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70화 (170/189)

170화

“사비나 아가씨, 안 됩니다!”

에르잔이 다가오려 하자, 사비나는 바닥에 떨어진 은색의 칼날을 주워 에르잔을 향해 던졌다. 칼날에 둘러진 욕망의 주술 때문에 에르잔을 상처 입힐 수 없을 거라는 계산하에 저지른 행동이었으나, 에르잔은 날아온 칼날을 본능적으로 피하고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사비나를 바라보았다.

“사비나 아가씨, 지금……!”

자신에게 칼을 던진 거냐는 듯이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 사비나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던진 칼날은 어디까지 날아간 건지,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31. 진실한 욕망

<사비나. 아버지는 너를 사랑한단다.>

사랑, 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눈앞의 증오스런 남자가 주문처럼 되뇌던 말이다. 더 이상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는 사비나에게 살인을 강제하면서, 울부짖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잔인할 만큼 다정한 음성으로 건네던 말.

그래서 사비나가 알고 있는 사랑이란 알렉세이의 것처럼 비틀린 감정이었다.

일방적이고, 이기적이며, 강제적이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외에는 더없이 잔인해질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그 <사랑하는 사람>마저 불행 속으로 밀어 넣어 버리는.

그런 바닥이 없는 늪과도 같은 감정이 사랑이리라.

비단 알렉세이 때문만이 아니라도, 사비나가 알고 있는 사랑은 늘 그러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했음에도 그와 가정을 꾸리지 않고, 어린 사비나에게 아버지의 존재를 알리면서도 비밀로 해야 한다며 입단속을 시켰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러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분명 사랑이란 억압과 기만으로 둘러싸인 감정이리라.

주변의 모든 것들을 짓밟아 없애 버리고 사랑하는 이와 자신마저 집어삼키게 만드는 거대한 불과도 같은 것.

그래서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

생명을 가진 것들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듯, 감정을 이끌어 파멸로 치닫게 하는 것.

분명 사랑이란 그런 것이리라. 사비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에르잔. 가만히 있으세요.”

“사비나 아가씨, 안 됩니다.”

“가만히 있으라고, 분명히 말했어요.”

사비나는 엄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며 에르잔에게 다가갔다. 어떻게든 그녀를 붙잡으려는 커다란 손을 뿌리치고, 뒷짐을 진 사비나는 까치발을 뜬 채로 몸을 에르잔 쪽으로 기울였다.

에르잔의 몸집이 워낙 커다란 까닭에 사비나가 기대도 머리는 그의 가슴께밖에 오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좋았다. 사비나는 눈을 감고 에르잔의 가슴에 입을 맞추었다.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듯 에르잔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사비나 아가씨…….”

“에르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가장 강렬한 욕망. 그 앞에서는 그 어떤 이성도 도덕도 합리도 무의미해지는 것.

가장 강렬하다는 생명에 대한 갈망마저 지워버리는, 차라리 죽음에 가까운 감정.

그렇다면 이 감정이야말로 틀림없는 <사랑>이리라.

“사랑해요, 나의 에르잔.”

웃으며 건넨 그 고백에 에르잔의 표정이 희게 질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사비나는 구태여 이유를 묻지 않았다. 궁금하지도 않았다.

사랑이 그토록 일방적이며 잔인한 것이라면, 사비나가 에르잔에게 기대하거나 궁금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사비나는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풀어 그의 옷섶을 젖혔다. 그녀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에 둥그런 거울처럼 은색의 욕망이 고여 있었다.

에르잔에게는 저주가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의 몸에 깃든 <욕망의 거울>을 마주하는 것은 누구일까.

‘오딜이 휘두른 단검…… 자루는 부서져 버렸는데, 칼날은 저 남자에게 닿았어.’

사비나는 이 마을에 오기 전까지 제 아버지인 줄 알았던 남자를, 알렉세이를, 신중한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그녀에게 닿아도 괜찮은 유일한 존재임에도 굳이 부적을 두른 감시병을 시켜 사지를 속박한 뒤 칼로 살갗을 베어 내지 않았던가.

콘바야젠 가문에 아직 힘이 없을 때라면 모를까, 가문의 위세가 상승한 후에는 정적의 가문에 암살자를 보내거나 권력으로 찍어누를 수 있음에도 굳이 사비나를 이용해 주술로 죽이는 방법을 택하지 않았던가.

저주가 통하지 않는, 정화 체질인 에르잔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그를 기사단에서 퇴출시키거나 먼 변방으로 보낼 수 있음에도 굳이 사비나의 호위를 맡겨 이 마을로 보내지 않았던가.

그래서 사비나는 알렉세이가 신중한 줄 알았다.

하지만 이 마을 사람들은, 알렉세이를 이렇게 평가했다.

<겁이 많고 신중한 알렉세이>라고.

알렉세이가, 자신을 학대하고,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밀어 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잔인한 남자가 겁이 많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자 의문이 싹텄다.

‘겁이 많은 사람이…… 신중할 수 있나?’

사비나는 겁이 많았다. 그녀를 보고 카밀라는 강하다고 말했고, 오딜은 무모하다고 말했다.

겁이 많은 나자예프는 어떠한가. 그가 단 한 번이라도 신중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던가? 사비나는 없다고 판단했다.

