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에르잔은 언젠가 사비나가 건넸던 말을 떠올렸다.
에르잔에게 정화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사비나가 저주에 물든 꽃을 정화해 보라고 권했을 때.
그는 결국 저주만을 없애지 못하고 꽃 자체를 태워 없애 버렸지만, 실패했다며 우울해하는 에르잔과는 달리 사비나는 그를 격려해 주었다.
그는 아주 굉장한 사람이라면서.
<만약 세상이 에르잔 같은 사람들로 가득하다면, 더 이상 귀족 가문에는 주술사가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주술사는 가문에 위협이 되는 저주를 막아 내는 존재. 그래서 귀족 가문은 저마다 가문에 주술사를 둠으로써 서로를 견제한다.
알렉세이는 그런 귀족들을 발아래 무릎 꿇리기 위해 사비나를 이용했다.
주술사조차 막아낼 수 없는 강력한 죽음의 저주를 흩뿌리는, 죽음의 화신을.
에르잔은 정확히 그 반대편에 있었다.
주술사조차 막을 수 없는 저주를 내리는 죽음의 화신 사비나.
죽음의 화신이 내리는 저주마저도 막아 낼 수 있는 에르잔.
만약 그 피가 희석되어 능력이 약해지지 않았더라면, 그 어떤 저주도 통하지 않으니 저주의 화신 같은 것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터인데.
***
“아으윽…….”
알렉세이가 떠나 버린 빈 광장에서, 바르셀다는 진흙 바닥에 손톱을 박아 넣고 신음했다. 다리가 반대로 돌아간 것처럼 이상하게 꺾여 버린 통증이 뒤늦게 엄습했다. 뼈가 뒤틀리고 근육이 엉킨 통증이 전신을 옭아매고 머리를 쥐어짜는 것 같았다.
“야, 바르셀다. 너무 아프면 그냥 정신줄을 놓는 게 편해. 기절하면 덜 아프거든.”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피가 나올 만큼 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참는 바르셀다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나자예프는 도움도 되지 않는 소리를 지껄였다.
“윽…… 지금, 그런 농담이, 나와……?”
“농담 아닌데. 로스카옌이 그랬단 말이야. 너무 아플 때 의식을 잃어버리는 건 고통을 회피하려는 인간의 방아깨비라고.”
“……방어기제겠지…….”
“그래, 아무튼 그런 거. 생존본능이랬어.”
바르셀다가 바람 빠지는 듯한 숨소리를 내뱉었다. 웃음 같은 것이 아니다.
육체적인 고통과 심리적인 압박을 받는 상태에서 지나치게 어이없는 상황을 마주하면 긴장이 풀려 허탈한 한숨이 빠져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과연 회피의 달인 나자예프.
누구보다도 겁이 많은 형 나자예프는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는 방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형을 둔 동생 바르셀다는, 자신이 형과는 달리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 깨달았다.
바르셀다는 엎어져서 바닥을 기던 몸을 옆으로 돌려, 이상하게 꺾여 있던 다리를 크게 휘둘러 바닥에 내리꽂았다.
빠그닥. 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며 꺾인 다리가 덜렁거렸다.
“아윽!”
“미친, 야! 바르셀다! 너 죽으려고 환장했어?”
“반대, 쪽으로…… 한 번 더…….”
에르잔이 오기 전까지는 마을에서 가장 장신이었던 젊은 청년의 다리가 하늘을 향해 뻗었다가, 다시 땅에 처박혔다. 뒤틀린 다리가 충격을 받아 또 다른 방향으로 삐걱거렸다.
바르셀다가 뒤틀린 다리를 부딪힌 충격으로 원래대로 되돌릴 생각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나자예프는 얼른 몸을 왼쪽으로 돌려 땅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바르셀다! 너 그러다 다리 나간다!”
“읏…… 아악!”
“야, 보는 내가 더 무서워! 뼈 맞출 거면 그냥 나한테 도와 달라고 해!”
