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75화 (175/189)

175화

은색의 욕망. 검은색의 죽음. 사비나의 몸에 깃들어 있던 저주의 주술이 사라지고, 그녀의 몸이 새하얘졌다. 예전처럼 창백한 색이 아닌, 새살이 돋아난 것처럼 뽀얀 살결이었다.

“사비나 아가씨. 정신이 드십니까?”

“응…….”

고운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가, 다시 깊은숨을 내쉬며 눈을 깜박였다. 에르잔의 품 안에서 몸을 움찔거리던 사비나는 문득 제 몸을 감싸고 있는 옷자락에서 익숙한 체취가 나는 것을 알아차렸다. 언제 덮어 준 것인지, 에르잔의 로브가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에르잔. 이 옷…….”

“죄송합니다, 사비나 아가씨. 교회로 돌아가면 새로 옷을 마련해드릴 터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옷 내가 빌려주는 건데 뭘 네가 마련을 하니 마니 그러는 거야?”

에르잔의 말에 토를 달며 카밀라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진흙투성이인 얼굴을 앞치마로 닦고는 치마 밑단을 죽 찢어 사비나의 목에 목도리처럼 둘러 주었다.

“사비나. 일단 이거라도 두르고 있어. 목이 휑하면 감기 걸려.”

“카밀라…….”

“설마 벌써 걸린 건가? 얼굴이 빨갛네.”

카밀라가 자연스럽게 사비나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사비나는 제 이마에 카밀라의 손이 닿는 순간 흠칫 굳었다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제야 안도했다.

‘이제는 정말로, 내게 닿아도 괜찮은 거야…….’

욕망에 의해 가로막힌 것이 아니다. 사비나가 가장 마지막으로 흡수한 욕망의 저주는 목걸이가 파괴되었을 때 가장 먼저 흘러나왔으니까.

그다음으로 빠져나온 것이 네 개의 핵을 합쳐서 만든 검은 구체. 정화의 힘마저 막아 내는 아주 강력한 주술.

그다음으로 빠져나온 것이 죽음의 저주였다.

“끝이 없는 줄 알았는데, 고갈되기도 하는구나…….”

“응? 뭐가?”

“아니면 밖으로 흘러나올 힘이 없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사비나는 아무것도 없는 제 목 언저리를 쓰다듬었다.

재생한 사비나의 몸에서는 더 이상 죽음의 저주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주술도구가 파괴되면서 일어난 폭발로 통제력을 잃은 저주가 모두 알렉세이에게 넘어간 탓인지, 한 번 저주로 물들었던 몸이 재생하면서 힘의 우열관계가 뒤바뀌어 죽음의 힘을 무의식중에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생명의 힘에 완전히 짓눌려 이제 더는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비나의 몸에서 더는 죽음의 기운이 흘러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나를 짓누르던 저주가 더는 느껴지지 않아요.”

“뭔지는 몰라도 폭발에, 불꽃에 하여튼 엄청났으니까.”

카밀라는 사비나를 격려하듯 어깨를 토닥여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뒤에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던 네나뷔스테의 심각한 표정이 살짝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네나뷔스테…….”

“그렇게 걱정스러운 표정 짓지 마. 이젠 널 공격할 생각 없으니까.”

“그게 아니라, 당신 손이…….”

사비나의 지적에 네나뷔스테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얼른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양팔의 화상 자국은 옅어졌지만, 네나뷔스테의 손바닥에는 날카로운 것에 베인 자국이 가득했다. 칼날 부분만 남은 오딜의 단검을 맨손으로 쥐고 검은 구체를 내려찍지 않았던가. 당시에는 자신과 제 동생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알렉세이를 둘러싼 구체를 부숴야 한다고 생각해서 아픔 같은 것은 느낄 여력이 없었는데, 일이 끝나고 사비나의 지적을 받고 나니 벌써 피가 멎어 딱지까지 진 손이 욱신거리는 게 느껴졌다. 네나뷔스테가 불쾌한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까진 괜찮았는데, 네가 말하니까 갑자기 아파 오기 시작했어.”

“네나뷔스테. 그 소리, 꼭 사비나를 탓하는 것처럼 들린다?”

“탓하는 것처럼이 아니고 탓하는 거 맞아.”

“야! 넌 지금 상황에서도……!”

“카밀라. 진정해요.”

네나뷔스테에게 한 소리 하려는 카밀라를 만류하고, 사비나가 주춤거리며 일어났다. 에르잔은 사비나를 안아서 부축하려 했지만, 사비나는 에르잔의 팔을 밀어내고 네나뷔스테에게로 다가갔다.

“네나뷔스테. 손을 보여 주세요.”

“내가 왜?”

“손이 다친 상태로는, 당신 동생들을 돌보는 것도 불편하지 않을까요?”

사비나의 입에서 동생들 이야기가 나오자, 네나뷔스테는 당황했는지 어깨를 움찔 떨었다가 뻣뻣하게 손을 내밀었다. 사비나는 네나뷔스테의 상처를 건드리지는 않고, 그 위를 가볍게 살짝, 스치듯이 손끝으로 건드렸다.

상처가 아물었다.

“어?”

소리를 낸 것은 카밀라 쪽이었다. 네나뷔스테가 눈을 크게 떴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는지, 두 여자는 멀쩡해진 손을 앞뒤로 뒤집어 보고는, 다시 사비나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지금 네가 내 손을 치료한 거야?”

“치료는 당신 몸이 한 거예요.”

“뭐?”

“예전에는 회복이 빨랐잖아요, 네나뷔스테도.”

