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올가 누나가 낳은 아이는 로스카옌 신부님의 딸인데.”
“……뭐?”
있는 힘껏 바닥과 밀착한 몸을 유지하려 하던 나자예프가 용수철처럼 튕겨 나왔다. 준비 자세도 없이 일어났는데 휘청이지도 않고 제대로 선 나자예프를 보고 바르셀다는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형. 혼자서도 일어날 수 있었네?”
“야, 바르셀다…… 너 그거, 진짜야? 사실이야? 책임질 수 있어?”
“뭘 책임진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 여자가 올가 누나 딸이라면 알렉세이 형이랑은 아무 관계 없어.”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한 바르셀다의 반응에 나자예프는 혼자서 비틀거리며 교회 의자를 짚었다. 돌연 그가 이상한 신음 소리를 내며 안 그래도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쥐어뜯을 듯이 움켜쥐었다.
“형, 왜 그래? 머리카락 뽑을 거면 나가서 뽑아! 여기 청소하기 힘들단 말이야.”
“젠장! 그럼 나는 이제까지 대체 뭘 고민한 거야?”
“형도 고민이라는 걸 해?”
“아아악!”
바르셀다의 지적에 대답도 하지 않고, 나자예프는 괴성을 지르며 미사실을 뛰쳐나갔다.
“아, 깜짝이야! 나자예프. 뛰어다니지 마!”
복도로 뛰쳐나온 나자예프의 모습에 기겁한 카밀라가 얼른 신발을 벗어들어 움켜쥐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자예프는 카밀라에게 후려맞지 않을 정도로만 안전거리를 벌린 상태에서 과장되게 팔을 흔들며 소리쳤다.
“카밀라! 큰일 났어! 진짜 큰일이야!”
“너보다 더 큰 골칫거리는 없으니까 제발 여기서 시끄럽게 굴지 말고 꺼져!”
“아니, 내 말 좀 들어봐! 사비나가 글쎄, 알렉세이 형이 아니라 로스카옌의 딸이었대!”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자예프가 호소하며 양손을 부르르 떨었다. 대뜸 복도에서 튀어나와 헛소리를 하는 나자예프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본 카밀라가 미친 사람을 보는 얼굴로 툭 내뱉었다.
“다 아는 소리를 뭘 처음 듣는 듯이 말하고 있어. 설마 너 이제 알았냐?”
“뭐?”
여기서 더 놀랄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카밀라의 대답에 나자예프의 힘이 쩍 벌어졌다. 그는 한참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어버버거리다가, 얼른 고개를 흔들고는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야, 카밀라. 너는 어디서 그걸 들었어?”
“동쪽 첨탑에 가서 숨었을 때 페고라랑 카림이 말해 줬는데, 넌 거기 없어서 몰랐나 보네. 아니, 그런데 아페티트도 알던데? 왜 너는 몰라?”
“뭐? 아페피트도 안다고? 걔랑 나랑 알고 있는 정보는 똑같을텐데, 왜?”
“알렉세이가 교회에 들이닥쳤을 때 말하더군요. 제일 먼저 그와 마주쳤다면서, 그것도 몰랐습니까? 나자예프.”
뒤에서 나타난 아페티트가 한마디 곁들자, 나자예프는 황망한 표정으로 얼어붙었다. 마을로 쳐들어온 알렉세이와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나자예프와 바르셀다였는데, 나자예프는 다리가 부러진 바르셀다 옆에 죽은 듯 누워 있느라 알렉세이와는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다.
나중에 뒤틀린 다리를 억지로 끼워 맞춘 바르셀다와 함께 동쪽 첨탑으로 찾아갔을 때, 사비나가 알렉세이를 향해 부모를 죽였네 어쩌네 하는 것을 듣기는 했지만.
“그럼 그게 진짜였던 거야?”
“뭔진 모르겠지만 네가 몰랐던 것은 진짜야.”
