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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속의 불-166화 (166/189)

166화

옷 너머로도 붉은 피가 흥건히 배어난 것이 보일 만큼 처참한 모습의 바르셀다가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표정부터 목소리까지 아주 멀쩡해 보이는 나자예프는 내내 힘을 들이지 않고 바르셀다에게 기대고 있다가, 바르셀다가 휘청거릴 때만 얼른 왼발을 내디뎌 부축해 주었다.

“거봐, 바르셀다. 이 형이 함께 오지 않았으면 너 벌써 몇 번 굴렀을걸. 나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짐만 되는 나자예프가 없었으면 이렇게 힘들게 절뚝거리며 걸어올 것 없이 뛰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르셀다는 너무 숨이 차서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콜록거리는 바르셀다의 등을 두드리던 나자예프는 사비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손을 흔들었다.

“무사했구나, 사비나! 걱정했어. 내 팔다리가 이 모양만 아니었어도 어제 널 쫓아서 따라갔을 텐데.”

“……어떻게, 된 거예요?”

“이야기하자면 긴데, 지금 느긋하게 상황 설명을 할 때는 아니지 않니? 우선 알렉세이 형을 막아야지.”

나자예프가 알렉세이를 가리키자, 이제까지 한 번도 그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았던 알렉세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자예프. 네가 나를 막겠다고?”

“물론 내가 막는다는 소리는 아니야. 안타깝게도 나는 부상자라서.”

오른쪽 팔다리가 멀쩡했다면 아마도 공격이 아니라 도망을 쳤을 나자예프는 전혀 안타깝지 않은 표정으로 자신의 처지를 변명했다.

“하지만 15년 동안 함께 저주를 견뎌 낸 우리 마을 사람들의 단결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알고 있지.”

나자예프는 자신에게 온갖 집기를 던지며 욕을 하고 쫓아왔던 마을 북쪽의 여자들을 쳐다보았다. 그녀들 대다수의 옷에 피가 묻어 있었으나 부상을 입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움직이기 힘들어 보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사비나가 건 욕망의 저주에서 억지로 깨어난 탓에 몸에 무리가 온 건가? 카이라트는 질질 끌려온 탓에 바닥에 엎어져 있었고, 아페티트는 어떤 주술에 걸린 건지 못이 박힌 것처럼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 있었다.

나자예프의 눈이 빠르게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했다.

“네나뷔스테, 네게 선봉을 맡길게! 우리를 이끌어 줘!”

“닥쳐, 나자예프! 너 때문에 산통 다 깨잖아!”

육체적으로 가장 멀쩡한 데다 이 상황에서 가장 의지가 되는 네나뷔스테를 부추겼다가, 카밀라에게 욕만 얻어먹고 나자예프는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기회를 노리고 있던 네나뷔스테의 무게중심이 앞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린 바르셀다가 얼른 그녀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혼자서는 위험해요. 뒤로 물러나요!”

“뭐야, 바르셀다! 너야말로 갑자기 뛰어들지 마!”

네나뷔스테가 휘두른 갈퀴가 바르셀다의 정수리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지지대를 잃은 나자예프는 자기가 찔린 것도 아닌데 혼자서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무슨 짓이야, 죽을 뻔했잖아!”

갈퀴에 얻어맞을 뻔한 건 바르셀다고, 갑자기 뛰어드는 바람에 엉뚱한 사람을 해칠 뻔한 건 네나뷔스테였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놀란 것이 더 중요했던 나자예프는 주먹으로 땅을 내리치며 역정을 냈다. 물론 그 누구도 나자예프를 신경 쓰지는 않았다.

“알렉세이 형. 형도 제발 그만해.”

“나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바르셀다.”

“더 이상 우리 마을 사람을 해치지 마.”

“내게 명령하는 거니?”

“협상하는 거야. 그러면 나도…… 우리도, 형을 불안하게 하지 않을 테니까.”

바르셀다의 말에 알렉세이가 코웃음을 쳤다.

“불안? 불안이라. 내가 고작 너희들의 존재에 불안을 느낀다고 생각하나?”

“그래서 혼자서 온 거 아니야? 다른 사람은 아무도 믿을 수 없어서.”

바르셀다의 지적에 내내 웃고 있던 알렉세이의 표정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검은 눈동자 속에서 얼핏 반짝이는 붉은 빛이 바르셀다를 위협하듯 날카롭게 뻗어 나왔다가 사그라들었다.

착시현상이다. 바르셀다는 떨리는 숨을 억누르며 진중한 목소리로 알렉세이를 설득했다.

“나는 살고 싶어. 우리 마을 사람들이 더 이상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그리고…….”

“그리고?”

“형이 더는 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해.”

의외의 대답에 알렉세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바르셀다의 대답에 나자예프도 놀란 듯 입을 벌렸다.

“야, 바르셀다…… 너는 아직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나자예프의 지적에도 바르셀다는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문 채로 알렉세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반쪽뿐이라 해도 피가 섞였기 때문일까. 외모는 전혀 닮지 않았는데, 알렉세이는 바르셀다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그래, 바르셀다. 너는 착한 아이였지.”

“알렉세이 형…….”

“하지만 바르셀다. 힘도 지혜도 없는 인간에게 선의란 재앙에 지나지 않아.”

“……뭐?”

