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자아, 사비나. 착하지? 아버지 말을 들으렴."
“사비나 아가씨, 저자의 말을 들을 것 없습니다!"
“예의가 없구나, 에르잔. 겉보기에는 이래도 내가 네 숙부뻘은 되는데 말이야."
“전 당신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알렉세이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관계 없다. 저 남자는 이제까지 사비나를 속여 온 남자가 아닌가.
만약 정말로 에르잔이 살아남은 콘바야젠 가문의 후손이고, 알렉세이와 피가 이어진 관계라고 한들 그가 흔들릴 이유는 없다. 에르잔이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은 무스코바예프 보육원에서 자랄 때였으니까.
기억나지 않는 가족, 기억나지 않는 가문, 바랐던 적도 없는 지위나 명예가 주어진다고 한들 에르잔은 달갑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정말로 콘바야젠 백작가의 핏줄인가 아닌가, 알렉세이와 혈연관계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아니라.
알렉세이가 사비나를 속여 왔고, 그녀를 저주의 화신으로 만들어 원치 않는 살생을 강제해왔다는 사실이다.
“당신이 사비나 아가씨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밝힌 이상, 더는 아가씨의 행동을 강제하실 수 없을 겁니다."
“황실 기사직을 내놓겠다면서? 그럼 자네가 더 이상 사비나의 호위기사로 있을 명분도 없는 거야."
“당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뿐이지요. 저는 사비나 아가씨를 모시기로 맹세했습니다."
에르잔의 단호한 답변에 알렉세이가 작게 감탄했다.
“역시 자식 같은 건 낳아 봐야 소용없다니까. 부모를 죽인 여자를 저렇게 싸고도는 것을 죽은 콘바야젠 백작 부부가 봤더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부모를 죽인 여자.
에르잔의 뒤에 숨어 있던 사비나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피눈물을 흘리고도 남겠지? 제 자식이 자신을 죽인 여자에게 빠져 잃어버린 성과 지위를 되찾을 기회도 날려 버리는 것을 보면."
“콘바야젠 공작. 당신이 하는 말은 믿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나는 지금 사비나에게 말하고 있는 거야."
알렉세이가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에르잔의 뒤에 가려진 사비나를 보기 위해서였다.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사비나는 에르잔의 옷자락에 얼굴을 폭 파묻었다. 여전히 검은 눈을 한 알렉세이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가장 깊은 절망이라고 생각했던 과거가 산산히 부서진 자리에, 더 큰 절망이 자리하고 있음을 깨달아서일까.
“사비나. 아버지의 말을 믿지 않는 거니?”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니잖아요…….”
“하지만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는 진실이었지. 그렇지?”
알렉세이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사비나를 향해 가장 부드러운 음성으로, 가장 잔혹한 말을 내뱉었다.
“네가 진실하다고 믿는 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단다.”
진실하다고 믿는 것. 사비나가 간절히 원하던 것. 절망을 벗어날 수 없는 그녀가 미쳐 버리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단 하나의 위안.
하나뿐인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믿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에게 닿아도 괜찮은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단지 주술도구로 저주를 피하고 있을 뿐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더는 그를 아버지로 여길 이유도, 그의 명령에 따를 이유도 없는데.
믿음이 무너졌는데.
믿음이 무너졌기 때문에, 사비나는 알렉세이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
‘내가 정말로 콘바야젠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에르잔의 자리를 빼앗은 거야.’
에르잔의 부모를 죽이고, 에르잔의 자리를 빼앗고, 마땅히 그가 물려받았어야 할 지위를 승계받을 것이다. 사비나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에르잔의 옷자락을 붙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사람이 내 부모님을 죽게 했는데…… 내게 일평생 살인을 하도록 강요했는데……!’
사비나는 부모의 원수인 알렉세이에게 복수할 수가 없었다.
알렉세이는 콘바야젠 공작이니까.
사비나와는 피 한 방울 이어지지 않은 남이지만, 에르잔에게는 반쪽일지언정 유일한 혈육일 테니까.
콘바야젠 공작은 딸의 존재만을 공표했고, 그녀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밝혔다.
부모가 죽어 천애 고아가 된 에르잔에게는 신분을 증명할 수단이 없었다.
그것은 즉, 에르잔이 콘바야젠의 성을 되찾으려면, 귀족이 되려면,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면, 사비나와 결혼하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겉으로는 사비나의 남편으로서 아내의 성을 따르는 셈이지만, 실제로는 원래 마땅히 그가 가졌어야 했던 것을 되찾는 것이다.
그러면 대가 끊어진 콘바야젠의 피를 잇는 것도 가능하다.
에르잔은 어차피 보육원과 기사양성소를 거쳐 자라왔기에 가문도 지위도 필요 없다고 말하지만, 과연 진실은 어떨까.
황실 기사직을 내놓으면서까지 사비나를 주인으로 섬기겠다고 맹세했지만, 과연 미래에는 어떻게 될까.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진짜 아버지>라는 믿음이 무너졌던 것처럼.
에르잔의 사비나에 대한 믿음도 무너질 날이 오면 어떻게 될까.
