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63화 (163/189)

163화

“뭐라고요?”

“같은 피를 이어받았으니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닐 텐데,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나? 천하게 자라서 두 번 말해 줘야 이해를 할까? 에르잔 무스코바예프.”

아니, 하고 마지막 말을 가볍게 부정한 알렉세이는 호칭을 정정했다.

“에르잔 콘바야젠.”

에르잔의 뒤에 있는 까닭에 사비나는 에르잔의 표정을 살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는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검을 쥔 것도 아닌데 커다란 손에 힘줄이 불뚝 돋아날 만큼 세게 주먹을 움켜쥔 것이 사비나의 눈에 들어왔으니까.

“지금, 뭐라고…….”

“이런. 머리가 나쁜 게 아니라 귀가 안 들리는 거였나? 같은 말을 여러 번 하는 것은 번거로운데.”

알렉세이가 피곤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왜, 배속도 받지 못한 신참 기사인 자네를 찾아갔다고 생각하나?”

신체검사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아, 에르잔은 대기실에 남게 되었다.

무엇이 부적합인지도 모르는 채로, 언제 자신을 부르는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채로. 하염없이 기다리던 그를 찾아온 것이 알렉세이, 당시의 콘바야젠 백작이었다.

“내가 왜 자네를 이 마을로 보냈다고 생각해?”

“……사비나 아가씨의 호위를, 위해서…….”

“사비나에게 요양을 권한 건 자네가 찾아온 바로 그날 아침이야.”

사비나를 이 마을로 보내기 위해 호위기사로 에르잔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에르잔을 이 마을로 보내기 위해, 사비나의 요양이라는 명분을 내건 것이다.

“사비나. 에르잔에게 듣지 못했니? 에르잔에게 명령한 것이 먼저였는데.”

에르잔의 등에 가려 얼굴도 보이지 않는 사비나를 향해 묻자, 뒤에서 작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옷자락을 꽉 쥐고 있는지, 옆 자락이 우그러진 모양새가 볼썽사나웠으나 알렉세이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기억나니? 내가 너에게 요양을 권한 날, 에르잔이 미리 도착해 대기하고 있었던 것을.”

목을 매고도 죽을 수가 없어 하염없이 허공을 바라보던 사비나를 끌어 내리며, 알렉세이는 그녀에게 요양을 권했다.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히고, 손수 머리를 빗겨 준 뒤 내려온 1층 홀에서 사비나는 에르잔을 만났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 이 마을로 왔다.

“미리…… 결정되어, 있었군요…….”

“슬슬 필요했거든.”

알렉세이가 에르잔을 찾아가 경호 임무를 맡긴 날로부터 사흘 뒤, 그는 사비나에게 휴양을 권유했다.

사비나를 생각해서 휴가를 준 게 아니라, 에르잔을 발견했기에 사비나를 붙여 보낸 것이다.

“새 <제물>이.”

에르잔을 그 마을로 보내, 로스카옌의 목걸이를 이어받게 하기 위해서.

“제물, 이라고요?”

“자네에게 전해진 이상 제물은 아니지. 저주의 반동을 대신 받아도 어차피 통하지 않으니까.”

알렉세이가 마을 밖으로 나와서도 나이를 먹지 않는 건 제물인 로스카옌이 대신 세월을 감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스카옌의 나이에, 알렉세이의 나이까지 더해지자 로스카옌은 급속도로 노쇠하기 시작했다. 저주를 피하기 위한 제물이 금방 죽어 버려서야 의미가 없지 않나.

알렉세이는 고민했다. 로스카옌이 죽으면 누구를 다음 제물로 삼아야 하는가.

두 사람분의 세월을 감당하는 자의 수명은 급격히 짧아진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젊은 사람을 제물로 선택한다고 한들, 그가 저주를 감당할 수 있는 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알렉세이는 뒤늦게 탄식했다.

