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60화 (160/189)

160화

오두막을 나온 사비나는 에르잔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눈치챘다. 카림에게 사과하러 가는 것이 내키지 않는 걸까? 사비나가 가까이 다가가 옷깃을 잡아당기자, 에르잔이 흠칫 놀라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비나 아가씨. 제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는데…….”

“에르잔. 카림과 페고라를 만나는 게 내키지 않는 거면 나 혼자 다녀올게요.”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읏!”

에르잔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그가 왼손으로 귀를 감싸쥐었다. 불쾌함을 참는 듯한 표정에 사비나가 깜짝 놀라 손을 떼었다.

“에르잔? 왜 그래요?”

“소리가…… 사비나 아가씨는 괜찮으신 겁니까?”

“소리요? 무슨 소리?”

사비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깨어날 때도 에르잔이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이명이라도 들리는 건가? 아니면 아페티트의 환각을 보았을 때처럼, 사비나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인 걸까.

‘저주는 다 흡수했는데, 왜? 설마 나와 너무 오래 함께 있었던 게 에르잔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 걸까?’

사비나는 손을 가슴께에 모으고 한 걸을 떨어졌다. 그녀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에르잔은 귀를 감싸 쥐고 있던 손을 내리고 바로 섰다. 후우, 심호흡을 하니 속이 울렁거릴 만큼 귓전을 울리던 소리에도 평정을 가장할 수 있었다.

“사비나 아가씨. 아무 소리도 안 들리십니까?”

“에르잔이 무슨 소리를 말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아가씨의 목걸이에서 질척한 소리가…….”

“질척한 소리요? 내 목걸이에서?”

사비나는 옷섶을 쥐었다. 에르잔이 워낙 꽁꽁 여며 놓은 탓에 목걸이를 내보이지는 못했으나, 가슴 사이에 자리한 목걸이가 가볍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에르잔의 표정이 다시 일그러지는 것을 본 사비나의 머릿속에 얼핏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주술도구도 비슷해. 반동을 피하는 자와 제물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지. 가까워지면 공명한다고 해야 하나?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빛이 보이기도 한대.>

바르셀다의 저주를 흡수하기 위해 동쪽 첨탑으로 가던 날, 새벽에 나자예프와 그런 대화를 주고받은 기억이 난다.

꿀럭, 하고 뭔가를 마시는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토해 내는 것 같기도 한 소리.

‘공명하는 소리는 당사자에게는 들리지 않는다고 그랬지. 그때는 옆에 있던 나만 들었는데…….’

주술도구가 가까워질 때 내는 공명음.

사비나에게 들리지 않는 소리를 에르잔이 듣고 있다.

사비나의 목에 걸린, 성인의 모습을 부조한 목걸이가 공명하고 있다는 건, 그와 같은 목걸이를 지닌 자가 근처에 있다는 뜻.

“에르잔, 설마…….”

“사비나 아가씨, 물러나십시오!”

쩡! 하고 뭔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귀에 울려, 에르잔은 반사적으로 사비나의 몸을 제 뒤로 잡아끌었다. 그녀의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라는 것을 아는데도 본능적으로 감쌀 만큼 위협적인 파열음이었다.

“감이 좋군. 무인들은 다 그런 건가?”

익숙한 목소리에 두 사람은 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았다.

사비나와 에르잔이 머물던 오두막에서 동쪽 첨탑으로 가는 길.

그리고 동쪽 첨탑에서 광장을 가로질러 서쪽 교회로 가는 길.

두 개의 길이 맞닿는 자리에 검은 실루엣이 늘어서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엎어져 있는 이들의 모습과, 나무토막을 세워 놓은 듯 뻣뻣하게 서 있는 남자의 모습.

그리고 그 사이에서 검은 망토를 두른 남자가 태평하게 뒷짐을 진 채 걸어오고 있었다.

깔끔하게 뒤로 넘긴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외견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턱수염을 기른 남자가.

“콘바야젠 백작……!”

“무례하군. 난 이제 백작이 아니야.”