“그런데 나 빼고는 다들 알고 있었다고? 왜 나만 몰랐지?”
그 자리에 나자예프만 없었기에 그만 몰랐다.
카밀라가 네나뷔스테와 동생들과 함께 동쪽 첨탑에 숨었을 때, 알렉세이가 서쪽 교회에 쳐들어가 아페티르를 비롯한 다른 생존자들을 협박해서 끌어냈을 때,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사비나가 알렉세이를 향해 분노를 토로할 때.
나자예프는 마을 입구에 바르셀다와 함께 엎어져 있었으니까.
바르셀다는 처음부터 올가와 로스카옌 사이에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결과적으로 알렉세이가 올가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있다는 잘못된 정보는 나자예프의 머릿속에서만 정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너희들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야? 왜 나한테 말 안 해 줬어!”
“별소리를 다 듣겠군요, 나자예프. 다들 아는 사실을 당신 혼자 엄한 곳에서 뻘짓 하느라 못 들었으면 당신 잘못이지, 왜 저를 원망합니까?”
“맞아! 그리고 네가 알았든 몰랐든 간에, 내가 왜 너한테 사비나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아페티트와 카밀라가 한 소리로 쏘아붙이자 나자예프는 할 말이 없어졌다. 뒤늦게 찾아온 충격에 멍해진 나자예프는 손을 올렸다가 내렸다가 버벅거리다가, 뭔가 깨달은 듯이 박수를 짝 울렸다.
“그럼 나랑 사비나는 숙질간이 아니니까…… 기회가 있는 거네?”
“기회는 무슨 기회?”
“위기를 넘기면 기회가 온다는 말이 사실이었어. 나는 포기 안 해도 되는 거야!”
“뭔지는 모르겠지만 포기하시죠, 나자예프.”
“아, 기다려 봐! 내가 당장 사비나한테 가서 이 기쁜 소식을 알려야…… 커헉!”
화색이 도는 얼굴로 냉큼 기도실을 향해 뛰어가려는 나자예프의 목을 붙잡고 에르잔이 그의 몸을 들어 올렸다.
“사비나 아가씨께서는 치료로 바쁘시다. 방해하지 마라, 나자예프.”
“뭐야, 에르잔! 방해하지 마! 나는 지금 빨리 달려가서 내 사랑을 고백…… 꽥!”
낡은 교회 건물이 부서지지 않도록 에르잔은 나자예프를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 말마따나 늘씬한 몸매가 자랑이라던 나자예프는 단말마와도 같은 비명을 지르며 창 너머의 떡갈나무에 거꾸로 꽂혀 버렸다. 교회에 깃든 신성한 힘은 주위의 나무에도 적용되는 것인지, 충격이 상당했음에도 나무는 부러지지 않고 거꾸로 꽂힌 나자예프의 몸을 열매처럼 매달고 있었다.
마치 원래부터 저런 모습이 되기로 정해져 있었다는 듯이 자연스러운 창밖의 풍경을 보며 카밀라는 감탄했고, 아페티트는 슬쩍 자리를 피했다. 에르잔은 눈으로 아페티트의 족적을 쫓다가, 카밀라의 부름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에르잔. 사비나는 어디 있어? 어지간히 다들 치료가 끝난 줄 알았는데.”
“오딜의 치료가 아직이다.”
“아, 오딜 아저씨…….”
창밖의 나자예프를 구경하던 때만 하더라도 신나 보였던 카밀라의 표정이 다시 흐려졌다.
“아저씨, 나을 수 있을까?”
“…….”
에르잔은 대답할 수 없었다.
오딜의 부상은 심각했다. 팔이 갈려 나간 데다가 목까지 꺾이는 바람에, 가볍게 재생의 주술을 거는 것으로 회복 가능한 부상이 아니었다.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재생의 주술을 강하게 걸었다가 오딜의 몸이 버티지 못하고 터져나가면 그것도 문제고, 반대로 재생의 힘이 모자라서 불구인 채 계속 목숨만을 붙들어 놓는다면 살아 있는 것이 고통일 것이다. 차라리 죽게 놔두는 편이 오딜을 위해서는 더 나을 거라고 페고라는 조언했다. 그러나 사비나는 말을 듣지 않았다.
