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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속의 불-179화 (179/189)

179화

32. 다음은 없다. 오직 지금만이 있을 뿐

문을 닫은 사비나는 주저앉아 벽에 등을 기댔다. 그녀가 기대는 순간 끼익, 하고 흔들리는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벽이 아니라 기물인 듯했다. 사비나는 도로 고개를 앞으로 숙이고 무릎을 껴안았다. 창고 안은 어두웠다.

그러나 비좁고 답답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곳은 깨끗하게 정돈된 아담한 공간이었다.

‘여긴, 뭘 하는 곳이지……?’

처음 들어와 보는 곳인데 어쩐지 익숙한 안도감이 느껴져, 사비나는 손을 내밀어 주변을 더듬었다. 먼지 대신 종이 냄새가 가득했다. 낡은 책장의 감촉이 느껴졌다.

미사실의 단상 옆에 딸린 방이니 예배에 쓸 물건을 보관하는 장소 아닐까 했는데, 어렴풋이 보이는 것은 책꽂이와 두꺼운 양장본뿐이었다. 사비나는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등잔불을 켰다.

'굉장히 낡은 책이네.'

성서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책은 반듯하게 꽂혀 있었으나 세월을 버티지 못한 까닭에 낡은 가죽표지의 상태는 제각각이었다. 가장 오른쪽에 꽂힌 것은 비교적 상태가 좋았으나, 가장 왼쪽에 꽂힌 책은 가죽표지가 양피지의 무게를 버티지 감당하지 못해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사비나는 본래 호기심이 없었다. 그녀는 미지의 것을 두려워했고, 시키지 않은 일은 하지 않으며, 남의 물건에 손대는 일 또한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서책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이끌려 다가가 그것을 꺼내고 말았다.

제본 상태가 엉망이라 낱장이 뜯겨 나가기 일보 직전인 상태였다. 사비나는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고 조심히 펼쳤다.

그곳에는 과거의 기록이 적혀 있었다. 기록이라기엔 아주 사소한, 지나칠 정도로 재미없고 심심한 일상을 나열한 것에 불과했으나, 사비나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상단에 적힌 날짜였다.

‘15년 전…….’

알렉세이에 의해 마을의 시간이 멈추고, 로스카옌이 마을을 구하기보다 딸을 구하기를 택하고, 사비나가 괴한들의 손에 끌려가 주술사가 되어야 했던 시절의 기록.

그것은 자신과 가장 닮았으면서도 단 한 번도 소통하지 못했던 아버지, 로스카옌의 일기장이었다.

‘대체 무슨 기록을 이렇게 많이 남겼지?’

이러다 할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던 아버지였다. 단지 조용하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로스카옌 자신이 사비나를 피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몇 번이나 대화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두 사람을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비나는 로스카옌이 무척 과묵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기장에 적힌 내용은 겉으로 보이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처음에는 비록 힘이 없을지언정 단정한 필체로 적어나가던 일기가 차츰 글씨가 커지고 꾹꾹 눌러쓴 듯이 잉크가 지저분하게 튄 자국이 묻어나더니, 이내 글씨를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사비나는 그 일기의 내용을, 글자에 담긴 감정을 전부 읽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고등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어려운 단어와 비유적인 표현이 가득한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저주받은 마을에 남겨진 외부인.

홀로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침묵하는 자.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그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얼굴조차 보지 못하는 장소로 떠나보내야 했던 남자의 심정이 거친 글씨 속에 묻어 나왔다.

‘왜 이런 걸 남긴 거지? 이 마을엔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도 없다면서.’

그것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기록이 아니었다. 글씨가 엉망인 것은 그의 필체가 조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쏟아지는 감정을 담아내기에 시간도 지면도 모자라기 때문이리라.

[카림은 아직도 울면서 연못을 돌고 있다. 그 아이도 어머니를 저토록 애달프게 찾을까. 아이의 울음소리가 두려운데도, 나는 비가 내리기를 기원할 수가 없다. 연못에서 들리는 울음소리는 카림이 내는 것이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그 아이의 눈물일 것 같아서. 비가 내릴까 두렵다. 내일도 맑기를 소망한다.]

그 아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던 사비나의 손이 멈칫했다. 놀라움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이 등골을 서늘하게 훑고 내려갔다. 오스스 소름이 돋아, 사비나는 가볍게 고개를 털고는 페이지를 넘겼다.

[빵을 구워 카밀라에게 가져다주었다. 입술 절반이 눌어붙어 제대로 벌리지 못하는 카밀라의 입에 작게 빵을 잘라 넣어 주고, 앞이 보이지 않는 카이라트에게도 빵을 뜯어 먹여 주었다. 갓 구운 빵의 따뜻하고 달콤한 맛이 마음에 들었는지, 두 번째는 내가 먹여 주지 않아도 알아서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 아이에게도 빵을 구워 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치즈를 넣은 빵을 새로 개발했다. 카밀라도 카이라트도 이번에는 대단히 맛있다고 칭찬해 주었다. 그 아이가 이곳에 없어 먹일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아니, 조금도 안타깝지 않다. 그 아이는 이것보다 더 훌륭한 요리를 먹고 있을 테니까.]

