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부러진 갈퀴가 바닥에 꽂히고, 네나뷔스테는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러나 놀란 것은 네나뷔스테만이 아니었다. 알렉세이와 바르셀다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바르셀다는 알렉세이가 근처에 간 것만으로 타격을 입고 쓰러졌다. 아페티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갈퀴가 부서졌음에도 네나뷔스테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어째서지?”
알렉세이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의아함과 불쾌감이 깃든 검은 눈동자에 붉은 빛이 얼핏 떠올랐다가 흩어졌다.
사비나가 네 개의 핵을 흡수함으로써 마을을 둘러싼 저주의 결계가 무너져내렸다. 멈춰 있던 시간이 원래대로 흐르기 시작하면서 마을 사람들은 저주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저주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비나의 몸에 깃들어 있을 뿐.
그것은 곧, 사비나가 흡수하기 전에 저주에 걸렸던 이들은 모두 저주에서 <튕겨져 나왔다>는 뜻이었다.
로스카옌에서 에르잔으로, <제물>을 두어 반동을 피한 알렉세이 이외의 마을 사람은 전부 다.
외부인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는 주술.
저주를 견뎌 내지 못하는 자의 몸은 녹아 사라지고, 저주로부터 살아남은 자의 시간은 멈추는 주술.
마을을 봉쇄하고 사람들을 고통의 늪에 빠뜨렸던 그 주술은, 지금 알렉세이의 몸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방패가 되었다.
그 주술은 단지 알렉세이에게 타인의 손이 닿지 못하도록 막아 낼 뿐만 아니라, <저주>로서 평범한 인간을 공격한다.
저주를 한 번 극복했다고는 하나, 주술의 결계 밖으로 튕겨져 나온 이들은 저주에 조금 면역이 있을 뿐인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들에게 네 개의 핵을 하나로 합치고, 욕망의 근원까지 흡수한 사비나의 저주를 감당할 힘은 없었다.
그래서 알렉세이가 그저 가까이 다가간 것만으로 바르셀다는 타격을 입고 쓰러졌던 것이다.
그런데 왜 네나뷔스테는 타격을 입지 않았나.
“무슨 짓을 한 거냐, 네나뷔스테.”
“긁히지도 않았으면서 엄살 피우지 마! 아직 안 끝났거든? 갈퀴 하나 막아 냈다고 내가 포기할 것 같아?”
네나뷔스테가 냉큼 일어나 고개를 털었다. 치맛자락이 흙투성이였으나 옷을 털지는 않았다. 그녀는 무기를 대신할 것이 있나 빠르게 눈을 굴려 주위를 살피다가, 찢어진 제 옷소매를 보고 문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갈퀴가 부서지고 옷소매가 뜯겨나갔음에도 네나뷔스테의 팔은 멀쩡했다.
그냥 멀쩡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팔에 자욱했던 화상의 흔적이 옅어졌다.
“뭐야, 이거?”
네나뷔스테는 팔을 문질렀다. 에르잔의 정화의 불꽃이 저주와 저주받은 인물을 분리하지 못한 까닭에 네나뷔스테는 양팔에 화상을 입었다. 저주로부터 벗어나도 화상을 입은 피부는 원래대로 회복되지 않았다. 네나뷔스테의 팔에 남아 있던 화상은 저주가 만든 것이 아니니까.
그런데 화상으로 울퉁불퉁했던 양팔이, 지금은 그 흔적이 옅어졌다.
정확히는 주먹을 쥐었을 때 겉으로 드러나는 손등과 손목 부분의 피부가 매끈해졌다.
감각은 분명 멀쩡한데 어떻게? 네나뷔스테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손바닥을 뒤집어 확인해보았다가, 손을 털었다.
그러자 네나뷔스테의 손등에서 반짝이는 금빛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뭐지? 이 반짝이는 가루 같은 건…….”
“이런, 그랬구나.”
알렉세이가 가볍게 탄식했다가, 겨우 안도했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나뷔스테가 노려보자, 알렉세이는 다시 평정을 되찾은 듯 바른 자세로 섰다.
“금빛이라면 에르잔에게 받은 정화의 힘이겠군. 운이 좋구나, 네나뷔스테.”
“받기는 뭘 받아. 저 자식한테 받은 건 화상 자국밖에 없는데.”
알렉세이가 피식 웃으며 네나뷔스테로부터 에르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에르잔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설마…… 저주가 정화의 힘을 밀어내는 건가?’
나무로 만들어진 자루를 부러뜨리고, 옷가지 정도는 간단히 찢어 버리며, 사람의 뼈도 손쉽게 우그러뜨릴 수 있는 강력한 결계. 그것은 보호막인 동시에 무기였다. 알렉세이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을 공격하는.
그러나 네나뷔스테는 저주에 공격당하지 않고, 단지 튕겨져 나왔다.
마치 마지막 핵을 흡수하던 날, 마을의 북쪽에 있는 검은 숲으로 들어가려던 에르잔이 튕겨져 나온 것처럼.
네나뷔스테의 양팔에 남아 있던 에르잔의 정화의 힘이 알렉세이의 결계로부터 그녀를 튕겨냈다.
동시에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지켜 주었다.
