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73화 (173/189)

173화

“구하지 못했고, 사랑한 적 없어. 그게 진실이에요.”

사비나의 목소리도 낮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알렉세이라면 분명 알아들었으리라. 그의 거친 숨소리가 멈추는 것이 들렸으니까.

어쩌면 들린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비나는 알렉세이의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자신의 말을 확실히 알아들었음을 느꼈다.

그런 것을 보면 통제를 잃고 폭주하는 저주라도 술자로부터 출발해 대상을 파괴하고 다시 술자에게로 돌아온다는, 지극히 근본적인 특성은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물론 저주를 내린 것은 사비나가 아니지만, 날뛰기 시작한 주술은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 최초의 주술사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사비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저주가 제 몸을 갉아먹는 것을 멈출 방도도 이유도 없었다. 기어이 다른 소망을 품고 나서야 겨우 제 손에 주어진 과거의 소원을 그러안고 사비나는 눈을 감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이 차츰 얕아지는 것이 느껴져, 사비나는 문득 제 몸뚱이에게 미안해졌다. 육신은 어떻게든 살아 보려는 듯 전신의 핏줄을 팽팽하게 부풀려 대며 피를 공급하는데, 그녀의 정신은 눈가가 저릴 만큼 신경을 잡아당기는 몸의 필사적인 애원에 조금도 응할 마음이 없으니.

“사비나 아가씨!”

고통은 점점 멀어지는데, 자신을 부르는 에르잔의 목소리는 점점 선명하게 들려온다. 어째서일까. 죽기 직전에는 청력이 강해지기라도 하는 걸까?

눈앞에서 황금색의 빛이 번쩍이고, 새까맣게 흐려졌던 시야가 눈부신 흰 빛으로 뒤덮였다. 사비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가, 눈꺼풀을 깜박여 시야를 정리하고 다시 눈을 떴다.

에르잔의 얼굴이 보였다.

“에르잔? 무슨…… 앗!”

“사비나 아가씨, 조심하십시오! 아직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어깻죽지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더니, 사비나의 동그란 어깨가 불에 덴 듯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에르잔이 저주를 정화하고 있는 걸까?

사비나는 온몸이 저주에 먹혀 까맣게 물든 상태였다. 에르잔이 사비나에게 접촉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를 둘러싼 저주는 상당 부분 알렉세이에게로 넘어간 듯했으나, 저주의 힘이 약해졌다고 하여 저주가 아니게 된 것은 아니다. 정화의 불꽃으로 저주를 태운다면 사비나는 전신에 화상을 입고 죽게 될 것이다.

“에르잔. 그만해요. 내 몸은…….”

“사비나 아가씨. 죄송하지만 말씀을 삼가 주십시오. 집중해야 합니다.”

에르잔은 상처 난 곳을 건드리지 않으려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어차피 헛수고일 텐데. 저주에 먹혀 죽으나 전신에 화상을 입고 죽으나 그게 그거 아닌가. 사비나는 에르잔의 필사적인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죄스러워 눈을 감으려다가, 에르잔의 단단한 손끝이 손가락 사이의 여린 살 부분을 문지르는 감각에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눈을 크게 떴다.

몸을 가리는 용도로 대충 두르고 있었던 담요는 너덜너덜해져서 팔 아래로 헐렁하게 늘어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 그 사이로 보이는 가느다란 팔이 이상했다.

저주에 먹혀 까맣게 물들었을 제 팔이 희게 빛나고 있었다.

“에르잔? 어떻게…….”

“사비나 아가씨, 제발……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실수하면 아가씨 몸에 상처를 입힐지도 모릅니다.”

에르잔이 간절한 얼굴로 사비나를 달래며 그녀의 몸을 감싼 천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옆구리와 골반을 더듬어 허벅지로 내려가는 커다란 손이 느껴졌다. 몸을 섞을 때와는 달리 아주 가볍게, 마치 솜털만 스치는 듯한 움직임에 사비나는 문득 간지러움을 느꼈다. 그녀의 몸을 검게 물들였던 저주가 파스스 흩어지고, 맨다리가 드러났다. 에르잔은 천을 끌어 내려 사비나의 몸을 가리고는 무릎에서 정강이까지 아주 천천히 쓸어내렸다.

검게 그을렸다기보다는 꼭 먹물에 담갔다 꺼낸 것처럼 새카맸던 다리 위로 그의 손이 지나가자, 금색 빛이 어른거리더니 꼭 표백이라도 한 것처럼 흰 종아리가 드러났다.

‘에르잔. 조절을 할 수 있게 되었구나…….’