<끝까지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사비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에르잔을 피하듯이 오딜을 데리고 기도실로 들어갔다. 페고라는 혹시 오딜이 치료받다가 죽으면 바로 장례 준비를 해야 한다는 재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따라 들어갔다.
에르잔은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저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주위를 서성이다가, 제 발소리가 사비나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아 결국 자리를 떴다.
사비나의 곁에 있고 싶었지만, 그녀가 자신을 피하는 이유를 알기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오딜은 사비나의 외삼촌으로, 지금 살아 있는 사비나의 유일한 혈육이다.
그러나 오딜을 살리겠다고 말하는 사비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에르잔에 대한 죄책감으로 흔들렸던 것을 기억한다.
에르잔은 의식하지 않고 있지만, 알렉세이 또한 에르잔의 유일한 혈육이었으니까. 그를 죽게 만들어놓고, 제 혈육을 살리겠다고 외치는 꼴이 모순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마치 에르잔의 시선으로부터 도망치듯이 기도실로 들어갔다.
에르잔의 눈에 마지막으로 각인된 사비나의 뒷모습은, 자신보다 훨씬 덩치가 큰 오딜을 끌고 들어갈 만큼 힘이 있는데도, 유달리 연약하게 느껴졌다.
'사비나 아가씨…….'
에르잔은 복도 너머의 닫힌 문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한숨을 흘렸다.
***
내내 시체처럼 늘어져 있던 오딜의 눈에 빛이 돌아온 것은 다음 날 아침 해가 떠오를 즘이었다. 겨우 눈을 뜬 오딜을 보고 기뻐하던 사비나와는 달리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것은 오른팔이 사라져, 남은 일생을 불구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때도 죽지를 못했는데, 지금도 죽지를 못하는군.”
“심보가 그따위니까 일이 원하는 대로 되지를 않는 거야.”
난처해하는 사비나 대신 끼어든 페고라가 오딜의 코를 꽉 쥐었다. 어찌가 세게 쥐어 잡았는지, 순간적으로 콧대가 꺾이는 줄 알았다. 숨이 막혀 콜록거리는 오딜을 보고 당황한 사비나가 말리는 데도 페고라는 손을 놓지 않았다.
“페고라, 그만 해요! 오딜은 아직 환자예요!”
“환자는 무슨. 저승 문턱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것을 보니까 올가한테 미움받고 쫓겨난 게 분명한데.”
“네?”
“그럴 거 아냐. 겨우 억압에서 벗어나 저승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데, 로스카옌도 왔겠다 이제 회포도 풀고 한창 단꿈에 젖어 있을 때에 눈치도 없이 오라비라는 자식이 찾아오니 올가가 얼마나 화가 났겠어? 저승에서 당장 꺼지라고 엉덩이를 걷어차서 다시 돌아온 거겠지.”
페고라는 빨갛게 손자국이 날 정도로 오딜의 코를 잡아 비틀었다. 기겁한 사비나가 거의 매달려서 잡아끌 듯이 페고라를 떼어 내고 나서야 오딜은 숨을 쉴 수 있었다. 여전히 오딜을 비난한 데 여념이 없는 페고라를 억지로 문밖으로 밀어내고,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잠금쇠까지 걸어 잠근 사비나가 오딜에게로 다가왔다.
그때까지도 오딜은 숨이 막혀 콜록거리고 있었다.
“오딜, 물 마셔요.”
“…….”
사비나가 물잔을 내밀었지만, 오딜은 물을 마시지 않았다.
“오딜…….”
“난 괜찮아. 아가씨나 마셔.”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