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난 괜찮아. 아가씨나 마셔.”
흠흠 목을 가다듬으며, 오딜은 사비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옆으로 누웠다.
“……나를 보자마자 하는 말이 그거예요?”
“미안해, 아가씨. 기껏 열심히 치료해서 목숨을 구해 줬는데, 내가 경우가 없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빼먹었군.”
“그게 아니라…….”
사비나가 조금 불만스러운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마치 투정을 부리는 듯이.
그 음성에 오딜이 움찔거리며 몸을 바로 했다. 눈을 여전히 사비나를 보지 않은 채로.
“그…… 구해 줘서 고마워, 아가씨.”
“오딜.”
사비나가 다시 한번 오딜의 이름을 부르자, 오딜이 그제야 사비나를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똑바로 자신을 향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오딜의 황금색 눈동자가 열심히 끝에서 끝으로 굴러가는 것이 보였다.
“내가 보기 싫어요?”
“아니…….”
“올가…… 엄마를 닮아서, 보기 싫은 거예요?”
“응?”
내내 시선을 피하던 오딜이 놀란 표정으로 사비나를 마주 보았다.
사비나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듯이,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불안한 것 같은 얼굴로 오딜에게 물었다.
“난 엄마 얼굴을 몰라요. 기억이 안 나.”
오딜도, 나자예프도 사비나가 올가를 닮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카밀라는 두 사람이 닮은 줄 잘 모르겠다고 했고, 네나뷔스테는 반대로 사비나가 로스카옌을 닮았다고 말했다.
자신은 과연 누구를 닮은 것일까. 어머니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고, 로스카옌의 모습도 나이를 지긋하게 먹은 이후밖에 모른다.
“엄마 얼굴을 기억하는 건 이 마을 사람들밖에 없는데, 다들 말이 다르니까…….”
“안 닮았어.”
오딜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예전과는 다른 반응에 사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떠도 오딜은 대답을 바꾸지 않았다.
그렇다. 사비나는 올가를 닮지 않았다. 아름다운 외모인 것은 모녀가 같지만, 인상은 확실히 다르다. 눈도, 코도, 전체적인 분위기도 닮지 않았다.
“전에는 닮았다고 했잖아요.”
“<진짜> 올가와는 안 닮았어. 내 기억이랑 닮은 거지.”
“……네?”
오딜이 기억하는 올가. 그의 여동생이면서, 그가 억압하고 휘두르는 대로 휘둘리던 가련한 여동생. 무엇에도 정을 붙이지 못하고 그저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처럼 위태롭기만 하던 여동생. 어떠한 욕망도 없다는 듯 공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있다고 한들 자신에게는 절대로 말해 주지 않을 것 같았던 그녀를 닮았다.
“미련이나, 죄책감이나…… 뭐 그런 거.”
올가에 대한 죄책감을 버리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자꾸 과거를 미화하고 덧씌우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외면해 버리는.
자신 안의 가장 부정하고 싶은 부분을 찌르는, 죄의식을 닮았다.
“안 닮았어. 아가씨가…… 사비나가 훨씬 더 예뻐.”
“네?”
“그리고 더 기특하고.”
조금 머쓱한 듯이 말하면서, 오딜이 왼팔을 들어 올렸다. 흉터 가득한 손이 사비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듯 다가오다가 허공에 멈추었다. 손을 대도 좋을지 망설이는 듯한 표정이었다. 사비나는 쓰다듬어도 좋다고 말할까 하다가, 얌전히 고개를 숙여 오딜의 손바닥 쪽에 제 머리가 닿게 했다.
오딜은 잠시 손을 그대로 멈추고 있다가, 겨우 어색하게 사비나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고는 팔을 내렸다.
“여자애들은 머리 쓰다듬는 거 싫어하지 않나?”
“왜요?”
“그…… 머리 모양 망가진다고 싫어하던데. 네나뷔스테도 그렇고 카밀라도…….”
“그럼 내 머리는 왜 쓰다듬으려고 했는데요?”
사비나의 질문에 오딜의 말문이 막혔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러고 싶어서, 라고밖에는 답할 말이 없었다. 오딜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대답을 찾다가 마땅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내가 섬세함이랑은 거리가 멀거든. 어떻게 표현해야 싫어하지 않는지를 잘 몰라.”
“네?”
“요리도 못하고, 선물도 줘 본 적이 없고…… 그렇다고 뭐 말을 예쁘게 하는 법도 모르고. 아는 게 그냥 쓰다듬는 것밖에 없어.”
갑자기 커흠, 하고 어색한 헛기침을 하더니 오딜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귀가 조금 붉었다.
“미안하다. 이 나이를 먹고도 조카를 어떻게 귀여워하면 되는지 아는 게 없는 팔푼이라서.”
“오딜…… 삼촌.”
사비나가 <삼촌>이라고 부르자, 민망한 듯 그녀를 외면하고 있던 오딜의 고개가 다시 사비나에게로 향했다.
“억지로 그렇게 부를 거 없어.”
“억지로 부르는 거 아니에요.”
사비나가 조금 더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오딜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오딜은 난처한 얼굴로 몇 번 눈을 굴리다가 다시 왼손을 들어 사비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올가는 이러는 거 싫어했는데.”
“나는 안 싫어해요.”
“……그래. 정말로 안 닮았어…….”
어쩐지 가슴 속이 뜨거운 물결로 꽉 차오르는 듯이 숨이 막혀와, 오딜은 목이 멘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사라진 오른팔 대신, 그의 마음을 채우는 더욱 소중한 육신을 얻은 기분이었다.
