 다 크네요.”

“몸집이 크다는 말은 어릴 때부터 줄곧 들어온지라…….”

“당신 자리라서, 넓었나 봐요.”

“예?”

되묻는 에르잔의 입술에 제 것을 겹치고, 사비나가 에르잔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당신에게서 빼앗은 자리, 당신에게 돌려주면 나는 갈 곳이 없어진다고 생각했어요. 원래 당신 것이었던 자리 밖에는 그저 불행뿐이니까.”

“아가씨…….”

“그래서 나는 비키고 싶지 않아. 불행해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에르잔을 원하는 마음도 버리고 싶지 않아서, 욕심만 너무 많은 것 같아서 괴로웠는데…….”

“사비나 아가씨. 저는 다른 건 바라지 않습니다.”

사비나는 에르잔의 얼굴을 더듬으면서, 그의 눈가와 콧등에 키스를 퍼부었다.

“당신이 들어와도 되는 자리였어.”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남자의 굵은 목울대를 쓸더니 옷자락 속으로 파고들었다. 순간 헉 하고 숨을 삼킨 에르잔이 몸을 딱딱하게 하자, 사비나는 에르잔과 자신의 가슴 사이에 손을 밀어 넣고 원을 그렸다. 꼭 두 사람의 심장이 맞닿은 부위를 표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당신 자리에, 내 자리에, 우리 같이 있어요.”

“사비나 아가씨…….”

“하나를 둘이서 나누면 너무 적은가? 에르잔은 몸이 크니까, 내가 남기는 걸 먹는 걸로는 부족하죠?”

“부족하지 않습니다.”

에르잔은 사비나를 안은 팔에 힘을 주어,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허리가 공중에 뜬 사비나는 갑작스러운 높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에르잔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매달릴 때만 하더라도 아직 사비나의 눈높이가 에르잔보다 낮았는데, 지금은 그녀가 그보다 훌쩍 높아진 위치에 있었다.

“아가씨를 떠받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에르잔…….”

“위에서 밧줄을 드리워도, 끌어당겨도, 손을 놓고 밑으로 떨어질 거라고 하셨지요? 가라앉지 않게 제가 떠받치고 있겠습니다.”

늪을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그 늪으로 함께 들어와서라도.

함께 빠져 죽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기 위해서.

이 절망의 늪을, 구원의 장소로 바꿀 것이다.

“당신의 아래에 있으면, 두 사람 몫이 아니라도 충분합니다.”

에르잔의 곁에 있으면 미래가 불안하고, 그를 떠나면 절망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같은 자리에 서면 된다.

그녀가 힘이 약해 물살에 휩쓸릴까 걱정한다면, 자신이 대신 바닥을 딛고 서서 그녀를 떠받치고 있으면 된다.

피할 수 없는 파도가 두 사람을 덮치면 함께 휘말리면 된다.

“제가 원하는 것은 하나뿐이니까요.”

“내가 원하는 것도 하나뿐이에요.”

서로가 양보할 수 없는 하나가 있다면, 행복의 자리에 딱 그 한명분의 공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둘이서 하나가 되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닌가.

“에르잔.”

“예, 아가씨.”

욕망의 불이 두 사람의 몸을 태우고, 절망의 늪이 증발하여 하늘에 닿을 때까지.

“우리는, 하나인 거예요.”

- 본편 완결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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