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사비나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처럼. 아니, 마치 그녀의 감정을 만들어 낸 것이 알렉세이 본인인 것처럼, 검은 눈동자의 그가 웃었다.
“좋아하지? 함께 있고 싶지? 그럴 거야.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그게, 무슨…….”
“감정을 조종하는 건 참 쉽더구나. 권력이 있으면 돼. 아, 물론 시간도 들여야 하지. 그리고 상대가 미쳐 버리지 않을 <운>도 필요하고. ……음, 이렇게 생각하면 그리 쉬운 것도 아닌가.”
알렉세이는 입가를 느슨하게 하고는 제 뒤에 늘어서 있는 피투성이의 인영들을 가리켰다.
“자, 사비나. 마지막 임무란다. 이 잡다한 쓰레기들을 다 치워 버리렴.”
“……그럴 수 없어요.”
“말을 듣지 않는 거니? 사춘기가 올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더는 당신 말 같은 거 듣지 않아, 나한테 명령하지 마세요!”
사비나가 소리치자, 알렉세이가 피식 웃었다.
“명령? 이건 명령이 아니야. 아버지가 딸에게 하는, 아주 당연하고도 사소한 부탁이지. 반드시 들어줄 수밖에 없는.”
그의 검은 눈동자가, 다시 붉게 빛났다.
“너는 거역할 수 없을 거야, 사비나.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알렉세이는 올가를 사랑했다.
그리고 로스카옌을 지독하게 미워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사비나는, 알렉세이에게 증오와 복수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갈망과 애착의 대상이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한, 올가를 닮은 여자아이.
로스카옌의 딸.
알렉세이의 사랑을 빼앗아간 증오스러운 남자의 피가 섞인 아이.
올가가 알렉세이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
그래서 알렉세이는 사비나를 증오했다. 정확히는, 그녀를 부정했다.
아직 어린아이였던 사비나의 모습에서 얼핏 로스카옌의 흔적이 보일 때마다, 알렉세이는 분노로 미칠 것 같았다. 휘몰아치는 증오가 향하는 방향은 한곳밖에 없었다.
어린아이를 학대하고, 저주로 괴롭히고, 싫다며 울부짖는 사비나를 강제로 억누르고 칼날로 상처를 입히고. 살인을 저지르느니 차라리 죽겠다며 자해하는 그녀를 방관했다.
그런데도 알렉세이의 분노는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사비나가 죽지 않기 때문일까. 죽음마저 피해 가는 죽음의 화신을 없애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까. 알렉세이는 사비나에게, 로스카옌의 핏줄에게, 알렉세이가 아닌 다른 남자를 택한 올가의 핏줄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비나는 죽지 않았다.
올가와 로스카옌. 두 사람의 사랑의 증명인 어린 여자아이는 그 어떤 끔찍한 고문을 받아도 죽지 않았다. 미쳐 버리지도 않았다. 그저 원망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울기만 했다.
그럴 때마다 미쳐 버릴 것 같은 건 오히려 알렉세이 쪽이었다.
칼날이 찢는 것은 사비나의 피부인데, 알렉세이는 목에 단검이 꽂히는 듯한 섬뜩함을 느꼈다. 바닥에 흐르는 것은 사비나의 피인데, 알렉세이는 제 심장이 녹아내려 바닥에 흩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알렉세이는 체념했다. 아무리 분노하고, 아무리 증오해도 사비나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없앨 수는 있어.’
알렉세이의 목표는 사비나를 죽이는 것으로부터, 사비나를 없애는 것으로 바뀌었다.
사비나를. 올가의 딸을. 검은 머리의 어린 소녀를.
자신의 딸로.
알렉세이와 올가의 딸로 만들어 버리면, <사비나>로 만들어 버리면.
올가와 로스카옌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사라지는 거니까.
죽어 버린 올가와, 마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로스카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녀를 자신의 딸로 만들면, 사비나가 자신을 아버지로 인식하면, 그렇다면 이 미칠 것 같은 분노의 원천을 없앨 수 있다.
<올가가 다른 남자를 사랑했다>라는 과거를.
‘그래. 사비나는 내 딸이야. 내가 만들어 낸.’
올가는 알렉세이와 사랑하여 결혼했고, 딸을 낳고는 죽었다.
그는 혼자 남아 그녀와의 사랑의 결실인 딸을 키우며 살아간다.
사랑하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소중한 딸. 죽어 버린 올가가 지상에 남겨 둔 그녀의 흔적. 사랑을 잃어 공허함만이 남은 이 세상에, 알렉세이에게 살아갈 희망을 주기 위해 태어난, 새로운 <욕망>.
사비나를 얻으면, 과거를 바꿀 수 있다.
<사비나. 너는 주술사란다.>
<나는 주술사가 아니에요. 미래를 읽지 못해요.>
<아니, 그래도 너는 주술사란다.>
죽음의 화신으로서 미래를 바꾸는 사비나.
콘바야젠 백작가의 주술사 사비나.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아름다운 딸.
<사비나. 너만큼 아버지를 위할 수 있는 딸은 없을 거야.>
올가를 얻기 위해, 성인식을 치를 때까지 그 마을에 남기 위해 돌아가는 것을 미뤄 두었던 귀족의 자리.
그가 당연히 누려야 했을 25년간의 부귀와 영화.
