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74화 (174/189)

174화

사비나는 죽을 수 없었다.

목을 졸라도, 눈을 찔러도, 자해를 하고 상처를 헤집어 엉망으로 만들어 놓아도 며칠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하게 회복되었다.

죽음의 화신이라서, 계속해서 죽음을 흩뿌려야 하는데 죽어 버리면 더는 저주를 걸 수 없으니까.

사비나는 자신이 죽지 않는 이유를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단지 계속해서 저주를 쏟아 내기 위해 화신의 몸이 필요한 거라면, 불사일지언정 상처가 빨리 나을 이유가 없는데.

사비나는 죽지 않을 뿐, 고통은 느낀다. 목을 조르면 숨이 막혔고, 칼로 피부를 가르면 불꽃 같은 통증이 상흔에서 피어올랐다. 물에 빠졌을 때는 어떠한가. 심장이 머리에서 뛰는 것처럼 쿵쿵거리는 데다,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압력이 쏟아져 눈앞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 않은가.

<인간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일종의 생존본능입니다. 위험하니까 피하라는 경고나 마찬가지지요.>

어차피 죽지 않는다면, 불사신이라면.

상처가 낫지 않고, 몸이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썩어 문드러질지언정 목숨만 붙어 있어도 저주를 계속 쏟아 내는 데에는 문제가 없지 않은가?

어떠한 상처도 금방 회복되는 재생능력을 부여하는 것보다, 차라리 고통을 느끼는 감각신경을 제거하는 쪽이 간편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죽음의 화신인 사비나는 왜, 단지 <불사>가 아니라 <재생>의 능력까지 갖추게 되었을까.

감각신경을 파괴하는 쪽이 물리적으로도 훨씬 간편한데, 왜 굳이 평범한 사람처럼 고통을 느끼는 몸을 유지하려 했을까.

욕망의 화신인 아페티트는 욕망에 잠식되어 버렸는데.

죽음의 화신인 사비나는 어째서 죽음에 물들지 않았는가.

다른 주술사처럼 능력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스치기만 해도,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병들어 죽어 갈 정도로 무한히 저주를 쏟아져 나왔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비나는 자신이 저주의 능력을 조절하지 못하는 이유를, 한 번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주술사가 아니니까, 억지로 만들어 낸 저주의 화신이니까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에르잔. 한 번에 두 가지 일 잘 못 하죠?>

주마등도 무엇도 아닌 과거의 광경이, 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검은 숲속에서, 자신과 에르잔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에르잔은 내 호위기사고, 나를 지키겠다고 말했지요? 나를 상처 입히지 않는 데 온 신경을 기울이느라, 다른 곳에까지는 신경이 미치지 못한 거예요.>

과거의 사비나가 에르잔에게 해 주었던 말.

그 말이 유달리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들렸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과거의 <사비나>는 어느새 사비나를 보고 있었다.

지금의 자기 자신을.

<에르잔이 나를 지키느라, 다른 저주받은 것들을 전부 불태워 버렸던 것처럼. 나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한 창백한 여인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 몸이 죽지 않도록 보호하느라, 무작정 죽음을 밀어내는 것밖에 하지 못했던 거야.>

저주가 계속해서 화신을 공격하니까. <죽음>이 계속해서 사비나의 몸을 집어삼키려 하니까. <생명>은 그녀를 지키느라, 상처를 회복하느라, 그녀를 덮치는 죽음을 막아내느라 <죽음>을 몸 밖으로 밀어낸 것이다.

그래서 술자의 내부로부터 떠밀려 나온 죽음은 통제력을 잃고, 거기에 닿은 사람의 몸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고, 불린 이름에 깃들어 병을 생산하며, 피 묻은 초상화가 기억하는 그림 속 주인공의 모습에 저주를 내리는 것이다.

<사비나. 너는 정말 완벽한 아이로구나.>

사비나가 수많은 저주를 받아들이고도, 죽지 않고 살아난 순간 알렉세이가 건넸던 말.