만약 정화의 힘이 화상의 형태로 들러붙어 있지 않았더라면, 네나뷔스테 역시 바르셀다와 마찬가지로 팔이 꺾이거나 피부가 찢어지는 등 심한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팔에 남아 있던 화상의 흔적이 흐려지며 금색의 빛이 떨어져 나온다는 것은, 곧 에르잔의 정화의 힘으로도 알렉세이의 저주를 당해 내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봤나, 에르잔?”
“뭘 말입니까?”
“보고도 모른 체할 셈인가? 이제 자네는 내게 대적할 수 없어. 자네의 정화능력보다, 사비나의 저주의 힘이 더 강해졌다는 뜻이지.”
“……저는 저주에 씌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그러니까 밀려나는 거야. 내게 닿을 수 없도록 말이지. 역시 자네에게 목걸이를 넘기기로 결정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어.”
“목걸이라고요? 그건 이미…….”
“에르잔!”
에르잔의 말을 다급하게 가로막으며 사비나가 그의 손을 붙들었다. 뒤를 돌아본 에르잔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깜짝 놀라 사비나는 고개를 숙였다. 차마 그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사비나는 에르잔을 보지 않은 채,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잠깐만, 밝히면 안 돼요.”
“사비나 아가씨…….”
“아직 몰라요, 저 사람은.”
성인의 모습을 부조한 금줄 목걸이. 로스카옌을 알렉세이의 <제물>로 착각하게끔 만든 주술도구.
알렉세이는 로스카옌의 죽음을 대비하여 에르잔을 다음 제물로 삼았다.
저주가 통하지 않는 에르잔이라면 알렉세이의 대신이 되더라도 나이를 배로 먹거나, 몸이 녹아 버리거나, 운신에 제약을 받지 않을 거라는 계산하에서였다.
숲속에서 목걸이를 통해 그와 통신했을 때, 알렉세이는 에르잔이 목걸이를 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주술도구는 같은 위치에 착용해야만 효과가 발생하니까.
그러나 알렉세이는 그 후에, 사비나가 에르잔의 목걸이를 벗겨 내어 그녀 자신의 목에 걸었다는 사실은 모르는 듯했다.
그 순간부터 사비나와 에르잔은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으니까.
‘에르잔이 숲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말했지. 내가 흡수함으로써 완성된 저주는 정화되지 않는 힘을 얻은 거야.’
죽음의 화신인 사비나를 에르잔이 정말로 정화할 수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른다. 에르잔의 무의식은 사비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그녀의 몸을 감싼 저주를 태워 상처 입히지 않도록 힘의 발현을 가로막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에르잔이 사비나의 저주에 물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분명 그녀와 비슷하거나 더 우위에 있는 것은 분명했다.
알렉세이가 이 마을에 두 사람을 보낸 이유는 사비나가 아니라 에르잔을 제물로 삼기 위해서다.
로스카옌의 대리로 저주가 통하지 않는 에르잔을 고를 정도로 철저한 알렉세이라면, 주술도구 두 개가 결합하며 제물로써의 기능을 상실하는 상황에도 분명 대비했을 터.
사비나의 저주의 힘을 강하게 하고, 마을을 감싼 저주─알렉세이를 보호하면서 동시에 그에게 대적하지 못하도록 하는─의 범위가 사비나의 몸 하나에 국한되도록 함으로써, 알렉세이는 이론적으로 사비나의 몸속에 숨어 있는 꼴이 되었다.
정화가 통하지 않는 강한 저주.
그리고 어떤 저주에도 물들지 않는 강력한 정화능력.
모순되는 두 개의 힘이 충돌하니, 서로를 밀어낼 수밖에.
사비나는 그제야 알렉세이가 왜 그녀를 이 마을로 보냈는지 알아차렸다.
단순히 에르잔에게 임무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른 명분을 들어 에르잔을 이 마을로 보내고, 로스카옌에게 명령하여 목걸이를 넘기도록 하면 저주의 반동은 계승될 테니까.
사비나의 저주의 힘은 에르잔의 정화의 힘이 통하지 않을 만큼 강력해졌다.
그래서 에르잔은 저주의 화신인 사비나를 정화할 수가 없다.
또한, 에르잔은 그의 정화능력으로도 저주를 정화할 수 없기 때문에, 저주로 보호받는 알렉세이의 곁에 다가갈 수 없다. 저주와 정화의 힘이 서로를 튕겨내니, 주술도구가 달라붙어 효력을 상실할 가능성은 사라지는 셈이다.
사비나는 목을 움츠렸다. 몸을 감싼 천과 머리카락 때문에 목걸이는 어차피 보이지 않지만,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녀가 꿀꺽, 침을 삼키고는 에르잔의 앞으로 다시 걸어 나왔다.
“……처음부터 철저하게 계획했던 거군요.”
“신중한 성격이니까 말이야, 나는.”
“내 저주를 더 강하게 만들고, 에르잔을 제물로 삼으면, 나와 에르잔을 둘 다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요?”
“생각? 생각이 아니야. 그건 당연한 사실이지.”
알렉세이가 사비나를 바라보며 다시금 팔을 뻗었다.
“네가 에르잔을 사랑하는 것처럼, 당연히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진 운명이란다.”
“……그래서 내게, 무엇을 바라죠?”
“말하지 않았니. 이 자리에 남아 있는 것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라고.”
욕망의 저주에 잠겨, 자신의 죽음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환상 속에 빠져들도록.
“에르잔. 나를 용서해 달라고는 하지 않을게요.”
“예?”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구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도와주면, 안 되나요?”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