사비나의 존재는 일종의 보답이었다.
미친 여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더러운 마을에서 냄새나는 버러지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야 했던 세월보다 더 긴 시간을, 최고의 자리에서 권력을 휘두르게 만들어 주기 위해 태어난, 기적과도 같은 딸이었다.
사비나가 미래를 읽지 못한다는 사실은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비나가 알렉세이의 딸로서, 그를 위해 일하는 가문의 주술사가 되는 것과 동시에, 알렉세이는 가장 원하던 <과거>를 손에 넣는다.
귀족인 알렉세이. 최고의 자리에 앉은 알렉세이. 감히 그 누구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자리에 앉아, 모든 것을 뜻대로 주무를 수 있는 알렉세이.
그리고 올가를 그 지긋지긋한 감옥에서 구원해줌으로써, 연인이 된 알렉세이.
<사비나. 너는 미래를 바꿀 수 있단다.>
그리고 사비나가 미래를 바꾸는 순간, 과거도 변한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과거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망각한다. 자신을 합리화하는 방어본능이 기억을 조작하고, 추억을 미화한다.
그래서 지나가 버린 시절을 회상하면 기억의 어떤 부분은 과거의 진실과는 분명 다른 모습을 지닌다.
정확히는 소망에 따라 변한다고 해야 할까.
<나에겐 네가 필요해. 이 아버지는 너를 필요로 한단다, 사비나.>
올가가 로스카옌을 택했던 과거는 멈춰 버린 시간 속에 잠들어 버리고, 현실의 일부만 드러냄으로써 알렉세이는 진실을 조작할 수 있다.
멈추어 잡아낼 수 없는 현재가 아니라,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가 아니라.
이미 지나가 버려, 바꿀 수 없는 과거. 불변의 진실을 바꿀 수 있다.
사비나를 자신의 딸로 삼음으로써, 알렉세이는 <올가와 사랑하여 아이를 낳았다>고 지나간 사실을 날조할 수 있다.
과거를 뒤바꿀 수 있다.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있어, 사비나.>
올가는 죽었다.
로스카옌도 죽을 것이다.
그들의 과거를 기억하는 마을의 쓰레기 같은 인간들도 곧 모두 죽게 될 것이다.
기억하는 자가 사라진 자리엔 무엇도 남지 않는다.
죽어 버린 이들은 침묵하고, 진실이었을 과거는 흩어져 형체조차 남지 않게 되어 버린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알렉세이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얼마나 많은 원망을 그러모아서라도.
“너를 <사비나>로 만들기 위해 나는 모든 것을 걸었단다, 사비나.”
사비나.
콘바야젠 백작의, 아니. 이젠 공작이 된 알렉세이 오브만 콘바야젠의 외동딸.
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자의 사랑을 듬뿍 받는, 아름다운 소공작.
“사비나. 너에게 내 모든 것을 주마. 나는, 이 아버지는, 사랑하는 딸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거든.”
“……필요 없어요.”
“무엇을 원하니, 사비나? 권력? 명예? 재물? 무엇이든 말하렴. 내가 너에게 줄 터이니.”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에르잔과 결혼하고 싶으니?”
알렉세이의 물음에 사비나의 표정이 얼어 버렸다. 삽시간에 차가워진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에르잔을 좋아하지? 평생 함께 살고 싶지? 그럼 그렇게 하려무나. 내겐 네 사랑을 맺어 줄 힘이 있거든.”
귀족의 결혼에는 황제의 승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콘바야젠 공작은 황제의 대리인. 후계자인 사비나가 누구를 데려온다고 한들 그의 권한으로 승인을 할 수 있다.
“사비나. 네가 나에게 <과거>를 만들어 주었으니, 나도 너에게 <미래>를 만들어 주마.”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사는 미래.
진짜 가족이라면, 진짜 아버지라면, 응당 사랑하는 딸에게 안겨 주었을 최고의 행복을.
“너에게 주마, 사비나. 이리 온.”
알렉세이가 자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벌렸다. 그러나 사비나는 다가가지 않았다.
사비나는 에르잔의 옆에 딱 붙어 서서,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짓씹었다.
“당신 때문에, 엄마가 죽었어요.”
“올가는 너를 낳고 죽었지. 하지만 사비나,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아. 너는 올가와 내가 사랑했다는 <과거>를 증명하는 아주 소중한 보물이니까.”
사비나를 <사비나>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올가가 사랑한 것이 알렉세이 자신이라는 과거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그는 피가 이어지지 않은 여자아이를 딸로 받아들여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모두 물려주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사비나.”
알렉세이가 다시금 사비나를 불렀다. 더없이 부드러운 그 음성에 따스함은 조금도 없었다. 붉은빛이 사라지고 다시 칠흑으로 덧씌워진 검은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일그러진 욕망으로 가득 찬 그 눈에는, 이 자리의, 이 현실의 어느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버지는 너를 사랑한단다.”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니잖아요.”
“이제까지 나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았니? 자아. 이 마을에서 본 것은 그저 악몽일 뿐이야. 잊어버리렴.”
“그럴 수 없어요.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아.”
사비나는 에르잔의 손을 붙잡았다. 단단한 손에서 퍼져 오는 따스한 온기가 겨우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다.
“당신이 주는 미래 같은 건 필요 없어. 내 고향에서 당장 떠나요! 이 침입자!”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