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72화 (172/189)

172화

“나자예프…….”

“사비나도 까맣게 됐네? 저번에는 불에 탔는데, 이번에는 뭐에 물든 거야? 하하…….”

이런 상황에도 농담이 나오는지, 아니면 이런 상황이기에 농담으로밖에 마음을 진정할 수 없는 건지, 나자예프가 꼭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었다. 사비나를 안은 채로 두어 걸음 뒷걸음질 치던 나자예프는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저주의 반경을 벗어나자마자 뒤로 고꾸라졌다.

“사비나 아가씨!”

에르잔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자예프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크고 단단한 팔이 사비나의 몸을 안아 들었다. 사비나는 고개를 들 힘이 없어 눈동자만 움직여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푸른 눈동자에 보이는 제 모습이 새까맸다. 꼭 벌레처럼.

“에르, 잔…….”

“사비나 아가씨, 정신 차리십시오! 지금, 지금 정화해 드리겠습니다!”

“무슨 짓이야, 에르잔! 사비나를 홀랑 태울 셈이야?”

저주 속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도로 제 기능을 상실해 버린 오른쪽 팔다리를 질질 끌며 다가온 나자예프가 호통을 쳤다. 사비나는 두 남자의 말싸움에 신경을 쓰지 않고 한껏 부풀어 오른 검은 저주의 구체를 힘겹게 바라보았다.

저 안에 알렉세이가 있는데. 저주가 폭주해서 그 남자를 잡아먹을까? 피하고 있던 세월을 도로 돌려받은 것은 확인했지만, 과연 그 남자가 죽을까?

사비나는 알 수가 없었다.

만약 알렉세이도 사비나처럼 저주를 견딜 수 있는 체질이라면. 그래서 그 저주를 모두 다스릴 수 있게 되면 어찌하나. 아니, 차라리 저 남자가 저주의 화신이 될 운명이라면 그전에 도망칠 수라도 있지만, 만약 폭주하는 저주가 보호막을 뚫고 터져 나간다면?

“도망, 쳐요……!”

갑자기 엄습한 불안감에 눈을 크게 뜨자, 구체를 향해 다가가는 네나뷔스테의 모습이 보였다. 사비나는 제 얼굴을 감싸려는 에르잔의 손을 고개를 돌려 뿌리치고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저주가, 폭주하고 있어요! 떨어져요……!”

콜록, 사비나의 입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경악하는 에르잔의 목소리와 나자예프의 호들갑으로 주위가 소란했다.

“저기에 닿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전혀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한 네나뷔스테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비나는 가물가물한 시야 너머로 네나뷔스테가 공격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오딜 아저씨가 가기 전에 좋은 선물을 줬네.”

화상 자국이 옅어진 손에 자루도 없는 칼날이 들려 있었다. 날카로운 칼날에 손바닥이 베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네나뷔스테는 칼날뿐인 단검을 휘둘러 구체를 내리찍었다.

휘날리는 백금발 너머에서 기이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알렉세이의 비명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건, 자리에서 일어난 마을 사람들이 다들 깨진 거울 조각을 들고 구체를 향해 돌진하는 것을 본 뒤였다.

“잠깐, 만……!”

은색의 거울은 욕망의 주술. 사비나의 몸에서 흘러나온 것.

어떠한 정화의 힘도 막아 내는 완벽한 저주는 다가오는 모든 것을 저주로 물들인다.

그래서 무엇에도 정화되지 않고, 또한 무엇에도 공격받지 않는다.

하지만.

“이게 그렇게 원하던 아저씨의 욕망이야? 잔뜩 가져가라고!”

은색의 거울 조각. 욕망의 저주는 완전무결한 주술의 보호막을 너무나도 쉽게 통과했다.

아니,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안쪽에서 그것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으아아악!”

사방에서 반짝이는 은색의 날카로운 조각이 날아들었다. 누군가는 자신이 밟고 있던 욕망의 거울을 깨뜨려, 누군가는 바닥에 흐르는 은색의 욕망을 지팡이 끝에 묻혀서.

수십, 아니. 수백 개의 날카로운 욕망이 검은 구체를 향해 날아들더니, 이윽고 둥근 보호막이 터지며 사방으로 저주가 튀었다.

아니, 저주가 아닌가?

검은색이지만 그것은 분명 피였다. 바닥에 닿자마자 치이익 소리를 내며 연기가 되어 피어오르는, 저주에 잠식된 자의 피.

“으, 읏…….”

온몸에 갑옷도 아닌 은색의 조각이 잔뜩 꽂혀있는 알렉세이의 모습은 꼭 색을 잃어버린 고슴도치 같았다. 조각난 거울 사이사이로 스며 나오던 검은 피는 기화하는 속도가 흘러내리는 속도를 이기지 못한 건지, 이내 남자의 발밑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어린아이도 몸을 한껏 구부려야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그 작은 웅덩이 위로, 알렉세이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알렉세이가 움직일 때마다, 몸에 박힌 거울 조각들이 유리 깨지는 소리를 내며 부서지고 때로는 튕겨 나왔다. 그의 몸에서 튀는 피에 닿지 않으려는 듯, 마을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는 소리를 내며 그의 주위에서 멀어졌다.

