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68화 (168/189)

168화

“에르잔. 나를 용서해 달라고는 하지 않을게요.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구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도와주면, 안 되나요?”

사비나는 여전히 에르잔을 바라보지 않은 채로,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사비나의 손끝에서 은색의 빛이 흘러나오는 것을 본 에르잔은 곧 그녀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알아차렸다.

욕망의 저주를 흘려보내, 바닥을 전부 은빛으로 뒤덮어, 욕망의 거울을 사람들이 마주하게 할 셈이다.

그러나 욕망에 완전히 잠식되지는 않도록, 에르잔의 힘으로 그들을 보호해 달라는 거겠지.

“사비나 아가씨…….”

“제발, 부탁이에요. 내 죄는 반드시 갚을 테니까.”

당신은 죄를 짓지도 않았고, 갚을 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지금 상황에 역효과일까. 에르잔은 대답하는 대신, 그녀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주름진 천 너머로 동그란 어깨가 만져졌다.

에르잔의 손의 온기를 느낀 것만으로 또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아, 사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주르륵. 은색의 물길이 피처럼 흘러내렸다.

“오오…… 과연, 아름답구나.”

광장 바닥을 덮어 가는 은빛의 욕망을 내려다보며 알렉세이가 감탄했다. 사비나는 문득 그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콘바야젠 가문의 사람들을 죽게 만든 것은 사비나다. 에르잔의 부모도 그녀가 죽였다고 했다. 비록 그전에는 알렉세이의 명령으로 원치 않는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지만, 사비나가 직접 알렉세이를 죽인다면 이번에는 정말로 그녀가 에르잔의 혈육을 해치는 셈이 된다.

‘에르잔에게…… 콘바야젠이라는 성을 돌려줘야 해.’

에르잔에게 직접 물었더라면 그는 분명 바라지 않는다고 대답하겠지만, 사비나에게는 그것을 묻는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잘못으로부터 달아나는 태도로 비칠 것 같았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 무서웠다.

그리고 아마 알렉세이는 그녀가 지독히도 겁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일을 시키겠지.

고통을 회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공포로부터 곧 그들을 해방시켰다. 욕망의 거울을 마주하고 차례차례 쓰러져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알렉세이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비나. 저주를 조금 더 동쪽으로…… 그래, 저기 널브러진 오딜에게도 보여 주렴.”

알렉세이가 오딜을 언급하자 사비나의 어깨가 다시 떨려 왔다.

“왜, 네 삼촌에게 저주를 씌우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니? 그럴 것 없단다. 가는 길을 편하게 해 준다고 생각하렴.”

“가는 길……?”

“저토록 괴로워하고 있지 않니. 말라 비틀어진 벌레처럼 웅크리고 있는 꼴을 보렴.”

알렉세이의 손끝이 동쪽 첨탑을 향했다. 뜯어진 벽장 문짝을 방패 삼아 들고 있던 카밀라는 그가 무슨 짓이라도 하는가 싶어 갈매기 우는 소리를 내며 파다닥 멀어졌다. 와지직. 카밀라가 내던진 벽장 문이 알렉세이에게 닿기도 전에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꺄아악, 괴물이야!”

“시끄러워, 저리 비켜!”

냇물처럼 바닥을 흐르는 은색의 저주에 붙들리지 않도록 네나뷔스테가 그것을 뛰어넘더니, 카밀라를 떠밀어 넘어뜨렸다. 우당탕. 카밀라의 뒤에 깔린 아이베크와 자니베크가 신음했으나 네나뷔스테는 두 남동생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그녀가 다급하게 첨탑 안에 있는 줄디즈를 향해 외쳤다.

“줄디즈, 어서 거기서 나와! 붙들리면 안 돼!”

욕망의 저주가 어떤 효과를 내는지는 몰라도, 차례차례 쓰러져 가는 마을 사람들을 보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네나뷔스테는 제 동생만이라도 구해 내고자 줄디즈를 불렀다.

그러나 줄디즈는 엎어진 오딜의 옆에 꼭 붙어서, 은빛의 물길이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줄디즈의 표정은 여덟 살 어린아이답지 않게 진지했다. 소녀가 움직이지 않는 것은 겁에 질려 발이 떨어지지 않아서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해서도 아니다. 줄디즈는 은빛의 저주가 오딜의 바로 코앞까지 다다랐을 때,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아…… 아저씨! 오딜 아저씨!”

“줄디즈! 빨리 나와!”

“아저씨, 오딜 아저씨, 도와주세요!”

움직이지도 않고 송장처럼 엎어져 있는 꼴이 멀리서 보면 이미 죽은 사람처럼 보였으나, 줄디즈는 포기하지 않고 오딜을 불렀다.

“오딜 아저씨! 우리를 지켜 주세요!”

“줄디즈, 어서 나오라니까!”

