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아버지가 아니다. 그는 사비나의 가족이 아니었다.
그렇게 다정한 목소리로 잔혹한 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았다. 사비나가 알렉세이의 딸이 아니기 때문에.
진짜 아버지라면, 딸에게 그런 명령을 내릴 리가 없는데.
“이제까지 나를 속여 놓고…… 더는 속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속이다니, 사비나. 나는 너를 속이지 않았어.”
“내게 살인을 명령해 놓고!”
“너를 위한 일이었단다. 내가 황제 폐하의 대리인이 되고, 공작 작위를 받지 않았더라면 이제까지 밖으로 존재를 드러낸 적도 없는 너를 후계자로 발표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게 어떻게, 나를 위한 일이에요? 난 그런 걸 바란 적 없는데!”
후계자라니, 소공작이라니, 사비나는 그런 걸 바란 적 없다.
그저 죽기만을, 사람을 죽이는 삶이 끝나기만을 바랐다.
그녀는 부귀영화도 바라지 않았고, 명예나 권력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사비나를 위한 <미래>란 말인가.
“당장 이 마을에서 나가요. 안 그러면…….”
“안 그러면?”
알렉세이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에게는 사비나의 저주가 통하지 않는다. 죽음의 저주를 비롯해서 그 무엇도.
간밤에 궂은 비가 내려 진흙탕이 된 광장에 서 있으면서도 말끔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길이 척박해 마차로도 한참이 걸리는 데다 맹수의 습격을 받을 수도 있는데, 시종이며 하인이며 병사들을 이끌지 않고 혼자서 왔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명백하다.
이 공간의 무엇도 알렉세이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는 것.
“대체……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예요?”
“이런 짓이라니, 뭘 말하는 거니?”
“마을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해 놓고, 뭐가 부족해서 나를 데려가려는 건데요?”
“그야 너를 내 딸로 만들기 위해서지.”
올가의 딸을, 자신의 딸인 <사비나>로 만들기 위해서.
그녀와 자신이 사랑을 했다는 과거를 만들고, 그 과거를 증명하기 위한 결과물로 지금의 그녀를 세상에 내놓기 위해 알렉세이는 15년간 진실을 죽이고 환상을 만들어왔다.
이제 그 환상을 현실로 이끌어 낼 힘을 가졌는데, 무엇이 그를 막을 수 있을까.
“미쳤어…… 겨우 그것 때문에, 이런 짓을 저질렀다고요?”
“겨우라니, 사비나. 이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다고.”
“엄마에게 사랑받은 게 당신이라는 과거가 필요했다고? 겨우 그것 하나 때문에, 겨우 한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한 것 때문에, 이런 짓을……!”
“한 사람?”
알렉세이가 사비나의 말을 끊으며 되물었다.
“한 사람이라. 사비나. 한 사람 때문에 수십여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사람의 목숨은…… 목숨의 무게는, 누구나 같아요.”
“아니, 같지 않아. 소중한 하나를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초개처럼 버릴 수 있는 것이 인간이란다. 욕망을 지닌 인간 말이야.”
“누구나 당신 같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로스카옌도 같은 선택을 했는걸.”
알렉세이의 입에서 나온 로스카옌의 이름에 사비나의 어깨가 움찔 진동했다.
“로스카옌에게 물었지. 마을 모든 이들의 목숨과, 부녀지간임을 밝힐 수조차 없는 피붙이의 목숨 중 하나를 택하라고 말이야.”
15년 전 그날. 몹시도 추운 겨울날.
병사들을 이끌고 알렉세이가 마을에 쳐들어온 날, 곳곳에 지른 불꽃이 처절한 비명과 함께 타오르던 날.
네 개의 핵을 심어 넣고, 마지막으로 마을의 시간을 멈추고 영역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주술을 완성하기 위해 알렉세이는 로스카옌을 끌고 교회로 들어갔다.
