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69화 (169/189)

169화

서기는커녕 주저앉는 것조차 힘겨워 보일 만큼 만신창이였던 사내가 펄쩍 뛰어오르더니, 지척에 있는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오딜, 안 돼요!”

사비나가 경악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오딜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에게 구조를 요청한 어린아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만이 남은 남자는 자신의 온몸을 밀어내는 주술의 저항을 느끼면서도 있는 힘껏 알렉세이를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헛수고야. 역시 머리가 나쁘군, 오딜.”

차라리 알렉세이의 몸을 보호하는 것이 갑주나 방패였더라면 그것을 부술 수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알렉세이를 둘러싼 것은 물리적인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주술이었다. 그것도 에르잔의 정화능력마저 통하지 않는 가장 강력한 저주.

저주에 삼켜진 대상의 시간을 멈추면서, 그 저주에 잠식되지 않은 일체의 대상을 밀어내는 가장 견고한 방어막이자 최강의 무기.

저주에서 벗어난 이는 어떤 수를 쓴다고 한들 알렉세이에게 닿을 수 없다.

네나뷔스테처럼 에르잔이 덧씌운 정화의 힘이 남아 있었다면 몸이 튕겨 나가는 정도로 끝났겠지만, 오딜에게는 그런 것조차 없었다.

“으아아아!”

더러운 옷가지가 찢겨 나가고, 피부가 벗겨지면서 핏줄이 뻗어 나오는 모습이 마치 거미줄처럼 보였다. 귀가 멍해질 정도로 크게 울리는 오딜의 고함이 짐승의 단말마처럼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으로 인한 비명은 아니었다.

손가락이 날아가고 손목뼈가 으스러지는 와중에도 오딜의 눈동자에 공포나 절망의 빛은 조금도 없었다. 만약 살의에 형태가 있다면 그것은 평소에는 실처럼 늘어져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온몸을 옭아매, 상대를 완전히 붙잡은 순간 칼날이 되어 하나로 합쳐질 것이 분명하다. 낮이라고는 해도 첨탑 안은 조명조차 없어 어두침침한데, 알렉세이는 순간 눈부신 빛을 보았다.

오딜의 눈은 분명 황금색인데, 어째서 그에게는 없는 은색의 빛이 저토록 예리하게 떠오른단 말인가.

그것이 그의 눈에 비친 단검의 칼날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기도 전에 알렉세이의 왼쪽 어깨를 감싸던 검은 망토가 잘려 나갔다.

“……헉!”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간발의 차로 목이 찔리는 것을 면한 알렉세이는 뒤로 물러나려다 주저앉을 뻔했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휘두른 팔이 탁, 단검의 자루를 쳐 냈다. 알렉세이의 피부를 가르고도 멀쩡한 은빛의 칼날과는 달리, 나무로 된 칼자루는 그가 후려치는 것과 동시에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마찬가지로 알렉세이를 향해 내지른 오딜의 팔이 나무막대가 갈라지듯 여러 갈래로 찢어졌다. 있는 힘을 다해 뛰어들었기에 멈출 수 없었던 것일까. 처음부터 멈출 생각이 없었던 것일까. 단검을 쥐고 있던 팔이 손끝에서부터 넝마가 되더니 급기야 어깨뼈가 탈골되면서 턱을 후려쳤다. 오딜의 목이 뒤로 꺾이며 머리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말도 안 돼. 나한테 칼이 닿을 리가 없는데…….”

저주에 걸린 대상 외의 일체를 밀어내니 사람이건 물건이건 그를 공격하는 무엇도 몸에 닿을 수 없으리라 믿었건만, 오딜이 휘두른 단검의 칼날은 알렉세이의 어깨에 파고들어 옷과 함께 피부를 찢어 냈다. 아마도 오딜의 팔이 날아가지 않았더라면 은색의 욕망을 흡수해 예리하게 벼려진 칼날은 알렉세이의 몸 깊숙이 박혀 뼈와 함께 심장까지도 도려냈을 것이다.

알렉세이는 다급하게 어깨를 감싸고 숨을 몰아쉬었다. 펜 외에는 잡아 본 것이 없을 듯한 우아한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칼에 베이면 차갑고 섬뜩한 느낌일 거라던 예상과는 달리, 마치 인두로 지지기라도 한 것처럼 뜨거운 감각이 어깻죽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알렉세이는 끈 떨어진 꼭두각시처럼 기괴한 자세로 바닥에 없어진 오딜을 발로 걷어차려다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다시 휘청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어디선가 뻗어 나온 흰 손이 오딜의 몸을 낚아챘다.