로스카옌의 일기에는 그가 15년 동안 이 마을에서 행해왔던 모든 일들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연못을 도는 카림에게 비 오는 날에는 나오지 말라고 조언한 일, 카밀라와 카이라트에게 빵을 구워 준 일, 카밀라의 옷에 구멍이 나서 그것을 바느질해 준 일, 그날 밤에 교회로 쳐들어온 나자예프의 실없는 잡담을 들어 준 일까지.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반복적인 일상.

그러나 그 사소한 것들이, 로스카옌에게는 두려워서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마치 무서운 것을 보고 나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기록을 남기는 것처럼, 일기장의 글씨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바라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그 아이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욕심이다. 이곳은 저주받은 마을. 죽음의 땅. 그 아이가 와서는 안 되는 곳이다. 부디 일생 이곳에는 방문할 일이 없기를.]

[얼마나 자랐을까. 카림보다는 조금 더 키가 커졌겠지. 카밀라보다는 한참 작을까. 아이의 얼굴을 그려보다가, 생각하는 것조차 죄스러워 그만두었다. 아니, 죄스럽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나는 그저 두려울 뿐이다. 상상 속에서나마 그 아이를 떠올렸다간 정말로 이 마을에 그 아이가 올지도 모른다. 만약이라는 가정은 언제나 가장 큰 공포를 가져다준다.]

[카이라트의 눈이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살아남은 다른 이들에게 일기를 읽힐 걱정이 없어 다행이다. 죄업을 낱낱이 고하고도 그것을 들킬 일이 없다는 사실이 나로부터 염치를 빼앗아갔다. 사제복이 검어서 다행이다. 나의 죄마저 가려 주니까.]

로스카옌은 어째서 이런 기록을 남긴 것일까. 잉크가 묻어난 자국으로 보아, 지나간 날의 기록은 펼쳐 보지조차 않은 것 같았다.

다시 보기 위해서도 아니고,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도 아닌 이 일기를 그는 왜 남긴 것일까.

[올가는 선택했다. 가정을 꾸려 정착하는 삶보다, 모든 간섭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만끽하는 삶을 택했다. 나도 선택했다. 마을을 구하고 사제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삶보다, 아이에게 미래를 주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선택하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죽고, 또 고통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날로 시간이 되돌아간다고 한들 반드시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 아이는 선택하지 않았으니까. 아직 어떤 삶을 살지 선택조차 하지 못한 아이에게서 미래를 빼앗을 수는 없으니까. 어차피 빼앗길 미래라면, 내 미래를 대신 넘겨주는 편이 낫다. 그것이 존재를 밝힐 수 없는 아버지로서의 마지막 속죄일 테니.]

자신을 향한 변명과 위로의 말이 죽 나열되어 있었다. 사비나는 로스카옌이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쏟아 내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사비나와는 마지막까지 제대로 된 대화 한번 해 본 적이 없는데.

[그 아이가 왔다. 놀랄 만큼 키가 자라 있었다.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 부끄러워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당황하는 모습을 들키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위험한 곳에 아이를 있게 해서는 안 된다. 아이를 돌려보내야겠다. 이 마을을 떠나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떨지 않고 제대로 말을 했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문을 닫으면서 손가락 끝을 찧고 말았다. 나이를 먹으면 모든 일에 무뎌질 줄 알았는데, 이 소심한 병만은 어째 낫지를 않는지.]

[아이가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다. 이 마을에 남겠다고 말했다. 아이가 선택했으니 그 선택을 존중하는 수밖에.]

그다음 문장은 엉망으로 지워져 있었다.

[선택이 아니다. 존중이 아니다. 마음이 들떠서 제대로 정리가 되지를 않는다. 주의사항을 말해 주었는데 다 열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가슴이 뛰고 손이 떨려 온다. 아이가 남겠다고 말했다. 내 옆에 있겠다고 말했다. 기뻐하는 것을 들켰을까. 어제와 오늘 말이 다른 것을 의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심을 받아도 좋다. 그 아이가 이곳에 있다. 한 공간에 있다. 같은 하늘 아래서, 같은 땅을 밟으며 살고 있다. 그것이 참을 수 없이 기쁘다.]

[아이의 행복을 원한다면 돌려보내야 한다. 아이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쫓아내야 한다. 그런데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아이를 보는 일이 즐겁다. 대화를 나누는 것이 기쁘다. 그저 스쳐 가는 발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가슴이 먹먹해졌다. 죄인이 이토록 행복해져도 되는가. 아니면 내가 죄인이기에 자신을 다잡고 반성할 생각조차 못 하고 이 아슬아슬한 행복을 붙잡고 있는가.]

로스카옌의 혼란스러운 심정. 떨리는 글씨 안에 뒤섞인 공포와 희열이 무엇인지 사비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딸을 만나고 싶어 했다. 사비나를 만나서 기뻐했다. 그녀가 위험에 처하리라는 것을 알기에 돌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사비나가 남기를 선택하자 기뻐했다.

“그렇게 좋았으면서…… 왜 말해 주지 않았어요?”

사비나는 얼룩진 페이지의 글자를 향해 물었다. 자신의 것을 쏟아내기에 여념이 없는 바쁜 글자들은 사비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겁쟁이…….”

번진 잉크자국 위로 물방울이 톡, 떨어졌다.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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