알렉세이가 바르셀다를 향해 한 걸음 가까워졌다. 깃펜보다 무거운 것을 들어 본 적 없을 법한 고운 손등이 바르셀다를 향하자, 바르셀다의 입에서 울컥 피가 뿜어져 나왔다. 가슴 쪽 옷자락이 찢어지며 드러난 가슴에 얼룩처럼 피멍이 번졌다. 꼭 무슨 거대한 쇠구슬에 얻어맞은 것 같은 자국이었다.

“어, 떻게…….”

“악한 인간이 어리석은 건 괜찮아. 그러면 대비책을 세울 수 있으니까. 악한 인간이 무력한 것도 괜찮지. 그건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으니까. 주위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바르셀다를 향해 알렉세이가 발끝을 치켜들자, 피투성이였던 무릎이 움푹 파였다. 바르셀다는 비명을 지르려다 혀를 깨물었다. 핏발이 선 붉은 눈이 제 형을 향했다.

“하지만 바르셀다. 선량한 인간이 어리석고 무력하다면, 그건 주위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야. 어리석은 인간의 선의는 모두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무력한 인간의 선의는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단다.”

“허억…… 헉…….”

“네가 어리석게 입을 놀리고, 무력하게 지켜보지만 않았더라도 이 마을은 평화로웠을 거야. 그 사실을 잊은 거니?”

바르셀다가 목격한 것. 로스카옌과 올가의 정사 장면.

그것을 알렉세이에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이 마을을 엉망으로 만들 일도 없었다는 걸까.

피를 토하며 숨을 헐떡이는 바르셀다를 내려다보며, 알렉세이가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놈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지. 무력한 놈은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벌려 놓고. 나를 막을 힘도, 지혜도 없으면서 나를 분노하게 한 책임은 저야 하지 않겠니? 바르셀다.”

“그 전에 동생을 괴롭힌 것부터 반성해야 하지 않아, 아저씨?”

알렉세이에게 갈퀴를 겨눈 자세 그대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던 네나뷔스테가, 바르셀다의 등을 밟았다. 바르셀다가 더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보다 키가 큰 알렉세이를 후려치기 위해 준비 자세를 취한 거였다.

녹이 슬었다고는 하나 사람의 피부쯤은 간단히 찢어 버릴 수 있는 철로 된 갈퀴를 보고도, 알렉세이는 조금도 방어하려는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 녹슨 갈퀴로는 내 옷깃조차 찢을 수 없어, 네나뷔스테.”

“옷 찢을 생각 없어. 머리를 후려칠 거거든.”

“기세는 좋다만, 역시 머리가 나빠. 네가 내게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생각 같은 거 안 해. 방해되는 걸 치울 뿐이야.”

네나뷔스테의 자주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사비나는 네나뷔스테의 표정에서 살의를 읽었다. 그러나 그건 네나뷔스테가 처음 사비나를 만나, 칼을 겨누었을 때와는 다른 감정이었다.

제 동생들을 지키기 위해 살인도 불사하겠다는 각오가 아니라.

동생을 상처 입히고 배신하는 형을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증오였다.

“역시 너에게 증오의 핵을 심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어, 네나뷔스테.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역량 밖의 일에 나서는 데도 주저함이 없지.”

“입 다물어. 아저씨.”

네나뷔스테는 다른 사람들과 협공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알렉세이가 뭔가 술수를 쓸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니 겁도 없이 혼자서 이 마을을 찾아왔겠지.

알렉세이가 어떤 수를 써서 바르셀다에게 부상을 입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닿지도 않았는데 바르셀다의 가슴에 피멍이 들고 무릎이 아작 난 것으로 보아 자신이 휘두른 갈퀴도 산산조각이 날 것 같다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완벽한 주술은 없지.’

시간이 멈춰 나이를 먹지 않는 마을에서도, 머리카락은 계속해서 길었다. 손톱도 자라났다.

어떤 병에도 걸리지 않고 상처를 입어도 금방 나아버리는 마을에서도, 찢어진 옷은 알아서 수선되지 않았다. 팔이 잘리면 도로 붙지 않고, 목이 잘리면 죽는다.

그녀가 품고 있었던 증오의 핵조차, 아주 일시적이었으나 흔들린 적이 있었다. 사비나가 남쪽 우물에서 기어 나왔을 때.

제 동생들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서슴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네나뷔스테는 처음으로 겁을 먹고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을 보면, 그 어떤 주술도 <완벽>하지는 않은 셈이다.

알렉세이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주술을 감싸고, 어떤 주술로 바르셀다를 공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모든 공격으로부터 알렉세이를 지켜 주는 것은 아닐 터.

네나뷔스테의 생각을 읽었는지 알렉세이가 빙긋 웃었다.

“아무래도 직접 보여 줘야 믿겠구나. 자, 좋을 대로 휘둘러 보렴.”

“아저씨 돌머리가 어디까지 버텨 낼지 궁금한데.”

갈퀴를 쥔 네나뷔스테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알렉세이가 그녀를 향해 휙 고개를 들이밀었다. 와자작. 알렉세이의 머리에 갈퀴가 닿기도 전에 갈퀴의 자루가 부러졌다.

그리고.

“……악!”

부러진 갈퀴를 쥐고 있던 네나뷔스테가 튕겨 나갔다.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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