“콘바야젠의 핏줄이 남아 있으면 방해가 될까 봐 다 죽여 버렸는데, 너무 성급했어. 한 명쯤은 살려 둘걸 그랬다고 후회했지.”

“설마, 황실 기사단에서 이루어진 <신체검사>가…….”

“운이 좋았어. 콘바야젠의 피가 옅어졌다면 발견할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야.”

“제가 저주에 물들지 않는 체질인 것이…… 그 가문의 일원이라는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아니,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야. 그래서 유일하게 주술사 없이도 귀족이 될 수 있었으니까.”

콘바야젠 백작 가문에 주술사가 없었던 이유.

주술사가 없어도 귀족이 될 수 있었던 이유.

그들에게는 주술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음. 아니지. 콘바야젠 가문의 인간에게 주술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귀족 가문에 <주술사가 필요했다>고 보는 쪽이 정확하겠지?”

초대 콘바야젠 백작은 아주 강력한 정화의 힘을 지닌 자였다.

그리고 그의 피에 깃든 정화의 힘은 후대에까지 이어져, 콘바야젠의 피를 이은 자는 저주에 물들지 않는 가호를 받았다.

그래서 다른 귀족 가문은 주술사를 고용하기 시작했다.

주술에 걸리지 않는 콘바야젠에서 주술사를 부려 다른 가문을 저주하면 일방적으로 당하게 되니까, 귀족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주술사를 고용한 것이다.

그리고 형평성을 위해, 제국에서는 콘바야젠 가문이 주술사를 고용하지 못하도록 강제했다.

그래서 콘바야젠 가문에는 오랫동안 주술사가 없었다.

“사비나의 존재를 숨기느라 애먹었지. 대외적으로 콘바야젠 가문에는 주술사가 없다고 되어 있으니까.”

“주술사가 필요 없었다면, 어째서…….”

“대를 이어 내려오다 보면 피는 희석되지. 당연하지 않나?”

초대 콘바야젠 백작에게는 그 어떤 저주도 주술도 통하지 않는 강력한 정화의 힘이 있었지만, 콘바야젠이 아닌 다른 가문의 일원과 결혼해 자손을 낳으면서 정화의 힘은 차츰 약해졌다.

그것은 곧 세월이 흐르면 언젠가 콘바야젠 가문도 저주의 위협을 받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콘바야젠 가문은 고민에 빠졌다.

제국에서는 콘바야젠의 피에 정화의 힘이 있다는 이유로 주술사를 고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주술사를 고용하려면, 더는 자신들에게 정화의 힘이 없다는 사실을 공표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콘바야젠 가문을 공격하지 않았던 다른 귀족들이 어떻게 나올까.

범접할 수 없는 상대라고 여겼던 자신들을 우습게 여기지 않겠는가.

안전을 택할 것인가, 명예를 택할 것인가.

콘바야젠 가문에서는 두 가지 중 하나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들은 주술사를 고용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다시 초대 백작처럼 콘바야젠의 피를 강하게 만들 방법을 연구했다.

콘바야젠 가문은 다른 귀족 가문과는 결혼의 연을 맺지 않는다.

자신들의 <주술이 통하지 않는 피>가 다른 귀족에게 넘어가는 것을 경계한 그들은, 오히려 귀족이 아닌 기사나 상인의 자식들과 결혼을 시켜 자손을 보았다.

정화의 힘이 다른 가문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지만, 그것이 지속되자 콘바야젠 가문은 <평민과의 혼인을 추진하는 가문>이라며 멸시를 받았다.

“주술사가 없어서 무시를 당했다는 건, 거짓말이었군요.”

“거짓말은 아니야.”

주술사가 없었던 것도 사실.

귀족들 사이에서 무시를 당했던 것도 사실이다.

다만 후자의 근거가 전자가 아니었을 뿐.

“평민과 자꾸 피가 섞이니 괄시를 받았지. 덕분에 내 존재를 쉽게 받아들여 줬지만 말이야.”