***
잠든 오딜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해서 기도실을 나온 사비나는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페고라가 아직 있었다면 잔소리를 했을 텐데, 덕분에 소란을 일으키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래. 다행…….’
다행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비나는 흐트러진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 냈다. 오딜이 쓰다듬어 준 정수리가 괜히 아려 왔다.
‘이게 가족이구나…….’
아버지를 자칭하던 남자가 쓰다듬어 줄 때 느꼈던 감각과는 전혀 달랐다. 귀족답게 우아한 손도 아니고, 거칠고 투박하고 상처투성이에 움직임마저도 벅벅 문지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그게 싫지 않았다. 무신경한 듯 보이면서도 서투른 애정이 묻어나는 행위가 싫지 않았다.
가족이란 이런 것이다. 그것을 자각하자 사비나는 다시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에르잔의 가족을, 내가…….’
죽였다. 그의 부모도, 친척도, 전부 다.
알렉세이가 지시한 거라고, 사비나가 원해서 한 일이 아니라고 변명한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일까. 에르잔의 마지막 하나 남은 혈육인 알렉세이를 제 손으로 끝장낸 것은 사비나 본인인 것을.
사비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침 바람이 묘하게 싸늘했다. 광장 너머 멀리 동쪽 첨탑의 끝이 보이고, 그보다 더 가까이에 둥그렇게 웅크린 알렉세이의 주검이 보였다.
꼭 둥그런 무덤에 꽂힌 비석처럼 보여, 사비나는 그것으로부터 눈을 돌렸다.
‘내가 죽인 거야.’
손끝이 차갑게 식더니, 가늘게 떨려 왔다. 사비나는 어깨를 웅크리고 굴로 숨어들어 가는 짐승처럼 숲속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나무의 그림자에 숨을 셈이었는데,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든 아침 햇살이 사비나가 숨을 장소에 자꾸 끼어들었다. 사비나는 햇빛을 피하려는 듯이 더욱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다가, 바닥의 장애물을 밟고 발을 헛디뎠다.
“앗……!”
“조심하십시오, 사비나 아가씨.”
커다란 손이 사비나의 팔을 부축하더니,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그녀를 바르게 일으켜 세웠다. 아침 햇살 아래서 더욱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이 보였다.
“에르잔…….”
“밤새 무리하셨는데,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시는 편이 좋습니다.”
“……아니에요.”
“사비나 아가씨. 좀 더 몸을 아끼는 습관을 들이셔야…….”
“아가씨가 아니에요.”
“예?”
“이제 알잖아요. 난 귀족도 아니고, 콘바야젠 가문의 일원도 아니고…… 에르잔을 호위기사로 둘 자격이 없다는 거.”
힘없이 말하며 고개를 떨구는 사비나의 뺨에 커다란 손이 와 닿았다. 오딜의 것과는 달리 흉터 하나 없는 에르잔의 손은, 단단하게 굳은살이 박여 있음에도 무척이나 따뜻했다.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나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었어요.”
“아가씨께서 원해서 한 일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에르잔의 인생도, 나 때문에 엉망이 되어 버렸잖아요.”
콘바야젠 백작, 아니, 콘바야젠 공작이 죽은 이상 에르잔은 황실 기사단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의 무기한 휴가계를 승인한 것은 알렉세이였으나, 그가 죽은 이상 기사단에서는 에르잔의 장기 부재를 용인해 줄 권력자가 없다. 장기 부재를 이유로 충분히 해임할 명분이 서는 것이다.
아니라고 한들 에르잔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신체검사 부적합 판정으로 그를 이끌어줄 상관도 없고, 비호해 줄 권력자 하나 없는 것을.
콘바야젠 가문으로 돌아가려면 그의 신분을 증명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사비나가 알렉세이를 죽여 버리는 바람에 그조차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사비나는 자신이 그동안 에르잔의 자리를 빼앗은 것으로도 모자라 앞길까지 틀어막았다는 사실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미안해요…… 당신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내가 참지 못해서…….”
“참으실 것 없습니다.”
“나 때문에 에르잔이 갈 곳이 없어졌어요.”
“아가씨와 함께하겠습니다.”
“……나는 에르잔의 것을 빼앗고, 당신 앞길도 막고, 그러고도 모자라서 내 앞일까지 당신에게 의지하기만 하는 형편없는 사람인가요?”
“사비나 아가씨. 저는 당신의 호위기사입니다.”
온건한 말투와는 달리, 굳은 의지가 실린 목소리에 사비나가 고개를 들었다. 밤이 이토록 어두운데, 지근거리에서 보이는 에르잔의 눈은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제가 그렇게 정했습니다.”
“에르잔…….”
“사비나 아가씨. 로스카옌 신부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자신의 욕망을 따르라고.
남을 배려하려 하지 말라고. 타인의 잣대에 맞추지 말라고.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르는 채로는 타인을 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저는 당신을 원합니다.”
“…….”
“아가씨께서도 저를 원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늘을 닮은 푸른 눈동자에 태양이 비쳤다. 사비나는 그것이 너무 눈부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만약 양손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분명 그리했을 것이다.
“당신의 미래가, 당신의 눈앞에 있습니다.”
내일을 바라지 않았던 사비나가 처음으로 꿈꾸던 미래.
그 빛나는 내일이, 그녀에게 말했다.
“저는 환상이 아닙니다.”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