기울어진 벽장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페고라였다.

“숨은 붙어 있구나. 차라리 끊어지는 편이 고통은 덜했을 터인데. 카림, 이리 온.”

시력이 안 좋은 까닭에 숨소리와 기척으로 상태를 파악하는 일에 능숙한 페고라는 오딜의 숨이 붙어 있음을 확인하고, 카림에게 지시해 로브를 뜯어냈다. 대패로 갈려 나간 나무 톱밥처럼 엉망으로 뜯겨나간 된 오딜의 팔을 보고 카림이 딸꾹질을 했다.

“카림. 제대로 거들어.”

“허, 흑…… 오딜, 아저씨…… 피가…….”

“진짜 어린애도 아니면서 엄살은.”

시체는 질리도록 봤으면서 겨우 산 송장 정도로, 라고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지만 그뿐이었다. 페고라는 로브를 벗고 속옷을 찢어 오딜의 어깨를 감쌌다.

오딜의 상처는 심각했다. 의사도 약도 없는데 이런 임시방편인 응급처치는 기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다출혈로 사망하거나, 운 좋게 지혈이 되더라도 감염으로 죽을 확률이 더 높았다. 하지만 페고라는 아무짝에도 의미 없는 응급처치를 위해 제 옷을 다 찢어 내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눈앞의 사람이 죽어가는데 뭐라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까.

페고라는 제 옷으로 오딜의 몸을 꽁꽁 감싸느라 거의 속옷 차림이 되었는데도 개의치 않고, 오딜의 상처 부위로 피가 흐르지 않도록 비스듬하게 안아 일으켰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을 당장……!”

“그만해요!”

사비나가 알렉세이를 말리려 뛰어든 순간, 페고라와 카림이 고통스러운 듯이 비명을 질렀다.

“……악!”

“페고라?”

“누구 머리를 터뜨릴 작정이야?”

페고라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귀를 감싸면서 사비나를 노려보았다. 사비나는 그것이 페고라가 자신을 싫어하고 경계하는 탓이라 여겨 우뚝 멈춰섰다. 그러나 뒤에서 놀란 눈으로 히끅거리며 어깨를 움찔거리는 카림을 보고, 반사적으로 가슴에 손을 짚었다.

두 개의 주술도구가 가까워질 때 나는 공명음. 주술도구에 따라 나는 소리도 다른 것일까. 아니면 사람마다 소리를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사비나가 들었을 때도 상당히 기분 나쁜 소리였는데, 에르잔의 표현에 의하면 더 시끄럽고 불쾌한 소리인 듯했다.

‘당사자에게는 들리지 않으니까, 저 사람은 아직 몰라…….’

사비나가 입구에 멈춰 서서 양손을 가슴께에 모으고 있는 것을 어떻게 오해했는지, 알렉세이가 비틀거리던 몸을 바로 세우고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비나. 네가 자꾸 늑장을 부리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니냐.”

“……뭐가요?”

“아버지 말을 들어야지?”

이 판국에도 알렉세이는 사비나 앞에서 꼬박꼬박 자신을 <아버지>라고 지칭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뻔뻔한 그 어조에 사비나의 입술이 저절로 떨려 왔다. 그녀는 손을 올려 가슴부터 목까지 감싸고, 천천히 알렉세이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왜, 당신 말을 들어야 하죠?”

“어차피 이것들은 죽을 운명이야. 그게 빠르냐 늦으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보렴, 이라고 말하며 알렉세이는 턱짓으로 오딜을 가리켰다. 목이 꺾여 숨은 제대로 쉬는지 의심될 만큼 처참한 몰골의 오딜을 마주하자 사비나는 손발이 차갑게 얼어붙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비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그들이 죽는 순간을 지켜봐 온 사비나에게도 오딜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끔찍한 부상을 목격한 것보다도, 그 부상을 입은 것이 자신의 삼촌이며 그를 다치게 만든 원인이 그녀의 원수인 남자라는 사실이 더욱 사비나를 숨 막히게 했다.

“당신 때문에 내 부모님이 죽었어요.”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덮을 수는 있지.”

“오딜…… 내 삼촌도, 당신이 저렇게 만들었어.”

“끔찍한 기억은 잊어버리면 된단다. 네게는 그럴 능력이 있어. 내가 주었으니까.”

