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그렇다. 에르잔은 환상이 아니다. 늪에 빠진 그녀에게 드리워진 구원의 밧줄은 분명 허상이 아니었다.
이토록 빛나는 남자의 존재를 의심할 정도로 사비나는 어리석지 않았다. 몸에 닿는 온기가, 숨결이, 눈빛이, 그녀의 세상에 그가 실재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에르잔은 허상이 아니다. 그의 마음도 거짓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비나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저주의 화신이 아니게 되어도, 사비나에게 에르잔은 여전히 눈부신 태양과도 같은 사람이다. 동경하지만, 정면으로 바라보면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그런 존재다.
“에르잔은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어떻게 나를 미워하지 않을 수가 있냐고요.”
사비나는 그러지 못했는데.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용서하지 못했는데. 그녀의 아버지를 사칭하며 어머니와 진짜 아버지를 죽게 만든 남자를, 자신의 인생을 뒤틀어 버린 남자를 증오하는데. 과거로 돌아간다면 망설이지 않고 그 남자를 죽일 수 있을 만큼 미워하는데.
왜 에르잔은 그러지 않는 걸까.
“제가 왜 아가씨를 미워해야 합니까?”
그가 빛나는 사람이라서일까. 마음에 그늘이 없는 사람이라서일까.
“말했잖아요. 내가 이제까지 저지른 일들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내가 당신 가족을…….”
“사비나 아가씨. 저는 보육원에 맡겨지기 이전의 기억이 없습니다.”
“네?”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사비나 아가씨와는 달리.”
에르잔은 가족이 무엇인지 모른다. 추억이 무엇인지 모른다. 행복이 무엇인지 모른다.
만약 에르잔이 조금 더 자란 후에 보육원에 맡겨졌다면, 부모를 잃은 기억이 있다면, 행복한 가정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다면, 자신의 과거를 짓밟은 운명에 대한 원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린 사비나가 어머니를 부르며 울었던 것처럼. 불타는 마을을 바라보며 저주의 말을 퍼부었던 것처럼.
그러나 에르잔에게는 그런 기억이 없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부모가 있었고, 그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에르잔은 충격을 받지 않았다. 그렇기에 에르잔은 늘 자신이 있어도 되는 장소를,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돌아갈 곳이 아니라, 있을 곳을 찾았다.
기억도 미련도 없는 에르잔에게 사실은 과거에 이러한 일이 있었노라고, 그렇게 이야기해 봐야 그저 설명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에르잔에게는 그리움이 없었다. 추억할 과거가 없기에 늘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를 달려온 청년은 과거의 그림자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알렉세이의 말을 듣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사비나와는 달리.
“사비나 아가씨와 저는 처지가 다릅니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마음이 변하지 않습니다. 아가씨는 제게서 과거를 빼앗아 갔다고 말씀하셨지만, 저에겐 처음부터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그래요. 다르죠.”
“사비나 아가씨, 그러니까…….”
“나와 에르잔은 다른 사람이에요. 역시 달라. 우리는 섞일 수가 없어.”
사비나가 어깨를 움츠리며 에르잔을 밀어내자,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움찔 놀라 놓아 주었다. 사비나의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에르잔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는 듯이.
“에르잔은 달라. 에르잔은 강해. 그래서 당신은 나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는 거야.”
사비나는 마치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다가, 물기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나는 그게 안 돼요.”
두려워서.
욕망하는 것이, 너무 두려워서.
너에게 욕망할 자격이 있느냐고, 어떻게 감히 네가 상처 입힌 사람에게 그런 것을 바랄 수 있느냐고 세상이 말하는 것 같아서.
실제로는 아무도 그녀를 비난하고 있지 않은데.
혹시라도 입 밖에 내어 욕망을 말하면 받게 될 그 비난이 두려워서.
그래서 사비나는 계속해서 피하고 숨었다.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원하지 않는 척했다.
수많은 사람을 죽여 온 자신에게는 행복해질 자격이 없다는 명분으로 허울 좋은 자기 위로를 반복했지만.
사실은 그런 명분이나 합리 따위는 아무 상관 없었다.
그저 두려웠다. 너무나도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지막 하나의 희망이 사라지면, 아득한 절망만이 자신을 덮칠 것을 알기에.
욕망을 마주한 그녀가 절망에서 벗어나면, 새로운 절망이 그녀의 세상을 가득 채울 것을 알기에.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보다, 아마도 그럴 것이라는 절망이 더욱 크게 와닿았기에.
사비나는 여전히 비겁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에르잔. 나는…… 나는 겁쟁이라서…….”