“도와주세요, 아저씨!”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것과는 사뭇 다른, 필사적인 외침이었다. 마치 죽음을 목도한 인간이 살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구원의 밧줄을 붙드는 듯하다고 할까. 이상한 점은 제 언니인 네나뷔스테도, 저주를 내뿜는 사비나도,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알렉세이도 아닌 오딜을 향해 도와 달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알렉세이는 새하얗게 질려 오딜을 부르는 줄디즈의 모습에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가 없군. 오딜, 이게 네놈이 지킨 인간들의 모습이다.”

알렉세이가 천천히 동쪽 첨탑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발밑에서 흐르던 은빛의 욕망이 발자국 모양대로 고여 작은 거울을 만들었다. 오딜은 여전히 엎어진 채로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줄디즈는 절규하듯 오딜을 부르다가, 알렉세이가 가까이 다가오자 얼른 첨탑의 구석으로 달려가 몸을 웅크렸다.

“우습지 않나, 오딜? 여동생을 구하는 것도 포기해 가며 이 마을을 지켰는데도, 살아남은 것들은 여전히 너에게 <도와 달라>는 말밖에 하지를 않아.”

알렉세이는 구석에 웅크린 줄디즈를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고는, 오딜을 향해 가볍게 발끝을 움직였다. 닿은 것도 아닌데, 마치 저주의 보호막에 부딪혀 밀려나듯 오딜의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가, 도로 엎어졌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이 다시 아래를 향했을 때 맞닿은 것은 차가운 돌바닥이 아니라 거울처럼 반짝이는 은빛의 물길이었다.

“봐라, 오딜. 네가 지키지 못했던 <욕망>을.”

욕망. 그 소리에 내내 감겨 있던 오딜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떠졌다. 흐리멍덩한 금색의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느리게 깜박이는 그의 눈이 서서히 한 점에 고정되더니, 은색의 거울에 떠오른 낯익은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크게 떠졌다.

제 동생의 얼굴이었다.

“올가……!”

“그래. 네놈 때문에 올가가 죽었어.”

알렉세이가 차갑게 내뱉었다.

“올가를 지켜야 한다고 그 발악을 해 놓고, 올가가 죽어 갈 때 네놈은 뭘 했지?”

알렉세이는 구석에 움츠린 줄디즈를 가리키며, 이를 갈았다.

처음으로 보는, 분노한 표정이었다.

“이따위 냄새 나는 마을에 널린 쓰레기들을 지키고 있었지? 그 결과가 이거다.”

“…….”

“올가를 버리고, 이따위 것들을 구했어, 너는!”

노기를 띤 목소리에 오딜의 어깨가 움찔움찔 떨렸다. 그것이 알렉세이가 내뱉는 말이 저주처럼 그의 몸을 좀먹기 때문인지, 아니면 분노나 슬픔으로 감정이 조절되지 않아 절로 몸이 떨리는 현상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래. 동생을 버리고, 목숨을 걸고 이것들을 지켜 내서 만족하나? 그래도 돌아오는 보답은 없어, 오딜. 저 빌어먹을 꼬맹이가 하는 말을 들었지? 네가 녀석들을 아무리 지켜도, 녀석들에게는 너를 지킬 힘도, 그럴 생각도 없다는 걸!”

“무슨 헛소리야, 알렉세이! 올가 언니를 죽인 건 너잖아!”

차마 가까이 갈 엄두가 나지 않아 멀리서 소리만 지르는 카밀라의 지적을 듣고도, 알렉세이는 진저리치듯 고개를 털었다.

“네놈이 올가를 지키지 않아서, 나는 올가를 두 번이나 단념해야 했어.”

“…….”

“어리석은 오딜. 더러운 오딜.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르고, 쓰레기 같은 것들을 구하는 데 인생을 낭비한 오딜. 네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되었어. 그러니까.”

알렉세이의 표정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자살해, 오딜.”

냉랭한 목소리가 칼처럼 오딜의 목덜미에 꽂혔다. 은색의 거울에 비친 제 여동생의 모습을 바라보던 오딜은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리다가, 숨이 막힌 듯 켁 소리를 내며 도로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호위대장? 그런 놈은 없어. 아니, 내가 죽여 버렸지.>

오딜은 올가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도망쳤다. 자신의 지난 과거를 증오했다. 그가 마음속으로 죽이고 싶을 만큼 저주했던 것은 마을을 그렇게 만든 알렉세이도, 올가를 죽인 이름 모를 병사들도 아니었다.

동생을 지키지 못하게 했던 또 다른 자신인 <호위대장 오딜>이었다.

마을이 불타고 시간이 멈추었을 때, 오딜은 <호위대장 오딜>을 죽였다.