그 진짜 의미를 깨달은 순간, 늪처럼 깊은 죽음을 불태운 생명의 불길이 사비나를 집어삼켰다.

***

“사비나 아가씨, 아가씨!”

“에르잔, 그만해! 그러다가 사비나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에르잔이 사비나를 향해 손을 뻗을수록 새카맣게 변한 그녀의 몸은 반대쪽으로 슬슬 밀리기만 했다. 안 그래도 옷이 해져서 바닥에 살이 쓸릴 텐데, 이러다가 어디 부딪히거나 굴러떨어졌다간 정말로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카밀라는 에르잔의 팔을 붙잡고 끌어내려 애썼다. 물론 두 사람의 완력은 비교가 되지 않았기에 카밀라의 만류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사비나 아가씨. 어째서 저를 밀어내시는 겁니까? 제가 정화해 드려야 하는데, 어째서……!”

분명 처음 나자예프가 끌어냈을 때는 에르잔의 품에 안겨서 제대로 정화를 받을 수 있었는데, 가슴에서 자라난 말뚝이 다시금 그녀의 몸에 뿌리를 내린 뒤에는, 보이지 않는 보호막 같은 것이 둘러져 에르잔을 밀어내는 듯했다.

에르잔만을.

“사비나! 살아 있지? 내 목소리 들리면 대답해!”

카밀라는 숨조차 쉬지 않는 사비나를 향해 외쳤다.

“사비나, 그 저주를 빨리 흡수해! 저주라면 뭐든 흡수할 수 있다며! 에르잔을 튕겨내는 그걸 빨리 거두란 말이야!”

카밀라의 외침에도 사비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미동조차 없는 사비나의 모습에 카밀라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알렉세이는 죽었는데. 저주의 구체는 사라졌는데. 왜 다시금 저주의 결계가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비나를 둘러싼 저주가 정화의 힘을 밀어내는 것만은 분명했다.

만약 저것이 알렉세이를 보호하던 저주와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다면, 평범한 사람은 사비나의 몸에 손을 대는 순간 썩어 들어갈 것이다.

“사비나, 방법을 알려 줘! 그래야 우리가 널 위해 뭐라도 할 거 아냐!”

“내가 해 볼까?”

에르잔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린 카밀라의 뒤에서, 얼굴부터 발끝까지 딱 절반만 새카맣게 변한 나자예프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나는 그 구체 안에도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사비나 가슴에 박힌 말뚝을 뽑아낼 수 있지 않을까?”

“닥쳐, 나자예프! 너는 말뚝 뽑는 척 사비나 가슴 만지는 게 목적이잖아!”

“야! 내가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을 할 것 같아?”

“안 하겠지! 너는 생각이 없으니까!”

카밀라의 지적에 억울해진 나자예프가 항변하자, 성큼 다가온 네나뷔스테가 나자예프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으악!”

“저주로 만들어진 거울은 찔러 넣을 수 있었잖아. 이걸로 한번 해 보지 뭐.”

“네나뷔스테. 나를 도구 취급하지 말아 줄래?”

“닥치지 않으면 팔만 뽑아 버리는 수가 있어.”

네나뷔스테의 협박에 나자예프가 합 입을 다물었다. 나자예프의 머리채를 잡은 손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와 검은 머리카락을 적셨다. 손바닥이 칼과 거울 조각에 베여 엉망이었으나 네나뷔스테는 자신의 손 상태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녀의 자주색 눈동자는 황망한 표정으로 사비나만을 바라보는 에르잔에게서, 먹물에 푹 담가 놨다 꺼낸 인형처럼 전신이 까맣게 물들어 누워 있는 사비나에게로 향했다.

‘오딜 아저씨의 팔도 날아가고, 칼자루도 산산조각이 나 버렸는데…… 칼날만은 닿았지.’

무딘 칼날이었는데, 욕망의 거울을 깨뜨린 순간 은색의 저주가 감겨들어 날카로운 검날로 바뀌었다. 욕망의 저주로 둘러싸인 칼날은 알렉세이에게 닿았다.