알렉세이가 단정한 미간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간밤에 내린 비로 땅은 아직도 진흙탕인데, 알렉세이의 검은 구두에는 우물은커녕 먼지조차도 없이 윤기가 흘렀다. 마치 비에 젖은 땅과 그의 구두 사이에 뭔가 투명한 막이라도 있어, 더러움이 묻어나지 않는 것처럼.

“반응을 보아하니 로스카옌이 무사히 건네준 모양이로구나. 덕분에 한시름 놓았어.”

알렉세이가 가슴께에 늘어져 있던 금줄 목걸이를 손가락에 걸어 들어 보였다. 성인의 모습을 부조한 금줄 목걸이. 로스카옌 사제가 하고 있던 것과 완벽하게 동일한 모양이었다.

로스카옌 사제는 그 목걸이가 성물로, 모조품은 얼마든지 있어 귀족이 수집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지만, 에르잔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모조품 따위가 아니다. 동일한 물건이다.

복제품이라기보다는 원래 한 세트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야 할까. 모양이라면 얼마든지 닮게 만들 수 있겠지만, 목걸이에서 울리는 소리까지 따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침에 들었던, 진흙인지 물인지 모를 무언가가 꾸물거리며 흘러가는 기분 나쁜 소리.

그것이 알렉세이가 목걸이를 드러낸 순간 한층 더 커졌다.

“데리러 왔단다, 사랑하는 나의 사비나.”

알렉세이가 부드럽게 웃었다. 따스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가면 같은 미소였다.

“……왜요?”

“음?”

“이제 더는 내가 없어도 되잖아요.”

곧 공작 작위를 받게 될 거라고, 사비나를 보낼 당시 그렇게 말했다. 사비나는 작위 같은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목걸이를 통해 통신했을 때 알렉세이의 태도가 완전히 바뀐 것을 보고는 짐작했다.

아버지라고 자칭하던 남자의 숙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콘바야젠 가문이…… 공작 가문이 되었으니, 목적은 다 이룬 거잖아요.”

무시당하던 변방의 가문에서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가문으로. 황제의 대리로서 이 제국을 통솔하는 실질적인 일인자로.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공작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여서, 불행으로 몰아넣어서, 방해되는 모든 것을 제거해서,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지 않았나.

그렇다면 이제 사비나의 역할도 끝난 것이 아닌가.

“당신이…… 원하던 것을 얻었으니까, 죽음의 화신 같은 거 더는 필요 없잖아요.”

“화신은 필요 없지. 하지만 너는 필요해.”

“왜죠?”

“사비나, 너는 내 딸이니까.”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니잖아요.”

아주 약간의 망설임이 담긴 원망의 목소리에 알렉세이의 입꼬리가 실룩, 움직였다.

꼭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는 듯이.

“사비나, 사랑하는 나의 딸. 아버지는 너를 사랑한단다.”

알렉세이는 늘 사비나에게 건네던 말을 다시금 반복했다.

마치 암시를 거는 것 같기도 하고, 습관적으로 굳어진 말을 뱉기도 하는 것처럼.

사비나. 사랑하는 나의 딸.

아버지는 너를 사랑한단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잖아요.”

“아버지는 너를 사랑한단다.”

“……어느 <아버지>가요?”

알렉세이는 늘 <사비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사비나>가 그의 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알렉세이는 <아버지>일까.

<사비나>는 그녀일까.

사비나의 검은 눈이 가늘어졌다. 주술을 덧씌운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붉은빛이 낯설게 번뜩였다.

“아이를 낳으면, 사비나라고 이름을 지을 셈이었단다.”

“……네?”

“묘하게도 아들이 태어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더구나. 그녀를 닮은 딸을 낳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

그녀를 닮은 딸. 올가를 말하는 건가.

카밀라는 어디가 닮았는지 잘 모르겠다고 그랬지만, 나자예프와 오딜은 사비나가 올가를 쏙 빼닮았다고 말했다.

