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주술에는 사유하는 능력이 없다. 주술은 반드시 법칙대로 움직인다.
술자로부터 출발해, 대상을 잠식하고, 다시 술자에게 반동을 전하는 것이 저주.
그리고 술자의 각인을 새긴 주술도구를 몸에 지녀, 본래라면 술자에게로 돌아가야 했을 저주의 반동을 대신 받아 내는 것이 제물.
두 개의 주술도구가 가까워진 순간, 속이 울렁거릴 만큼 요란한 파열음이 나며 사비나와 알렉세이의 목에 걸려 있던 금줄 목걸이가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하나로 융화된 목걸이는 둥그런 구 형태를 이루었다가, 이내 사방으로 빛을 발산하며 두 사람의 몸을 꿰뚫었다.
“사비나 아가씨!”
에르잔의 고함이 멀었다.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멀게 들리는 것을 보면, 주술도구가 융화되면서 일어나는 주술적 교란은 소리를 밀어내는 성질도 있는 모양이다.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하면서, 사비나는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은 남자의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피와 땀으로 흥건했던 젖은 옷감이 어느새 버석버석하게 말라 있었다.
그 옷을 걸친 주인의 얼굴 또한, 살아 있는 사람을 미라로 만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말라 있었다.
알렉세이 미간이 좁아지며 짙은 눈썹이 일그러지더니, 경련하는 눈꺼풀 안쪽에서 뭔가 퍽,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났다. 일부러 뜬다기보다는 안에서 나오는 것에 밀려 올라간 듯이 올라간 눈꺼풀 아래서 검은 눈동자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저주의 반동을 피하기 위해 바꿔 놓은 보호각인이 빠져나오는 것이다. 나자예프의 것은 청록색이었는데, 알렉세이의 것은 검은색이었다.
“역시, 아니네요.”
억지로 잡아 뜯은 것처럼 균열이 간 각막 너머로 붉은 홍채가 보였다. 신경 써서 들여다본 적은 없지만, 보호각인이 풀린 후의 나자예프도 저 비슷한 붉은 눈이었던 것 같다. 닮지는 않았지만 형제라는 걸까. 핏발이 선 것을 제외하면 처음 바르셀다를 보았을 때와 느낌이 비슷했다.
어울리지 않게 수염만 기른 젊은이처럼 매끈하던 얼굴에 깊은 주름이 파이고, 목이 홀쭉해지더니 그 위로 주름진 턱이 내려앉았다. 미뤄 놓았던 세월을 한순간에 되찾은 알렉세이의 모습은 나자예프나 바르셀다와 비교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추했다.
“네가…….”
알렉세이의 턱이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탁한 회색이 섞여 거무튀튀하게 변한 입술이 실룩거리더니, 가래 끓는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가, 나를 속이다니…….”
몸을 끌어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는 얼굴을 돌리기도 어려웠지만, 사비나는 애초에 피할 생각이 없었다. 삽시간에 늙어 버린 알렉세이가 입을 열 때마다 그 속에서 썩은 내가 풍기는데도 사비나는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다정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제까지 그가 그래 왔듯이.
“속이지는 않았어요.”
사비나. 알렉세이와 올가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딸. 콘바야젠 가문의 주술사로, <아버지>를 보필하여 가문의 정적을 제거하는 죽음의 화신.
그런 <사비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덟 살 이후로 사비나에게는 자신의 삶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죽고, 살던 마을에서 끌려 나와, 알렉세이 오브만 콘바야젠이라는 남자를 만난 그 순간부터.
그녀는 내내 알렉세이의 환상 속, 존재하지 않는 <사비나>의 대신이 되어 살아야 했으니까.
이제 그것을 떨쳐 낼 뿐이다. 토할 정도로 꾸역꾸역 밀려들어 오던 자신이 아닌 저주스런 시간을, 제공자인 알렉세이에게 돌려줄 뿐이다.
“거두어 가세요, <아버지>. 당신의 딸이잖아요.”
모든 저주를 섞어 만든 가장 강력한 주술, <죽음>.