“그럼 당신이 귀족의 피를 이었다는 게…….”

“다른 곳으로 새어 나가면 곤란했던 거지, 콘바야젠의 피가.”

그의 어머니가 고뇌하던 시간이 참으로 무의미하게도, 콘바야젠 가문에서는 알렉세이를 쉽게 받아들여 주었다. 다만 비밀을 지켜 줄 것을 당부했다.

<당신들은, 콘바야젠의 피를 강하게 만드는 게 목적이로군요.>

<아니, 연구는 성공적이야. 점점 강한 아이가 태어나고 있거든. 이번 대에 태어난 아이 중에는 초대 백작과 같은 힘을 지닌 아이가 있을지도 몰라.>

<……그렇습니까?>

알렉세이에게 너무 쉽게 비밀을 드러낸 것이 그들의 실책이었다.

혈연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도 쉬이 경계가 무너지는 것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밀을 안다고 한들, 알렉세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할 수단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으리라.

혈연이라고는 하나 알렉세이는 평민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지닌, 콘바야젠의 특성은 하나도 없는 젊은 청년.

그들도 결국, 다른 귀족들과 다르지 않았다.

일개 평민 하나가 자신들을 어쩔 수 없으리라고 자만했다.

천한 평민의 피가 섞인 콘바야젠을 다른 귀족들이 무시한 것처럼.

천한 평민의 피가 섞인 알렉세이가 자신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리라고 판단했겠지.

교만의 결과는 파멸이었다.

15년 전, 알렉세이가 아페티트를 데리고 방문하면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아페티트는 욕망의 주술 그 자체로 이루어진, 저주의 화신.

일개 주술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력한 저주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아페티트. 네 욕망을 움직일 차례다. 사람을 조종하고 싶다고 말했지?>

희석되었다고는 하나 주술의 효력이 통하지 않는 것이 콘바야젠 가문의 특성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개 주술사의 저주를 피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저주의 화신인 아페티트가 비추어 주는 욕망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알렉세이는 아페티트의 욕망을 이용해 콘바야젠 가문의 인간들을 조종했다. 그들을 조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콘바야젠 가문의 오랜 숙원, ‘예전의 강력함을 되찾고 싶다’는 바람을 이루어 주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저주의 화신은 만들 수 있습니다.>

일개 주술사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력한 저주의 화신.

죽음의 화신.

그 화신을 만들기 위해, 알렉세이는 병사들을 이끌고 마을로 와 고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아페티트를 유인해 핵으로 만들어 시간을 멈춘 주술 속에 가두고, 로스카옌을 제물로 삼아 자신을 ‘어떤 저주도 통하지 않는 몸’으로 만들었다.

<어떠한 저주도 통하지 않는 것이, 콘바야젠의 힘이라고 그랬지요?>

피를 진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초대 백작의 힘을 되찾는다는, 과거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만들면 되는 것이다.

현재를 만들면, 미래를 바꾸면, 과거는 저절로 조작된다.

그렇게 알렉세이는 콘바야젠 가문의 후계자가 되었다.

<알았다. 자네를 가주로 인정하지.>

<감사합니다.>

쉬이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알렉세이는 아주 쉽게 콘바야젠 가문의 가주가 되었다.

그래. 너무 쉬웠다. 그것이 문제였다.

<그럼 이제 당신들은 필요 없군요.>

사비나를 죽음의 화신으로 만든 알렉세이는, 콘바야젠의 피를 이은 자들을 전부 죽여 버렸다.

콘바야젠 가문의 사람들이 죽고, 콘바야젠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도 죽었다.

“15년 전, 기사단이 거의 전멸한 것도 그 때문입니까?”

“아무래도 기사들과 피가 많이 섞였으니까 말이야.”

“당신은, 대체…….”

“자네는 운이 좋아. 피가 그 정도로 강한 아이가 남아 있을 거라고는 나도 반신반의했거든.”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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