에르잔을 만나 행복을 깨닫자 저택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러나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에르잔이 기사로서 성과를 낼 수 없다는 사실에 다시 두려워졌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에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래도 좋다고, 그런 사비나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에르잔이 말했을 때는 이번에야말로 희망을 쥐었다고 생각했는데.
에르잔이 있을 자리를 빼앗고, 그가 누려야 할 것을 빼앗고, 그의 가족을 빼앗고, 그의 인생을 빼앗은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상기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에르잔이 괜찮다고 말하는데. 그녀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사비나와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하는데.
사비나는 에르잔의 부탁을 들어주기보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공포를 피하는 것을 택하고 만다.
“못 하겠어…… 벗어나는 게, 안 돼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이미 희망을 품었다가 절망하는 경험을 수없이 해왔음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에르잔과 함께 하는 미래를 꿈꾸었는데.
이번에야말로 절망을 떨쳐 내고 그와 함께 미래를 걸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사비나를 가두던 저주의 족쇄를 에르잔이 끊어 내 줄 줄 알았는데.
벗어나고서 깨달은 것은, 아무리 억압의 굴레를 벗어나 봤자 새로운 억압에 갇히고 만다는 사실뿐이다.
사비나가 변하지 않으니까. 그녀를 괴롭히는 것이 그녀 자신이니까.
에르잔이 아무리 관대한 사람이라도, 사비나의 행위를 용서해 준다 할지라도, 사비나 스스로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계속 있을 자리를 찾아왔다고 했잖아요. 계속…….”
에르잔이 말하지 않았던가.
무스코바예프 보육원에서도, 기사 양성소에서도, 황실 기사단의 대기실에서도. 어디에도 에르잔이 있을 자리가 없어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노라고.
그토록 오랫동안 에르잔을 홀로 떠돌게 한 사람이 사비나였다.
에르잔이 가장 애타게 바라던, 그의 <있을 자리>를 빼앗은 사람이 바로 자신이다.
“사비나 아가씨. 저는 고통스럽지 않았습니다.”
“내가 고통스러워요. 내가 고통스럽다고요……!”
적반하장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사비나는 어깨를 붙잡고 덜덜 떨었다.
“나는 무서워요. 당신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에르잔이 받아 주고, 받아 주지 않고는 상관없다. 에르잔이 용서하고, 용서하지 않고는 상관없다.
사비나가 자신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가장 소중한 존재에게 불행을 안겨 주었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두 사람이 함께한다면, 사비나는 여전히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채로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불행에 가슴을 졸인 채로 살아야 할 것이다.
가장 행복해질 줄 알았던 에르잔의 곁에서, 가장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미래를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너무 두려웠다.
그리고 싫었다.
“미안해요. 나는…… 나는 안 돼. 나한테는 무리야…….”
두려움에 맞서는 것보다, 용기를 가지는 것보다, 그저 공포 속에 삼켜져 자신을 놓아 버리는 일에 익숙한 삶을 살아온 사비나에게, 희망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그저 절망뿐인 공간에 버려지는 것보다 더욱 두려운 일이었다.
“미안해요, 에르잔. 내가 이런 사람이라서…… 에르잔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나를 믿지 못해서…….”
사비나의 미래에는 에르잔만 있으면 되는데.
그 미래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하는 순간, 차라리 처음부터 미래는 없는 편이 좋다고 단정을 지어 버린다.
겁이 많은 사람은 신중하다는 소리는 역시 거짓말이다. 겁에 질린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빨리 포기하고 회피하는 사람이다. 불분명한, 불완전한, 가변적인 무언가를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도망치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비나는 늪을 벗어날 수 없다. 에르잔이 손을 내밀고 있음에도 그의 손을 잡을 수 없다.
“내가 불행해질까 봐, 너무 무서워…….”
살짝만 건드려도 부서질 것처럼 얇은 껍질 안에 자신을 숨기고, 마치 목숨을 구걸하듯 절박하게 내뱉은 대답에 에르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늘 그녀를 따스하게 안아 주던 커다란 손이 갈 곳을 잃고 허공에서 방황했다.
사비나는 에르잔의 손이 멈춘 틈을 타 옆으로 빠져나왔다. 에르잔이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에르잔이 뒤따라오는 발소리를 들은 사비나는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교회로 숨어들어 갔다.
복도, 기도실, 로스카옌의 방, 미사실, 고해실.
숨을 곳을 찾던 사비나는 단상에서 계단을 통해 내려가는 곳에 자리한, 창고처럼 보이는 작은 문을 열고 제 몸을 들이밀었다.
그것은 마치, 궁지에 몰린 짐승이 구덩이에 머리부터 밀어 넣고 도망치려는 모습과도 같았다.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