마을이 저주에 잠겨 있었을 때. 시간이 멈춰 있을 적에는 아무리 다쳐도 금세 회복이 되고는 했다. 카이라트가 연구했던 불로불사의 주술. 네 개의 핵을 나누어 두었기에 힘이 약화되기는 하였으나, 주술은 그때 이미 시간이 멈춰 나이를 먹지 않는 <불로>에 이어, 죽지 않으면 얼마든지 회복하는 <재생>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내 몸에 또 주술을 걸었다는 거야?”

“한번 버텨 냈으니까, 부작용은 없을 거예요.”

생명의 주술. 재생의 힘이라고 하여 만능은 아니다. 죽음을 뛰어넘는 강력한 주술이니만큼 저주에 준하는 위험성도 있다. 아마 마을이 저주에 잠식되었을 때, 이 생명의 주술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은 전부 죽어 버렸으리라. 나자예프가 말했던, 뼈가 뒤틀리고 내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왔음에도 곧바로 죽지 않고 몇 날 며칠을 괴로워하다 죽었다는 이들은 바로 그 생명의 주술에 의해 억지로 목숨을 이어 가다가 끝내 저주를 통제하지 못하고 죽었던 것이리라.

사비나는 바닥에 쓰러진 알렉세이의 주검을 바라보았다. 온몸에 욕망의 거울 조각이 꽂힌 채 몸을 웅크린 알렉세이의 모습은 사람의 시체라기보다는 마치 버려진 욕망의 찌꺼기가 뭉쳐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장소를 옮기는 게 좋겠어요.”

***

에르잔은 바르셀다를, 페고라는 오딜을, 네나뷔스테와 카밀라는 다른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서쪽 교회로 돌아왔다. 아페티트는 카림이 부축하고, 카이라트는 부축하는 이도 없는데 스스로 기어왔는지 교회 문 앞에 손톱이 피범벅이 된 채로 엎어져 있었다.

사비나는 바르셀다를 비롯하여 마을 사람들이 입은 크고 작은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치료가 아니라 재생능력을 활성화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예전처럼 순식간에 회복되는 현상을 눈으로 목도한 이들은 더 이상 사비나를 경계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경계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치료가 끝났을 때는 이미 해가 서쪽으로 훌쩍 넘어간 뒤였다.

나자예프는 몸의 반쪽이 저주로 검게 물들어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몸도 사비나가 치료해 주는 줄 알고 반색했으나, 그의 몸에서 저주를 제거하는 일은 에르잔이 맡았다. 전신화상을 입을까 봐 허우적거리며 도망치는 나자예프를 붙잡고 에르잔은 묵묵히 저주를 뜯어냈다. 능력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으니 네나뷔스테 때처럼 불에 탈 위험은 없다는 데도 엄살쟁이인 나자예프가 내내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에르잔은 결국 나자예프의 뒷목을 쳐 기절시키고 정화를 끝냈다.

***

기절했던 나자예프가 깨어난 것은 벌써 해가 한참 떨어지고도 난 이후, 치료받은 마을 사람들이 다들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고 넓은 미사실에 그를 감시하는 동생만이 남아 침묵을 공유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아야야. 에르잔, 이 자식이 진짜 매너 없게…….”

“지금 누가 매너를 말하는 거야?”

바르셀다의 지적에 있는 엄살, 없는 엄살을 다 부리던 나자예프가 눈을 번쩍 떴다.

“바르셀다. 너 멀쩡해졌다?”

“그 여자가 채료해 줬어.”

“그 여자? ……사비나?”

생각해보니 사비나가 제일 먼저 치료했던 것이 바르셀다였던가. 나자예프는 자신이 기절하기 전에 있었던 일을 잠시 떠올렸다가, 얼른 고개를 털고 눈을 부릅떴다.

“바르셀다, 사비나한테 그 여자라니 너무하는 거 아니야?”

“여자를 여자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불러.”

“야! 사비나는…… 사비나는……!”

나자예프는 바르셀다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일갈했다.

“내가 말했잖아! 우리가 마땅히 사랑해야 하는…… 우리 조카라고!”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황당하다는 듯한 바르셀다의 반응에 나자예프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결국 말하고 말았구나, 하고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바르셀다. 전에는 네가 알렉세이 형을 너무 무서워해서, 공포심에 괜히 사비나한테 해코지할까 봐 말을 못 했는데…… 이제는 말해야겠어. 사비나는 사실 알렉세이 형과 올가 사이에 낳은 딸이야.”

“형, 미쳤어? 그게 무슨 헛소리야?”

“알아, 이 형도 네 마음 이해해.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

“아니, 인정하고 말고의 차원이 아닌데.”

“하지만 어쩌겠어? 형은 죽었잖아. 사비나한테 보복은 하지 마.”

“보복 같은 거 안 해.”

“그래그래. 너도 이제 좀 철이 들었구나. 알지? 사비나도 피해자잖아. 삼촌인 우리가 안 감싸 주면 누가 감싸 주겠어?”

나자예프는 바닥에 몸을 비비적거리며 아직도 채 가시지 않은 실연의 슬픔을 떨쳐 내려는 듯 애타게 사비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 나자예프를 바라보는 바르셀다의 눈빛은 마치 후식으로 나온 나무열매를 한 입 깨물었더니 벌레 먹은 자국이 가득한 것을 보는 사람처럼 떫은 표정이었다.

“그게 아니라, 알렉세이 형이 왜 거기서 튀어나와?”

“으응?”

“올가 누나가 낳은 아이는 로스카옌 신부님의 딸인데.”

“……뭐?”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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