단지 저주를 공격하지 않는 것뿐만이 아니라, 저주에 물든 대상을 저주로부터 분리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저주받은 대상으로부터 저주를 분리해 내, 본체에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고 저주만을 끌어내 지우는 정화의 힘.

아마도 사비나를 애지중지하는 데 온 신경을 쏟지 않았더라면, 더 빨리 개발할 수도 있었을 그만의 특수한 능력.

콘바야젠 가문에 주술사가 없었던 이유.

주술사 없이도, 자신의 가문과 영지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

단지 그 자신이 저주를 피하는 것뿐만 아니라, 저주에 물든 자를 구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사비나의 얼굴과 팔다리, 허리까지 저주를 벗겨 낸 에르잔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도록, 그녀의 몸을 제 몸으로 가리듯이 감싸 안았다. 가슴을 가리고 있던 천 사이로 커다란 손이 들어왔다. 성적인 의도가 섞인 것은 아니었다. 에르잔은 그저 사비나의 몸이 저주에 삼켜지지 않도록 정화하고 있을 뿐이니까.

그러나 에르잔의 손이 사비나의 가슴을 감싸려던 순간, 뭔가가 그의 손을 밀어냈다.

“아윽!”

“사비나 아가씨!”

심장 부위에서 급작스럽게 느껴진 통증에 사비나가 신음하자, 에르잔은 얼른 손을 빼고는 사비나의 몸을 바로 눕혔다. 가슴을 가리던 천을 안쪽에서 뭔가가 밀어젖히듯이 팽팽하게 솟아나더니, 옷섶 사이로 검은 머리를 내밀었다.

“헉……!”

“으악! 저게 뭐야?”

에르잔의 뒤에서 나자예프의 경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카밀라가 나자예프를 밀어내고 얼른 머리를 들이밀었다가, 뭔가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비명을 질렀다.

사비나의 가슴 사이에 커다란 말뚝이 박혀 있었다.

아니, 밖에서 안으로 꽂은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자라난 것이니 말뚝을 박았다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을까.

검은 뱀도, 날카로운 가시도, 환영을 보여 주는 분신도 은색의 거울도 질척한 진흙도 아닌, 마치 암석으로 만든 듯한 새까만 말뚝은 누워 있는 사비나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커다랬다.

‘이것이, 완성된 저주구나…….’

누군가 알려 준 것은 아니다. 추측하거나 넘겨짚은 것도 아니다. 막연히 알게 되었다. 깨달음이라고 할까. 주술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비나는 제 심장에서 솟아난 거대한 말뚝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저주.

에르잔의 정화의 힘마저 밀어내는 저주.

욕망, 분노, 증오, 체념으로 나뉘어 있던 네 개의 핵을 하나로 그러모았을 때, 만들어지는 저주의 최종 형태.

“사비나. 너 가슴에…….”

“만지면 안 돼!”

카밀라가 사비나를 향해 손을 뻗으려 하자, 어디선가 카이라트의 외침이 들려왔다. 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기도 전에 시야가 다시 까맣게 흐려졌다.

처음 저주가 폭주했을 때는 피부가 서서히 검어졌는데, 사비나가 카이라트의 외침을 인지한 그 짧은 사이에 에르잔이 정화했던 사비나의 몸은 다시 새까맣게 물들었다.

“사비나 아가씨!”

경악하는 에르잔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명 소리는 카밀라의 것일까. 나자예프가 뭐라고 절규하는 것 같으나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심장에서 자라난 말뚝이 마치 살기 위해 몸부림치듯 이상한 소리를 내며 그녀의 몸 안에 뿌리를 내렸다. 마치 핏줄 안으로 진흙을 욱여넣는 듯한 그 감각의 정체가 무엇인지 사비나는 알 수 있었다.

15년 전, 여덟 살의 그녀가 산 채로 죽음을 느껴 가며 받아들여야 했던 저주도 이와 같았다.

죽음의 저주다.

‘역시 안 되는구나.’

저주의 힘이 약해지면 에르잔의 정화의 힘이 통하지 않을까 했는데, 아무래도 약해진 것은 알렉세이에게로 되돌아간 <반동>뿐이었던 것 같다.

사비나의 몸속에 자리한, 네 개의 핵을 흡수해 하나가 되어 버린 저주의 완전체는 사라지지도, 약해지지도 않았다.

에르잔의 정화 능력으로도 사라지지 않고, 마치 보란 듯이 그녀의 몸을 다시 죽음으로 이끌었다.

‘에르잔. 미안해요. 기껏 열심히 정화해 줬는데…….’