카밀라는 처음 만난 사비나를 두려워하면서도 다시 한번 그녀를 부르러 달려왔고, 네나뷔스테는 죽음 그 자체인 사비나를 마주하고는 설명조차 듣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

겁에 질린 사람은, 신중할 수 없다.

그들은 감정적이며 무모하다.

방어적이기 때문에 공격적이며, 회피하기 위해 진실을 왜곡한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두려워서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아버지.”

사비나는 알렉세이가 에르잔을 마주할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서서, 그를 돌아보았다. 눈만 부릅뜨고 있던 알렉세이는 사비나의 <아버지>라는 호칭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씩 웃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이구나, 사비나.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당신의 딸이 되면, 정말로 에르잔과 결혼하게 해 줄 건가요?”

“물론이지.”

“사비나 아가씨!”

에르잔이 소리치는 것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사비나가 알렉세이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알렉세이는 에르잔의 옷자락 아래 거울처럼 빛나는 은색의 갑주를 보고 의아함과 안도감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가슴팍의 갑주 위에 자리한, 성인의 모습이 부조된 황금 목걸이를 보았기 때문에.

“옷 속에 갑옷을 입고 있었나? 하긴, 몸을 보호하는 것은 중요하지.”

알렉세이의 말에 사비나의 입꼬리가 가늘게 경련했다.

‘역시.’

오딜의 욕망은 올가를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는 처음, 욕망의 거울에서 올가의 모습을 보았을까.

사비나는 눈을 가늘게 하며 에르잔 대신 대답했다.

“에르잔은 <불사>의 몸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저주는 통하지 않지. 저 녀석이 내게 올 저주를 대신 받는다고 해서 빨리 늙거나 병들어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단다.”

“아버지에게 가까이 다가올 수도 없고 말이죠.”

사비나의 지적에 알렉세이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남자의 눈동자는 여전히 사비나와 같은 검은색이었다.

모든 색의 물감을 섞으면 검은색이 만들어진다고 하던가.

모든 주술을 섞어 만든 죽음의 저주는 검은 빛이었다.

그렇다면 검은 눈동자에는 모든 감정이 전부 담겨 있으리라.

욕망, 분노, 증오, 체념. 그 모든 것들이.

“에르잔이 아버지를 죽일 수 없게 하려고, 목걸이를 맡긴 거죠?”

이제 시간을 멈추는 저주가 적용되는 범위는 알렉세이의 몸에 국한되니까, 에르잔을 비롯해 그 무엇도 알렉세이에게는 닿을 수 없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

“이런, 사비나. 내가 단지 죽음이 두려워 녀석에게 목걸이를 맡겼다고는 생각하지 말아다오. 로스카옌의 뒤를 이을 제물을 마련한 건 나뿐만이 아니라, 너를 위해서이기도 해.”

주술도구가 사라지면, 통제력을 잃은 저주가 어디로 폭주할지는 알 수 없다고 그랬던가.

사비나는 입꼬리를 당겨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아버지.”

진심을 말하는 것은 그토록 힘겨웠는데.

거짓을 말하는 것은 어째서 이토록 간단한지.

“사비나, 이리 온.”

그를 보며 미소 짓는 사비나의 얼굴에 원망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음을 알아차린 알렉세이는 피가 묻은 오른손을 망토에 문질러 닦고 양팔을 벌렸다.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정말로 아버지가 딸을 품에 안아 주려는 듯이.

사비나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알렉세이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욕망의 저주 때문에 잠들어 있던 사람이 하나씩 깨어났다.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귀를 틀어막고는, 속이 거북할 정도로 질척하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본다.

알렉세이의 몸을 감싸고 있는 저주. 정화의 힘조차 파고들 틈이 없는 완벽한 보호막.

또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 어떤 창검과 화살도 부수어 버릴 수 있는 강력한 무기.

그 자신이 창이자 방패인 저주를 두르면 무엇으로부터도 위협을 받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리석게도.’

궁지에 몰린 자의 본능이 찾아낸 희망이란 그렇게 얄팍한 것이다.

지금 사비나가 그러하듯이.

“……헉!”

얼굴이 피범벅이 된 카이라트는 욕망에서 깨어나자마자 부릅뜬 눈으로 동쪽 첨탑을 바라보았다. 문이 부서진 까닭에 알렉세이와, 그를 향해 걸어가는 사비나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멈춰요, 사비나!!”

의아함과, 놀라움과, 공포가 섞인 카이라트의 외침을 듣고도 알렉세이는 그저 태연했다. 아니, 어쩌면 조롱에 가까운 시선을 보냈는지도 모른다. 사비나를 제 편으로 만들어 알렉세이와 대립하게 할 셈이었을 터인데,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으니 절망하는 거겠지.

“안됐군, 카이라트. 네 연구 결과는 잘 쓰도록 하마.”

“소리, 소리가 울리는 게 안 들립니까? 주술도구가……!”

카이라트가 주술도구가 공명하고 있음을 말하려던 순간, 사비나는 달려들 듯이 알렉세이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에르잔의 가슴팍을 갑주처럼 감싸고 있던 욕망의 거울이 네 갈래로 쪼개졌다.

동시에, 사비나의 옷자락이 벌어지며 튀어나온 금줄 목걸이가 알렉세이의 것과 맞닿아, 두 사람의 전신을 빛으로 감쌌다.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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