자기 자신을 마음속으로 죽여 버린 까닭에, 오딜은 마을의 저주가 풀리자마자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시체처럼 널브러진 그는 네나뷔스테의 외침에도 반응하지 않고, 메마른 짚더미와 거친 흙알갱이가 코와 입을 막는 것도 괘념치 않고 눈을 감았다.

어차피 15년 전에 죽었어야 했을 몸이다.

동생을 구하지도, 마을을 구하지도 못한 자신이 편하게 죽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고통의 나무가 피부를 찢고 뿌리를 내려 두개골을 부수는 듯한 통증에 휩싸이면서도 오딜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숨이 막혀 쿵쿵 뛰는 심장이 살려 달라는 듯이 비명을 질러도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면 곧 죽을 줄 알았다.

시야도 침침하고, 네나뷔스테에게 질질 끌려갈 정도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더는 살아갈 기력도 의욕도 없으니까.

그런데.

“오딜 아저씨, 우리를 구해 주세요!”

왜 줄디즈의 외침만은, 이토록 선명히 귀에 들어오는가.

“……죽여 버린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어.”

삶을 포기한 오딜에게는 고통마저 멀게 느껴질 뿐이었다. 괴로움도 답답함도 마치 남의 것 같다고 할까. 자신이 아닌, 전혀 모르는 타인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는 기분이었다. 죽음은 느껴지지만, 그 고통과 불안과 괴로움에 자신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으니까.

오딜은 <오딜>을 죽이고 싶어 했고,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없애 버리고자 했으며, 그가 죽더라도 구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죽어 버리면, 지킬 수가 없잖아?”

피를 흘리며 쓰러져서, 당연히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도 오딜은 죽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마을에서 바위에 머리를 찧어도 살아남았던 것처럼.

저주가 풀린 지금 사지 멀쩡한 구석이 하나 없는데도 그는 살아있다.

어째서일까.

“나이를 먹는다고 다 어른이 되는 게 아니야, 알렉세이.”

“뭐?”

“어린애가 어른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당연한 거야.”

가라앉은 오딜의 목소리는 분명 알렉세이에 비할 수 없이 작은데도, 이상하게 또렷했다.

“내가 그때 올가를 구하러 가지 않은 이유를 아나?”

오딜은 마을의 호위대장이었다. 도와 달라고 아우성치는 이들을 지키려 병사들에 맞서 싸웠다. 그래서 올가를 구하러 가지 못했다.

아니, 구하러 가지 않았다.

아마 15년 전 그때로 되돌아가더라도, 오딜은 올가를 구하러 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 욕망은 올가를 지키는 게 아니었거든.”

오딜의 손끝이 까딱, 움직였다. 피와 흙으로 더러워진 까닭에 오히려 손에 가득한 흉터는 잘 보이지 않았다.

오딜은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으로 인한 발악은 아니었다. 그는 일어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지를 움직이려 힘을 주자 소름 끼치는 통증과 함께 신경이 연결되는 느낌이 들었다. 끅끅거리는 소리를 내며 버둥거리는 오딜의 모습을 알렉세이는 추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동생을 지키지 못한 과거로부터 회피하는 건가? 약해 빠졌군, 오딜.”

“회피? 아니야.”

오딜은 올가를 강제했다. 가두고, 교류를 끊고, 그가 통제하는 영역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윽박질렀다.

자신이 그녀를 보지 못할 때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위험에 처하거나 상처 입으면 안 되니까.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했다.

“그런 놈은 처음부터 없었어.”

만약 오딜이 올가를 지키는 데만 열중했으면, 어쩌면 두 사람은 사이좋은 오누이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딜은 올가를 지키려 하지 않았다. 그녀를 지키는 일보다 마을의 호위대장으로서 일하는 것을 더 중요시했다.

오딜이 올가를 강제한 것은, 그녀가 마음대로 돌아다니면 오딜 자신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올가를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을 위해서였다.

올가를 지키는 것보다도 마을의 호위대장이기를 택했다.

그래서 병사들에 맞서 마을을 지키느라 올가를 구하러 가지 못했던 거다.

올가를 지키는 오딜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없는 놈의 욕망을 비출 수는 없지.”

오딜은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이가 다 빠진 단검은 검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철로 된 작은 둔기에 가까웠다.

그것을 욕망의 거울을 향해 찔러 넣자, 유리가 깨지듯 은빛의 거울에 금이 가며 올가의 모습이 조각났다.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은색의 욕망이 조각조각 부서지더니, 무딘 단검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그의 욕망을 비추는 것은 거울이 아니라, 검이라는 듯이.

“내 이름은, 오딜.”

거무튀튀한 머리카락. 흉터가 가득한 피부. 갈색으로 굳어 버린 피에 흙과 먼지로 더러워진 얼굴은 원래의 피부색이 무엇이었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운데.

오딜의 황금빛 눈동자에만, 날카로운 빛이 돌아왔다.

“이 마을의 호위대장이다.”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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