그럼 쓸데없는 농담을 할 게 아니라 먼저 손을 내밀지 그랬냐는 지적은, 할 상황이 아니었다. 바르셀다는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 대신 어깨와 허리를 이용해 몸을 물구나무 세우듯 거꾸로 세웠다가, 바닥에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바르셀다, 바르셀다! 그만해!”
제 동생이 죽을까 봐 걱정되는 건지, 옆에서 사람 죽는 모습을 보는 게 두려운 건지, 아마도 나자예프라면 후자일 테지만, 그가 창백해진 얼굴로 바르셀다를 만류했다.
오른팔과 다리는 저주로 물들어 움직이지 않는 까닭에, 나자예프는 왼팔로 땅을 짚어 몸을 질질 끌며 바르셀다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나자예프가 바르셀다의 몸에 팔을 뻗기도 전에, 커다란 발이 나자예프의 바로 코앞에서 내려와 바닥을 직격했다.
“무슨 짓이야, 바르셀다! 맞을 뻔했잖아! 내 코뼈 나가면 책임질 거야?”
“크흑…….”
나자예프의 비난인지 절규인지 모를 소리를 무시하며 바르셀다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제대로 다리를 붙잡고 돌아간 뼈를 맞추는 것도 아니고, 다리를 이리저리 부딪혀서 되돌려 놓은 모양새가 멀쩡할 리가 없었다. 바르셀다의 무릎은 피범벅이고, 정강이에는 엉킨 근육이 울뚝불뚝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허억…… 헉…… 됐어…….”
“되긴 뭐가 돼, 내 심장이 아직도 벌렁벌렁하는데!”
통증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지만, 다리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바르셀다는 무릎을 세워 몸을 일으켰다. 짐승처럼 네 발로 섰다가, 입안에 고인 피를 침과 함께 토해 내고는 쭉 몸을 일으켰다.
“미친…… 바르셀다! 너 그 몸으로 뭘 어쩌려고! 무리하지 마!”
“무리는, 15년 전부터 실컷 했어…….”
갈고리 같은 통증이 귀에 걸려 살을 찢는 것 같았다. 몸을 속박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마치 뼈에 철심을 박아 넣은 것처럼 온몸이 삐걱거렸다. 흘러내린 피가 발자국을 붉게 물들였다.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러나 견디지 못할 고통은 아니었다.
15년 동안 동쪽 첨탑의 지하에 갇혀, 죽지도 못하는 몸으로 핵을 품은 고통과 나자예프가 받아야 할 저주의 반동까지 대신 받아 내야 했던 시절에 비하면, 부러진 뼈를 억지로 맞추고 근육이 뒤틀린 다리를 이끌며 앞으로 나아가는 통증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알렉세이 형을, 막아야 해…….”
“막기는 뭘 막아. 너 방금 형한테 뻗댔다가 다리가 휙 돌아간 거 잊었어? 또 앞에서 깝죽거렸다간 진짜 죽어!”
“가만히 있으면, 정말로 죽어.”
알렉세이는 바르셀다만큼 힘이 세지 않았다. 그런데 손조차 대지 않고, 단지 가까이 다가온 것만으로 바르셀다의 다리를 꺾어 주저앉혔다.
어차피 쓸모없는 나자예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광장을 가로질러 교회로 향하는 알렉세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바르셀다는 확신했다.
알렉세이는 혼자서 이 마을에 찾아왔다.
겁이 많고 신중한 그가 혼자서 찾아왔다는 건, 병사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이 마을을 끝장낼 수 있는 방법을 손에 넣었다는 뜻이다.
바르셀다의 다리를 어떻게 꺾어 버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술은 어차피 기이한 힘이 아닌가. 알렉세이가 어떤 이상한 능력을 얻었는지는 몰라도, 이곳까지 찾아온 이상 그가 앞으로 무슨 짓을 벌일지는 자명했다.
“우리를 전부 죽이려고…… 과거의 흔적을 전부 지우려고 온 거야.”