“낳는다면 딸이길 바랐어. 나를 닮은 검은 머리카락에, 그녀를 닮은 사랑스러운 눈을 한.”

느긋하게 말을 뽑아내는 알렉세이의 시선은 사비나를 마주하고 있음에도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알렉세이도 사비나를 보면서 올가를,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리는 걸까. 사비나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에 자신을 겹쳐 보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조금 오싹해졌다.

“나는 당신 딸이 아니에요.”

“올가의 딸이지.”

“내 아버지는…… 로스카옌 신부님이에요.”

“네 이름은 <사비나>란다. 내가 지었거든.”

두 사람이 나누는 것은 <대화>가 아니었다. 사비나가 뭐라고 말해도, 알렉세이의 대답은 그녀가 건네는 화제로부터 비스듬하게 비껴간다.

“성인식을 올리면, 올가를 신부로 맞이할 생각이었단다. 이 더럽고 냄새나는 마을을 빨리 떠나고 싶은 것을 오직 그녀를 향한 마음으로 인내했지.”

“뭐라고요?”

“오딜이 조금만 더 제대로 올가를 속박했더라면,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그녀가 누구의 손도 타지 않았을 텐데. 멍청한 놈이 호위대장이니 뭐니 쓸데없는 짓을 하느라 한눈을 파는 바람에…….”

알렉세이가 으득,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그의 눈빛에 분노가 얼핏 떠올랐다가, 천천히 내리 닫은 눈꺼풀과 함께 가라앉았다.

“1년만 더 가둬 두었으면 됐는데, 하필이면 그때에 로스카옌이 끼어드는 바람에.”

“……아버지가 없었더라면, 어머니가 당신을 선택했을 거라고 확신하는 건가요?”

“선택이라니, 그런 것이 아니야. 당연히 그렇게 예정된 것이, 로스카옌의 방해로 어그러진 것뿐이지.”

“어머니는 한 번도 당신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요.”

어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에 갔을 때 보았던 높은 천장. 색색의 현란한 스테인드글라스. 단상에 서 있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한 남자를 가리키며, 어머니는 그녀에게 저 사람이 너의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었다.

왜 떠올리지 못했을까. 교회의 단상 위에 서 있기에 멀리서밖에 볼 수 없었던 아버지의 형상은, 낯선 이들의 손에 끌려와 마주했던 오만한 남자의 것과는 달리 무척 소박하고 부드러웠다는 것을.

“아버지가…… 아니었더라도, 어머니가 당신과 결혼할 일은 없었다고요.”

“올가는 내가 귀족이라는 것을 몰랐으니까.”

“어머니는 부귀영화를 바라지 않았어요.”

마을의 북쪽에, 여자들만이 모여 사는 곳에 딸과 둘이 살면서도 행복해했다. 남편이 없어도, 오라비가 없어도, 마음을 받아 달라며 집적거리는 남자들이 없는 곳에서 딸을 키우며 소소하게 행복을 누렸다.

이따금 교회에 갈 때면 멀리서, 그저 모습만 볼 수 있을 정도로 멀리서 로스카옌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딸의 작은 손을 꼭 잡은 채로.

“당신이 끼어들 틈은 처음부터 없었다고요.”

“끼어들어? 아니야. 올가는 내게 오도록 되어 있었어.”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삶의 터전을 엉망으로 만들어 더는 이곳에서 살 수 없게 만들 생각이었으니까?”

사비나의 질문에 알렉세이가 쾌활하게 웃었다. 마치 소년처럼. 외견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수염이 벌어진 입가를 따라 느슨하게 휘어졌다.

“올가는 나를 사랑해.”

“착각하지 마요. 그런 적도 없고, 그럴 가능성도 없으니까.”

“아니. 네가 에르잔에게 빠져든 것으로 이미 증명은 끝났어.”