그러나 사비나는 죽음의 화신임에도 불구하고, 욕망의 화신인 아페티트보다 힘이 약했다. 실제로 능력을 겨루어 본 적은 없기에 그저 추측일 뿐이지만, 사비나는 몇 번이나 아페티트가 보여 준 환상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죽음의 화신보다 강력한 욕망의 화신.
그 욕망의 화신을 가두기 위해, 마을 전체를 봉쇄하는 시간을 멈추는 주술.
사비나는 네 개의 핵을 흡수한 뒤에야 아페티트의 <욕망>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가장 강력한 저주는 시간을 멈추는 주술일 터.
그 강력한 주술로부터 알렉세이를 보호하던 두 개의 주술도구가 하나로 뭉쳐진 순간부터, 통제를 잃고 폭주하기 시작한 저주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비나 아가씨!”
또다시 에르잔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뭔가 쿵, 하로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사비나와 알렉세이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것이 에르잔이 사비나를 구하러 뛰어들려다가 저주에 밀려 튕겨 나간 충격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잠시 후였다.
“당신 말대로네요. 어떤 정화의 힘도 닿지 않는, 완전무결한 저주.”
다행이었다. 에르잔이 폭주하는 저주에 뛰어들었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통제력을 잃은 저주가 날뛰는 와중에도 정화의 힘을 튕겨 내는 특성은 잃지 않은 모양이다.
“생각한 대로 돼서, 기뻐요.”
“으, 윽…….”
“당신도 기쁘죠? 상상하기만 했던 것이 현실에 나타났잖아요.”
주름 가득한 거죽 위로 핏발이 울뚝불뚝하게 솟아오르더니, 눈가가 팍 하고 터지며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사비나는 알렉세이가 분노로 망가져 가는 모습을 태연하게 구경했다.
이제까지 수없이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살이 썩어 문드러지고 뼈가 무른 반죽처럼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면서 울기만 했는데.
처음으로 아주 편한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저주에 물들어 망가져 가는 사람을 보면서, 이토록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당신의 <사비나>는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딸이지만, 나는 아니거든요.”
“네가, 네가…….”
“사비나는 이제 없어. 죽음의 화신도. 콘바야젠 가문의 주술사도.”
창백한 피부에 마치 꽃이 피듯이 붉은 반점이 올라와 점점 커지더니, 이내 검은색이 되어 사비나의 온몸을 뒤덮었다.
“헉……!”
삶에서 죽음까지 이어지는 시간. 불사신인 사비나에게는 그 시간이 무한하여 존재하는 의미가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하게 늘어난 사비나의 생명선 한중간에 시간을 멈추는 주술이 묵직하게 드리워졌다. 그리고는 어울리지 않게 예리한 칼을 빼 들어 끝없이 이어지는 선을 잘라냈다.
제아무리 무한히 늘어날 수 있는 생명선일지라도, 팽팽하게 당겨진 상태에서 싹둑 잘려 버리면 형체를 유지하지 못한다. 너무나도 멀어 보이지 않던 <끝>이 사라지고, 날카롭게 잘려나간 자리가 새로운 <끝>이 되어 마치 끊어진 고무줄이 수축하듯 사비나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숨이 턱 막혀 왔지만 사비나는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숨을 멈추고 눈을 부릅뜨니 알렉세이의 핏빛 눈동자에 새까맣게 물들어가는 제 모습이 비쳤다. 분노와 공포로 일그러진 남자의 눈빛을 마주한 사비나는 희열을 느꼈다.
‘아. 드디어, 내가!’
미래를 예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주술도 저주도 통하지 않는 완벽한 저주의 화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집어삼키는 죽음을 부리면서도, 정작 자신만큼은 죽을 수 없던 지긋지긋한 불사신.
그것이 드디어 사라진다.
죽을 수 있다. 사비나도 죽을 수 있었다.