누구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검은 저주의 구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터진 풍선의 조각만큼 작은 웅덩이 위에 알렉세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것은 꼭 기형으로 잘못 태어나 어미에게 버려진 짐승이 죽어 가는 모습 같았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사랑받았던 과거를 가지고 싶다는. 사소하다 못해 볼품없는 소원 하나를 위하여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악귀와도 같은 남자에게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모습.

“윽, 사비…… 나…….”

앞으로 넘어진 건지, 뒤로 쓰러진 건지. 몸에 가득 박힌 은색의 조각 때문에 몸통은 앞뒤 구분도 되지 않는 데다 목이 이상하게 꺾여 있기까지 해 알 수가 없었다. 알렉세이의 몸이 몇 번 뒤척이더니, 머리가 불쑥 솟아 나왔다. 그의 핏발 선 눈동자가 사비나를 향했다.

각막에 상처를 입었으니 눈이 보이지 않을 터인데, 핏빛의 눈동자가 정확히 그녀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 채 흔들리지 않았다. 꼭 못이라도 박아 둔 것처럼.

“사비나…… 에르잔을…… 사랑, 하지……?”

입술이 찢어진 탓에 발음이 새서 알아듣기 힘들 터인데도, 사비나는 알렉세이가 하는 말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절망에서 구원, 쿨럭! 해 줬으니까…… 사랑에 빠진 게, 맞지……?”

알렉세이가 확인하듯 재차 물었다. 죽어 가는 사람이 자신을 죽인 상대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필사적인 음성이었다. 저주나 원망의 말을 퍼부어도 모자랄 터인데, 알렉세이는 마치 소원을 비는 사람처럼 간절한 얼굴로 사비나를 보고 있었다.

“구원자, 라서…… 사랑하는 거야…… 그렇지……?”

알렉세이의 눈가에 차오른 투명한 액체가 흘러넘치더니, 피와 섞여 붉은 자국을 남기며 주륵 흘러내렸다. 분명 저주에 삼켜졌으니 바닥에 떨어지면 검게 물들었다가 기화해야 하는데, 피가 섞인 눈물은 진흙 위에 붉은 얼룩을 남기고 바닥에 스며들었다.

마치 평범한 눈물처럼.

“너를…… 내가 구했다면…….”

사비나의 모습이 보일 리 없음에도 필사적으로 사비나를 향한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사비나는 알렉세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차라리 죽기를 바랄 정도로 절망적인 삶에서 구원해 준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구원자가 어떤 사람일지라도, 그녀는 자신을 구원해 준 이와 사랑에 빠졌을 거라고.

올가가 로스카옌을 사랑한 건 그저 알렉세이보다 약간 먼저 구원의 장소에 도착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만약 알렉세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분명 올가는 알렉세이의 손을 잡았을 거라고.

알렉세이가 사비나를 에르잔과 함께 이 마을에 보낸 이유. 에르잔이 사비나와 사랑에 빠질 거라 확신한 이유. 가족의 원수라는 진실이 밝혀지더라도, 에르잔을 위해서라면 사비나가 알렉세이의 딸로 남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유.

알렉세이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겁 많은 그를 경솔하게 이 자리에 혼자 오도록 몰아붙인 감정.

수많은 사람을 해치고, 생명을 짓밟아 원망이 가득한 자리에 서서, 종래에는 그 자신마저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할지라도, 확인하고 싶었던 것.

올가의 피를 이어받은 사비나가. 콘바야젠의 피를 이어받은 에르잔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는 것.

23년 전의 과거의 기억을, 산산이 조각난 자신의 욕망을, 이루지 못했던 소원을, 원하는 모습으로 덧씌우고 싶다는 소망.

겨우 그 하나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걸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나아가 세상 전부를 등졌다. 아마 알렉세이는 그 끝이 처참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주술사가 아니라도, 예지능력이 없더라도, 명민한 그라면 자신의 선택이 불러올 미래가 결코 아름답지도 편안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그릇된 선택을 하고 만 것은 어째서일까. 그것은 필경 알렉세이가 겁이 많은 인간이기 때문이리라.

사비나는 알렉세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절대로 이해하고 싶지 않은 남자임에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그가 더 나은 미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을 조르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 자신도 겁쟁이기 때문에.

햇살 아래서 당당하게 거닐며, 타인에게 거짓 없는 미소를 띨 수 있는 용감한 이들은 결코 이해할 수도, 이해할 필요도 없는 볼품없는 소원을 보물처럼 끌어안고 있기에.

어린아이의 일기장에조차 적히지 못할 유치하고 사소한 소망에 자신의 전부를 걸 만큼 바보이기에.

“사랑하지 않아요.”

그렇기에,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다.

“그런 건 사랑이 아니에요. 난 사랑한 적 없어요.”

안개 너머로 보이지 않는 길의 끝이 절벽이라는 것을 알면서. 멈춰 서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발을 내디딘다.

안개 속에서는 아무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절벽에서 떨어지면 그 아래 사는 이들은 자신의 시체를 볼 수 있으니까.

그 죽음은 온전히 자신의 책임이다. 그러니 구원받아서는 안 된다.

알렉세이는 올가를 구하지 못했다.

사비나는 에르잔에게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

알렉세이는 올가에게 사랑받지 못했다.

사비나에게는 에르잔을 사랑할 자격이 없다.

그것이 진실.

“구하지 못했고, 사랑한 적 없어. 그게 진실이에요.”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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