그리고 조각낸 욕망의 거울조각도, 알렉세이를 보호하는 검은 구체를 뚫고 날아가 그의 몸에 박혀 들었다.

“나자예프. 너, 오른손 움직일 수 있어?”

“아니. 그런데 사비나한테 닿으면 움직일 것 같아. 저주의 구체 안에 들어간 순간부터 오른팔이랑 다리가 움직였거든.”

네나뷔스테는 휘어잡고 있던 머리채를 놓고, 나자예프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켁, 네나뷔스테! 숨 막혀!”

“입 다물라고 말했어.”

“네가 먼저 물어봤잖아!”

“어차피 움직이지도 않는 팔인데 뜯어낼까?”

네나뷔스테의 협박에 나자예프는 다시 얌전해졌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나자예프의 멱살을 잡고, 왼손으로 나자예프의 새카만 오른팔을 붙들었다. 인형처럼 덜렁거리는 새카만 팔이 꼭 나무토막 같았다.

저주로부터 벗어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나자예프는 몸의 절반이 저주에 물든 상태였다. 왜 그런 거냐고 물어봐도 나자예프는 <아픈 첫사랑의 흔적>이라는 도움도 안 되는 말만 했기에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저주는 더 강한 저주에 이끌린다고 로스카옌이 그러지 않았던가. 나자예프가 사비나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저주에 물든 그의 팔이 사비나의 가슴에 꽂혀 있는 말뚝에 가 자석처럼 달라붙을 것이다. 그럼 그것을 뽑아내면 된다.

‘반대로 나자예프의 팔이 뽑히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고.’

당사자인 나자예프가 들었더라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칠 법한 생각을 태연하게 하면서, 네나뷔스테는 나자예프를 데리고 사비나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네나뷔스테가 나자예프의 팔을 움직여 사비나에게 가까이하기 직전, 그녀의 가슴에서 불길이 일어나더니, 말뚝을 흔적도 없이 태워 버렸다.

“어!”

누구의 외침이었을까. 놀란 두 사람이 동시에 낸 소리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카밀라가 낸 소리일지도 모르고, 에르잔이 낸 소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사비나의 몸에서 일어난 붉은 불길이 검은 말뚝을 태우고, 그녀의 몸까지 집어삼키더니, 검게 물들기 전의 원래 상태로 변한 사비나를 남겨 놓고 재와 함께 사라졌다.

사람을 불에 태워 까맣게 만든다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싶은 상황에서 순서만 거꾸로 뒤집어놓은 듯한 일이 일어났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저런 주술은 들어 본 적도 없다. 그러나 모두의 눈앞에서 일어난 현상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사비나가…… 다시 하얘졌어!”

“눈 감아, 나자예프!”

옷까지 홀라당 타 버려 알몸이 된 사비나를 난봉꾼의 시선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듯, 네나뷔스테가 나자예프의 턱에 주먹을 날렸다. 손으로 눈을 가렸으면 되는 거 아니냐는 항변의 말은 혀와 함께 씹혀 버렸다. 애벌레처럼 엎어진 나자예프를 뒤로하고 네나뷔스테는 사비나에게로 뛰어가 앞치마를 찢어 그녀의 몸에 덮어 주었다. 검뎅이 묻어 지저분해진 앞치마가 아주 약간이지만, 올라왔다가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사비나가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야, 너! 살아난 거야? 살아 있으면…….”

“……사비나 아가씨!”

네나뷔스테의 말을 가로막으며 뛰어든 에르잔이 사비나를 안아 일으켰다. 에르잔의 팔에 매달려 있던 카밀라가 뒤로 나동그라지면서 나자예프의 허리를 걷어찼다. 나자에프는 비명을 지르며 반대로 엎어졌고, 카밀라는 진흙투성이가 된 얼굴을 닦는 것도 잊고 엉금엉금 기어서 사비나에게로 가까이 왔다.

“사비나! 정신이 들어? 사비나!”

닫힌 눈꺼풀 아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검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득할 정도로 깊은 눈동자가 햇살을 담고 있었다.

“에르잔…….”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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