입술을 움직여 말하고 싶었는데 감각이 멀었다.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아마 입 밖에 내지도 못한 듯했다. 사비나의 머릿속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어지럽게 얽혀 들었다.

하늘 높이 치솟는 검은 연기와 붉은 불꽃이 나무로 지어진 집을 삼키는 소리. 기둥이 부러지고 지붕이 내려앉아, 거기에 딸린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도 않는, 8살 때의 그 풍경.

제 세상의 전부였던 곳이 불에 타 사라지고, 그녀를 안아 주던 포근한 품을 다시는 느낄 수 없게 되었을 때의 기억.

불에 휩싸여 빨갛게만 보이는 풍경이 차츰 줄어들더니 네모난 액자에 넣은 그림처럼 작아졌다. 모르는 이들의 손에 이끌려 마차에 실려 가던 당시 보았던 창밖의 광경이다.

‘싫어, 엄마…….’

어린아이의 울음소리. 시끄럽다며 구시렁거리던 소리. 아이의 입을 틀어막던 투박한 손. 눈가를 적시는 뜨거운 물기와 불안하게 뛰는 심장 소리.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던 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그녀의 몸을 지배했다. 주마등이라는 걸까. 사비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광경은 온통 끔찍한 것들뿐이었다.

죽어 가는 이의 부릅뜬 두 눈. 기이한 울음소리. 헐떡이는 숨소리. 숨길 수 없는 역겨운 악취가 사비나의 주위를 에워쌌다.

사비나는 어둠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죽을 때만이라도 행복한 기억을 보여 줄 수는 없는 걸까. 자신의 과거는 추억하는 것조차 악몽이 될 만큼 끔찍한 것들뿐이란 말인가. 사비나는 서러워졌다.

“에르잔, 에르잔…….”

이 끔찍한 광경이 다 지나가면, 에르잔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처음 저택의 1층 홀에서 만나, 마차를 타고 이 마을로 와, 오두막에서 지내던 때의 모습도 주마등으로 흘러갈까.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다시 한번 에르잔의 모습이라도 추억하고 싶었던 사비나는 핏빛으로 점철된 과거가 제 목을 졸라매는데도 의식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안간힘을 써 의식을 유지한 끝에 보이는 것은 에르잔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람을 저주해 죽이는 주술은 존재하지만,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주술은 존재하지 않지요.>

언젠가 카이라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데, 그가 건넨 말이 마치 주문처럼 뇌리에 박혀 왔다.

<죽이는 저주는 있는데 왜 살리는 저주는 없을까. 불로불사의 주술은 없을까 고민하던 끝에 도달한 답이, 모든 주술을 섞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주술을 섞어 봤자, 만들어지는 건 죽음의 저주일 뿐이에요.”

사비나는 과거의 카이라트에게 대답했다.

수많은 색을 섞어도 만들어지는 색은 검은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저주를 거듭한다고 한들 만들어지는 것은 죽음을 벗어나지 못한다.

“생명을 만드는 주술은 존재하지 않아요.”

<제 연구는 네 개의 저주를 섞는 것이었습니다. 연결하여 균형을 맞추는 것이 아니고.>

“하지만 저주를 섞어도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았잖아요. 내가 그 증인이라고요.”

죽음의 화신으로서,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그 자신만은 죽을 수 없었던 사비나.

네 개의 핵을 흡수해 더 강력한 저주의 화신이 되고서도, 스스로는 죽을 수 없었던 사비나.

그때의 사비나는 불사신이었다.

저주의 균형이 깨져, 통제력을 잃은 저주가 날뛰어, 술자를 공격하는 지금에 이르러서야 겨우 죽을 수 있으니까.

사비나가 죽지 않았던 건, 화신을 잃으면 죽음이 더는 퍼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화신을 유지할 통제력이 사라졌으니 더는 불사의 몸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고.

“카이라트. 당신의 연구는 틀렸어요.”

<틀리지 않았습니다.>

사비나의 말에 반박하듯, 단호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화신을 공격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저주의 반동이 술자에게 되돌아오는 것처럼, 죽음은 당신을 공격했어요.>

가장 강력한 저주, 죽음.

그리고 그 죽음보다 더욱 강력한, 네 개의 핵을 사용해 만든 시간을 멈추는 주슬.

<그런데도 당신이 죽음의 저주를 품고도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건…….>

어둠 속에서, 마치 불처럼 뜨거운 것이 샘솟았다.

<사비나. 당신 안의 ‘생명’의 주술이 ‘죽음’의 주술보다 강력하다는 뜻이지요.>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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