<알렉세이,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게. 다른 사람들을 내버려 둬!>
<내가 네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나?>
<원하는 건 내 목숨이 아닌가. 날 죽이고 싶었던 게 아닌가! 나만 죽이면 되지 않나. 그런데 왜……!>
<착각하지 마, 로스카옌. 나는 네 목숨 따위엔 관심 없어.>
알렉세이의 손짓에 병사들이 로스카옌을 에워쌌다. 그들은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내려놓고, 로스카옌의 어깨를 잡고 눌러 바닥에 무릎을 꿇게 했다.
불안한 시선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로스카옌의 턱을, 알렉세이는 발로 걷어찼다.
<나는 너를 죽이고 싶은 게 아니야. 이 분노를 풀고 싶은 거지.>
명망 있는 귀족은 아닐지라도 콘바야젠 백작가문은 제국에서 가장 넓은 영지를 보유한 가문. 병사들을 부려 지도에도 없는 자그마한 마을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알렉세이에게 너무나도 쉽고 간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분노는 <쉽고 간단한 일>을 하는 것으로는 풀리지 않았다.
<로스카옌. 나는 너를 죽이지 않을 거야. 너 혼자 죽어서 편해지는 꼴은 속이 뒤틀려서 볼 수가 없으니까.>
<……알렉세이. 대체 뭘 하려는 건가?>
<처음엔 이 마을을 쓸어 버릴 셈이었어. 그런데 아무래도 이걸로는 내 속이 시원해질 것 같지 않아서 말이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알렉세이와 로스카옌의 눈높이가 같아졌다.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는 로스카옌을 바라보며 알렉세이가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남은 놈들을 다 죽이는 게 귀찮아졌어. 멱 따는 소리는 시끄럽고 살이 타는 냄새는 역겹고.>
살생을 멈추겠다는 말인가. 로스카옌의 검은 눈동자에 간절한 희망의 빛이 깃들었다. 죽어가는 이들의 시체를 보면서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알렉세이가 처음으로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로스카옌, 네게 선택권을 주려고 해.>
<선택이라니……?>
<네 딸을 죽이면 남은 녀석들을 살려 줄게.>
알렉세이가 비열하게 웃었다.
선택의 기로에서 괴로워하는 로스카옌을 보고 싶었다. 자신이 받았던 것 이상의 고통을 줄 셈이었다.
로스카옌은 사제니까, 당연히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길을 택할 거라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제 딸을 저버리는 로스카옌의 모습을 똑똑히 보아 둘 셈이었다.
복수라기보다는 차라리 장난에 가까운 짓이었다.
그러나 알렉세이의 예상은 빗나갔다.
로스카옌은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바로 답을 내놓았다.
<아이를 살려 주게.>
로스카옌은 올가를 내버려 두었다. 그녀가 낳은 딸이 자신의 아이라고 밝히지 않았다. 자신이 지은 죄를 숨기고, 침묵하고, 가증스럽게도 신의 대리자를 연기하며 교회의 신부로 남았다.
그래서 선택의 기로에 서면, 로스카옌은 그 잘난 사제의 도리를 택하고 제 피붙이의 생명줄을 잘라 낼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무슨 짓이라도 하겠네. 어떤 업보라도 짊어지겠어. 그러니 내…… 아이만은 살려 주게.>
로스카옌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분노로 몸을 떨지도, 이를 악물어 턱에 힘줄이 불거지지도 않았다.
필사적이지만, 망설임이 없는 대답이었다.
<아이를 살리겠다고? 남은 다른 놈들을 전부 죽여서라도?>
<……그래.>
<이거 놀라운걸. 로스카옌. 왜 갑자기 변했지? 사제로서 고고한 척 가장하고, 멍청이들한테 존경받는 삶을 잃기 싫어서 올가가 고생하는 걸 외면했던 주제에!>
로스카옌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찢어진 입술에 맺힌 피는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알렉세이는 기가 막혔다. 죄를 저지르고도 여전히 신의 대리자를 사칭하고 싶어서 올가의 남편이라고 당당하게 밝히지도 못하는 비굴한 겁쟁이가, 갑자기 아버지 노릇을 하려 든다니!