사비나는 검은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입과 귀에서 피인지 체액인지 모를 것들이 주르륵 흘러나와 기화하는 느낌이 섬뜩한데도 기꺼웠다. 그토록 없애고 싶어 했던 자신의 모습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질식할 정도로 그녀를 짓눌러 대던 죄업의 흔적이 증발하고 있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의 있을 자리를 빼앗아 버렸다는 끔찍한 진실이 눈앞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에르잔. 당신은 나 같은 걸 주인으로 삼아선 안 됐어요…….’
실제로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과거를 날조한다고 하여 진정 과거가 바뀌는 것은 아닐 테니까. 하지만 사비나는 그래도 좋았다. 죽는다고 하여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시야를 뒤덮는 어둠 속에서 평온을 느꼈다. 온몸을 칼로 쑤시고 피부를 잡아 뜯어내는 듯한 고통은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반갑기까지 했다. 그 고통 덕분에 가장 지워 버리고 싶은 사실을 잊을 수 있으니까.
‘원하는 대로 하라고, 그래도 된다고 말해서는 안 됐어요……’
사비나가 더 성숙한 사람이었더라면, 에르잔을 위해서라도 알렉세이의 딸이 되어 콘바야젠의 성을 그에게 돌려주었을 것이다.
사비나가 더 용감한 사람이었더라면, 에르잔과 함께 도망쳐 이제까지의 과거를 묻어 버리고 새로운 시간을 함께 살아가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비나는 성숙하지도, 용감하지도 않았다. 15년이나 지났음에도 사비나는 제 마음이 여덟 살 어린 시절로부터 전혀 성숙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여전히 어리석고, 여전히 겁이 많으며, 여전히 무력하다.
‘나 같은 겁쟁이는, 도망치는 짓밖에 하지 못하는걸…….’
사비나는 알렉세이를 용서할 수 없었다. 부모를 죽이고, 제 인생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잔인한 남자를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의 딸이 되어 에르잔과 결혼한다고 한들 조금도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 남자를 죽이기로 했다. 콘바야젠 백작을, 아니, 공작을. 에르잔의 유일한 혈육을, 자신의 손으로.
그리고 도망치기로 했다. 에르잔의 가족을 죽게 했다는 과거로부터, 그가 당연히 누려야 했을 모든 것들을 빼앗았다는 과거로부터, 에르잔이 보육원에서 자라 기사양성소를 거쳐 황실 기사가 되고도 내내 있을 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해야 했던 원인이라는 사실로부터.
사비나는 도망쳤다. 그래서 죽음이 기꺼웠다.
“미안, 해요…….”
에르잔에게 참회해야 하는데.
에르잔에게서 빼앗아 간 것들을 돌려줘야 하는데.
콘바야젠의 성, 귀족의 지위, 재물과 권력과 빛나는 미래를 에르잔에게 줄 수 있는 건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 의무를 다하기에, 사비나는 너무 약해져 있었다.
죽음이라는 껍데기 안에 들어가 가장 피하고 싶은 진실을 외면하는 달콤함에 기대고 싶었다.
폭주하는 저주에 잡아먹혀, 불사신이라는 화신의 능력을 잃고 죽어 가는 지금, 밖에서 그녀의 이름을 목에서 피가 나도록 부르는 남자가 어떤 기분일지 생각하기보다도. 자신의 안식이 먼저였다.
염치를 모르는 인간이란 어쩜 이리도 이기적인지. 사비나는 어깨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에르잔…….”
“사비나. 늙은이가 죽었다고 바로 어린 남자한테로 태세 전환하기야? 서운하네.”
이상할 정도로 가까이서 들린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를 파악할 겨를은 없었다. 말랐지만 은근히 힘이 있는 팔이 사비나의 허리에 둘러지더니, 알렉세이의 몸을 발로 차고 사비나를 끄집어 냈다.
폭주하는 저주 속에서 휘날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정화의 힘을 지닌 자는 들어올 수 없는 저주의 구체. 평범한 사람은 닿는 순간 저주에 오염되어 죽어 버리고 마는 저주의 구체.
그 안에 들어와 사비나를 붙잡고 있는 청년의 얼굴은 절반이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나자예프…….”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