갑자기 튀어나온 에르잔의 이름에 사비나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말이냐고 되묻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에르잔의 손을 꽉 쥐었다. 단단한 손의 온기에 간신히 긴장을 풀고 올려다보자, 알렉세이가 그녀를 비웃고는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몸이 굳은 건지, 사지를 통제할 능력을 잃어버린 건지 아페티트는 말뚝을 박은 것처럼 우뚝 선 채로 눈만 부릅뜨고 있었다.

“아페티트. 사람을 조종하기 위해 몸에 손을 대는 건 비효율적인 짓이야.”

시체에 새로운 뼈대를 박아 움직이게 만드는 건 간단하지만 금세 살이 썩어 형체가 무너져버린다.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주술을 심어 조종하려면 세심한 컨트롤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조종당하는 인간의 자아와도 싸워야 하기에 뜻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감정을 움직이면, 행동을 조종하는 것은 일도 아니지. 이 아이처럼.”

“당신은 나를 강제했을 뿐이잖아요!”

“사비나. 에르잔을 좋아하지?”

“무슨……!”

“네가 학살자라는 것을 모르고 너를 정중하게 대하는 남자를 마주한 기분이 어땠지? 너를 경멸하지 않고 너를 향해 웃어 보이는 남자를 보는 기분은 어땠지? 어두컴컴한 지하실을 나와서 바깥에서 함께 걸어 본 느낌은? 너와 살이 맞닿아도 몸이 썩어 죽어 버리지 않는 남자와 끌어안는 희열은?”

알렉세이의 질문이 거듭될수록 사비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로부터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다는 듯이, 아니, 처음부터 대답 같은 것을 할 틈은 주지 않는다는 듯이 쏟아지는 질문이 사비나의 가슴을 후벼팠다.

점점 일그러지는 사비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알렉세이는 즐거운 듯이 웃었다.

“네게 다정한 사람을 만나니 기분이 좋지? 네 정체를 모르는 사람을 마주하니 마음이 편했지? 몸이 닿아도 괜찮은 상대를 만지는 기분은 어땠니? 따뜻하고 포근하지 않았어? 네 추악한 모습을 모르는 남자와, 죄로 가득한 과거를 모르는 남자와 보내는 시간은 즐겁지 않았니?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을 만큼.”

“호, 호위를…… 호위를 맡을 사람을 구했다고, 그랬잖아요.”

“깜찍하구나, 사비나. 너에게 호위기사 같은 게 필요 없다는 사실은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으면서.”

처음엔 사비나를 혼자서 보냈다간 통제할 사람이 없어서 감시역으로 보냈다고 생각했다.

그다음에는 저주가 통하지 않는 에르잔이 방해가 되어 황궁에서 내보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알렉세이는 실험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비나가, 끝없이 사람을 저주하고 죽이는 절망 속에서 살아가던 인간이, 몇 번이고 품었던 희망을 짓밟혀 체념밖에 하지 못하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혐오하며 그저 죽기만을 바라던 인간이, 현실을 벗어나게 해 줄 <구원자>를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가둬 두고, 구속하고, 누구와도 만나지 못하게 하고, 혹여 만나더라도 끔찍한 기억만 남길 뿐이니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은 갖지도 못하지.”

오딜이 올가를 감금했을 때처럼, 이라고 덧붙이며 알렉세이가 쓰게 웃었다.

“그때 손을 내밀어 주면 돼. 구원해 주면 돼. 누구의 손인지는 아무 상관이 없어. 구원자가 누구든,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거야.”

로스카옌이 올가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 주었던 것이, 올가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녀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원래는 그것이 알렉세이의 역할이었는데. 그가 되고자 바라던 것이었는데.

로스카옌이 먼저 그 자리를 차지하는 바람에, 빼앗겨 버렸다.

“그 자리에 내가 있었으면, 올가는 분명 나를 사랑했을 거야. 네가 그렇듯이.”

“그런 게 아니에요! 나는…….”

“너를 경멸하지 않는 남자라서 다행이었지? 네게 웃어 주는 남자라서 좋았고? 네게 닿아도 괜찮은 남자라서 안심하지 않았니? 마음껏 끌어안고 매달려도 받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행복하지 않았어?”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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