“거, 흑역사를 지우겠다는데 그냥 지우게 내버려 둬! 일단 우리가 살고 볼 일이지, 무슨 진실을 후대에 전해야 하는 거창한 사명 같은 건 우리한테 없잖아!”
“그래서 죽겠다고?”
바르셀다가 핏자국이 번진 눈가를 찌푸리며 쳐다보자, 나자예프는 조금 겁을 집어먹었는지 기죽은 듯이 말을 어물거렸다.
“얌전히 말을 들으면…… 살려 주지 않을까?”
“알렉세이 형이 우리를 남겨 둘 것 같아?”
살려 둘 것 같아?가 아니라 남겨 둘 것 같아?다.
알렉세이가 지우려는 과거에는 그 과거를 구성하는 인간은 물론, 그것을 기억하는 인간까지 전부 포함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나자예프는 물고기처럼 펄떡거리며 몸을 일으켰다가 도로 엎어졌다.
“바르셀다, 나도 같이 가!”
“형은 거기서 숨어 있어. 잘하잖아, 혼자 쏙 빠지는 거.”
“바르셀다, 너 형을 너무 무시한다? 칼을 휘두르는 네나뷔스테 앞에서 맨손으로 맞선 것도, 너를 구하러 첨탑 지하까지 쫓아 내려간 것도 나라는 사실을 잊었어?”
저주의 핵을 흡수한 것은 사비나고, 그녀를 보조한 것은 에르잔과 오딜이며, 자신은 그다지 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깔끔하게 잊어버린 나자예프가 허겁지겁 기어와 바르셀다의 발목을 붙잡았다.
“마을 북쪽에서 용감하게 사비나를 구해 낸 것도 나거든? 예전과는 다르다고!”
“……그래서, 서기도 힘든 나한테 형을 또 업으라고?”
“아니, 너를 부축하겠다는 거잖아! 나 왼팔이랑 왼쪽 다리는 비교적 멀쩡하니까, 나한테 기대라고.”
“혼자서 서지도 못하면서 무슨 소리야? 내가 형을 부축하는 거겠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바르셀다는 나자예프의 멱살을 잡고 끌어 올려, 그의 팔을 어깨에 두르고 반대쪽 겨드랑이 부분을 지지해 일으켜 세웠다.
“믿어 주는구나, 바르셀다. 이 형이 너의 고통을 함께 짊어질게.”
“아무리 봐도 내가 형의 무게를 짊어지는 꼴인데.”
“우리는 한배에서 난 형제잖아. 함께 살아야지.”
죽을 땐 따로라는 뒷말이 들리는 것 같았으나 바르셀다는 무시하고 걸음을 내디뎠다. 저주에서 풀린 까닭에 예전처럼 몸이 금방 회복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목에 핏대가 불거지고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는 기절하지 않았다. 이성을 잃지도 않았다.
‘버틸 수 있어. 분노로 이성을 잃고 괴물이 되었을 때조차, 고통으로는 기절하지 않았으니까…….’
바르셀다의 붉은 눈동자가 사위를 훑었다. 문이 열린 교회는 텅 비어 있었다. 핏자국은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한 사람분 정도일까.
교회에 아무도 없는 것은 아마도, 알렉세이가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이 아니라 끌고 나갔기 때문이리라.
“다행이야. 죽지 않아서…….”
“그럼. 내가 이래 봬도 우리 마을에서 15년 동안 혼자 저주를 피하며 살아남은 행운아인데. 그렇게 쉽게는 안 죽지. 이 형의 목숨은 질기다고, 바르셀다.”
뭐든지 자기한테 하는 말로 받아들이는 게 나자예프의 버릇인 탓인지, 아니면 이 상황에서 그 나름대로 동생의 긴장을 풀어 주려고 쓸데없는 농담을 하는 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나자예프의 말이 아니었다.
바르셀다는 멀리 동쪽 첨탑을 바라보았다.
분명 한낮이니 해는 남쪽에 떠 있어야 하는데, 동쪽 첨탑의 꼭대기가 눈부신 은빛으로 반짝였다.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