사비나는 감았던 눈을 떠서, 알렉세이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어린아이였던 사비나의 일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조카라는 에르잔을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땅에서 자라게 놔두고도 단 한 줌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듯이 보였다.
부모님의 원수.
자신의 인생을 망친 원수.
극악무도한 학살자.
가증스러웠다. 보는 것만으로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가장 저주스러운 것은, 저 뻔뻔한 남자의 모습에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는 사실이다.
사비나가 부모의 원수이자 자신의 일생을 엉망으로 만든 알렉세이를 증오하는 것처럼.
에르잔에게는 사비나가 그런 존재가 아닌가.
그렇다면 언젠가, 에르잔이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되면. 자신의 삶을 아끼게 되면,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빼앗겨야만 했던 과거에 미련을 두면.
지금 사비나가 알렉세이를 보듯, 에르잔도 사비나를 증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될까.
에르잔에게 물어보면 절대 그렇지 않을 거라고 대답하겠지만, 그것은 지금의 대답일 뿐이다.
미래에도 같은 답변을 들려줄까?
사비나는 자신이 없었다.
에르잔을 신뢰하기엔, 그녀 자신이 너무 겁이 많았다.
“내가…… 뭘 하면, 되는 건데요?”
“사비나 아가씨!”
창백한 얼굴로 에르잔의 만류와는 정반대로, 알렉세이는 이제까지 보던 것 중에 가장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간단해. 욕망의 저주를 이 땅에 풀어 버리면 된단다.”
“그러면 뭐가 달라지죠?”
“괴로운 과거를 잊고, 편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이루어지지. 그 정도는 너도 알지 않니?”
사비나가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던 욕망의 거울.
괴로운 일은 잊고, 편해지고 싶다는 욕망에 이끌려 그들은 잠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단지 잠드는 선에서 멈출 수 있었던 것은, 에르잔의 능력으로 저주와 저주받는 대상 사이에 얇은 보호막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에르잔이 그들을 보호해 주지 않는다면, 욕망의 저주에 잠식당한 이들은 말 그대로 욕망의 늪에 빠져 익사해 버릴 것이다.
“자, 사비나. 네가 이들을 구원하고, 이 땅에 영원한 평화를 가져오는 거야.”
“그게 무슨 되도 않는 헛소리야!”
뒤편에 있던 첨탑의 문이 열리며 두 여자가 등장했다.
아니, 원래 잠금쇠가 박살 나 있던 문을 겨우 틀에 끼워 맞춰 닫아 두었던 것을 발로 차낸 격이니 문을 열었다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을까.
두 쪽으로 갈라진 썩은 문을 짓밟고 서 있는 키가 큰 백금발의 여자.
그리고 그 뒤에 숨어서 고개만 쏙 내민 여자가, 알렉세이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사비나는 벌써 우리 마을을 구원해 줬어! 구원하고도 남았지!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하니까 외부인은 꺼져!”
“……여전히 버르장머리가 없구나, 카밀라."
“염치도 양심도 없어서 정신만 줄줄이 나간 어느 집 맏아들한테 듣고 싶지 않은 말인데, 그건.”
카밀라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동쪽 첨탑을 넘어 광장까지 울려 퍼졌다. 몸은 분명 겁먹은 듯이 네나뷔스테의 뒤에 숨어 있는데 목소리는 어찌나 우렁찬지. 사비나는 얼이 빠져서 에르잔의 뒤에 숨는 것도 잊고 카밀라를 바라보았다.
“사비나, 넌 충분히 할 만큼 했잖아. 나머지는 우리한테 맡겨!”
“맡기라뇨, 무엇을…….”
당혹스러워하는 사비나에게 엄지를 척 내보인 카밀라는, 알렉세이의 뒤에 기진맥진해서 쓰러져 있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일갈했다.
“다들 연장 들어!”
“뒤에서 시끄럽게 소리치지 마, 카밀라.”
네나뷔스테가 자신의 뒤에 매달리듯 달라붙어 있던 카밀라를 밀어내며, 갈퀴를 움켜쥐었다. 거뭇한 피가 엉겨 붙은 녹슨 갈퀴를 하늘 높이 치켜든 네나뷔스테가 그것을 아래로 내리찍자, 그녀가 밟고 있던 망가진 문이 쩍 갈라졌다.
“그때처럼 우리가 무서워서 벌벌 떨 줄 안 모양인데, 알렉세이 아저씨. 당신은 지금 혼자야. 우리는 여럿이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네나뷔스테?”
“여자들만 남아 있다고 너무 거만 떨지 말란 뜻이야. 병사들만 없다면, 당신 같은 거 아무것도 아니니까.”
네나뷔스테가 다시 갈퀴를 치켜들었다. 카밀라는 마땅한 무기가 없어 떨어진 벽장 문짝을 방패처럼 들고 있었다. 그 뒤로 아이베크와 자니베크가 카밀라의 뒤를 지지하듯 서 있고, 줄디즈는 쓰러진 오딜의 곁에 앉아 있었다.
페고라와 카림은 어디에 있을까? 사비나의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그들의 모습을 슥 보고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역시 겁이 없단 말이야. 한 번 더 보여 줘야 할까?”
“그만해!”
알렉세이가 네나뷔스테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을 때, 뒤에서 바르셀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