<덕분에 답을 찾았어. 겁쟁이 로스카옌, 네 어리석음과 비굴함이 내 분노를 잠재워 주는구나!>
알렉세이는 크게 웃으며 로스카옌의 멱살을 쥐고 그를 끌어 올렸다. 남자치고는 고운 손이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우악스럽게 쥐어뜯었다. 아니, 쥐어뜯은 것이 아니다. 원래 하나였을 목걸이가, 알렉세이의 손안에서 두 개로 늘어났다. 마치 촘촘하게 짜여 있던 직물의 올 사이사이를 벗겨 내어 느슨하게 새로이 짜낸 것처럼, 황금색의 목걸이가 알렉세이의 목에 채워졌다.
그리고 알렉세이의 붉은 눈동자가 까맣게 물든 순간, 로스카옌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병사들의 몸이 어떤 거대한 짐승의 발에 짓밟히기라도 한 것처럼 처참하게 터져 버렸다.
“로스카옌은 널 택했어, 사비나. 너 한 명을 살리기 위해, 이 마을 모두의 목숨을 저버렸지.”
“그럴 리가……!”
“너 또한 같은 선택을 하겠지? 사비나.”
알렉세이가 드물게 똑바로 눈을 마주하며 물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처음으로 사비나의 얼굴이 똑똑히 비쳤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과, 네게 소중한 단 한 사람의 목숨. 저울의 추가 어디로 기울지는, 너무 뻔해서 묻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아.”
수많은 사람의 목숨과, 단 한 사람의 목숨.
에르잔의 목숨.
만약 사비나에게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어느 쪽을 택할지는 너무나도 명백했다.
사비나는 벌써 몇 번이나, 마음속에서, 같은 선택을 반복했으니까.
에르잔과 함께 도망쳐 그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기보다는, 차라리 콘바야젠 가문으로 돌아가 또다시 학살을 반복하게 되더라도, 그에게 평화로운 미래를 안겨 주고 싶다고.
“나, 나는…… 나는…….”
“올바른 소리는 아쉬운 것이 없을 때나 둘러댈 수 있는 체면치레 같은 거란다. 사람은 누구나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가장 소중한 것 하나만을 남기기 마련이니까.”
사비나는 목이 꽉 막힌 듯한 느낌을 받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점차 격해지더니 분명 맑은 날인데도 번개가 치는 것처럼 시야 가장자리가 하얗게 번쩍였다.
“사비나 아가씨. 더는 말을 들을 것 없습니다.”
에르잔이 사비나를 감싸듯 자신의 뒤로 물러나게 했다. 아니, 사비나는 움직일 수조차 없었으니 에르잔이 앞으로 나선 것일까.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던 시야를 넓은 등이 가로막았다. 시야가 가로막혔으니 답답해야 하는데, 사비나는 도리어 안도감을 느꼈다.
바위보다도 굳건한 에르잔의 등이 그녀의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귀가 아릴 정도로 쩌렁쩌렁 울리던 심장 소리가 조금 얌전해졌다.
“무슨 말로 회유한들, 사비나 아가씨를 데려가실 수 없을 겁니다.”
“내게 맞설 셈인가? 나는 콘바야젠 공작이야.”
“황제 폐하의 대리임을 내세울 셈이라면, 황실 기사직을 내려놓겠습니다.”
“사비나가 내 딸이라는 사실을 공표했어. 이제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만 남았지.”
“사비나 아가씨의 부모님이 당신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아가씨께서 당신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안 될 것은 무엇이지?”
알렉세이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에르잔의 등에 가려 흔들리는 머리카락밖에 보이지 않는 사비나로부터,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젊은 청년의 얼굴로 알렉세이의 시선이 옮겨 갔다.
“부모를 죽인 여자와 사랑에 빠져 눈이 돌아가, 잃어버린 가문을 되찾을 기회를 날려 버리는 멍청한 조카도 있는 마당에.”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