어깨를 베였다지만 그렇게 칼날이 깊이 박혔던 것도 아닐 터인데, 알렉세이는 그마저도 견디기 힘들다는 듯이 한 마디 한 마디를 뱉을 때마다 표정을 일그러뜨렸다가 심호흡하고 가다듬기를 반복했다.

목이 꺾이고 팔이 날아간 오딜은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는데, 겨우 그 정도, 라고 말할 만한 상처로 있는 힘껏 아픈 척을 하는 알렉세이의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저 남자를 죽일 수만 있다면.

“사비나.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렴.”

사비나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알렉세이가 한층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네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죽은 부모도, 오딜도 아니야. 그렇지?”

에르잔. 사비나가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존재.

그녀 자신이 얼마나 비참해지더라도, 설령 또다시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하더라도 지키고 싶었던 존재.

내일을 기다리지 않던 그녀에게 찾아온 단 하나의 미래.

“사비나. 에르잔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건 너뿐이란다.”

“내가 에르잔의 행복을 빼앗았는데,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죠?”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네게 그랬던 것과 같이.”

콘바야젠 가문의 귀족은 전부 사망하고, 콘바야젠의 피를 이어받은 기사의 자식들은 자신들이 죽어 가는 이유도 모르고 죽어 갔다.

어른들도 버티지 못했으니 아이들은 당연히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찝찝했다. 일개 주술만 막을 수 있는 다른 콘바야젠 가문의 사람들과는 달리, 초대 백작처럼 그 어떤 저주도 통하지 않는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알렉세이는 불안해졌다.

그래서 사비나의 피를 이용해 정적을 제거하는 한편, 권력을 쥐면서부터 황궁 기사단의 기사나 관료들의 피를 채취하는 <신체검사>를 실시했다.

채취한 피에 사비나의 핏방울을 떨어뜨려, 검게 물들면 저주에 삼켜진 것이고 섞이지 않으면 저주에 물들지 않는 것이니까.

그 신체검사에서 처음으로 사비나의 저주를 튕겨 낸 존재가 나타났을 때, 알렉세이는 놀랍게도 불안이 아니라 안도를 느꼈다.

미지의 존재를 드디어 찾아냈다는 것과 동시에 사비나의 저주가 통하지 않는 자가 제 뜻대로 부릴 수 있는 황실 기사단의 신예기사라는 사실이 그에게 평정과 새로운 지혜를 주었다.

알렉세이는 사비나가 에르잔을 좋아하게 될 거라 확신했다. 한평생 어두운 골방에 갇혀 고통을 인내하거나, 시체 밑에 깔려 몸부림치는 일밖에 하지 못했던 사비나에게 에르잔은 구원과도 같은 존재일 테니까.

동시에 알렉세이는, 에르잔이 사비나에게 반할 거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단순히 사비나의 외모가 아름답거나, 그녀의 가련한 처지가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 아니라.

에르잔이 콘바야젠의 피를 이어받았다면, 자신과 같은 피를 이어받았다면.

올가의 피를 이어받은 사비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것은 예측이나 믿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망상에 가까웠으나, 알렉세이에게는 의심할 수 없는 진리와도 같았다.

그리고 정확히 그가 믿은 대로, 에르잔은 황실에 충성하기보다, 기사로서 명예롭게 살기보다, 부귀영화를 누리거나 평안한 삶을 얻기보다, 사비나를 지키기를 택했다.

“사비나. 너는 내 명령을 따르고 싶지 않겠지.”

“…….”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단다. 너는 에르잔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렉세이가 피범벅이 된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네가 진짜 내 딸이 되면, 모든 고통은 끝난단다. 에르잔에게 지위를 돌려주고, 마을 사람들은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되지.”

“사비나 아가씨. 듣지 마십시오!”

뒤따라온 에르잔이 만류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사비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은색의 칼날이 들어왔다.

자루는 이미 산산조각이 나서 부서졌음에도, 날카롭게 벼려진 은색의 칼날에는 흠집 하나 없이 멀쩡했다.

분명 이가 다 빠져 무딘 칼이었는데 어떻게 된 걸까.

사비나의 시선에 호응하기라도 한 듯, 칼날이 다시 반짝였다.

꼭 거울처럼 반짝이는 칼날이 금빛을 반사했다.

그것은 태양일까, 아니면 뒤에 서 있는 에르잔의 머리카락일까.

빛나는 태양.

태양 같은 에르잔.

에르잔의 황금빛 머리카락.

그리고, 빛나는 금줄 목걸이.

“좋아요. 따를게요.”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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