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59화 (159/189)

159화

“사비나 아가씨. 그 목걸이…….”

에르잔은 당황한 듯이 말을 어물거렸다. 숲속에서 사비나는 저 목걸이를 통해 콘바야젠 백작과 대화하지 않았던가. 설마 간밤의 일이 그에게 전해진 것은 아닐까? 얼굴이 붉어졌다 하얘졌다 하는 에르잔의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사비나가 가볍게 에르잔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내가 하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뭐가 괜찮다는 뜻일까. 소리가 전해지지 않는다는 뜻일까? 아니면 주술도구로써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일까.

“하지만, 이상한 소리가 들립니다.”

“이상한 소리요? 무슨 소리?”

“그게…….”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에르잔은 표현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뭔가 뭉쳐 있던 것이 꿈틀거리며 팔을 뻗어가는 것도 같고, 반대로 여러 군데 흩어져 있던 것이 한 점을 향해 흘러가는 것 같기도 한 소리.

도저히 듣기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소리인데, 그걸 사비나에게 그대로 말했다가는 오해할 것 같았다.

“목걸이에서, 그…… 소리가 납니다.”

“소리요?”

사비나가 목걸이를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잘그락거리며 금속 줄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르잔이 말한 것은 그런 소리가 아니지만, 사비나에게 설명할 길이 없어 적절한 표현을 찾는 사이 사비나가 배시시 웃으며 몸을 기대왔다.

“아, 아가씨?”

“이렇게 하고 있으면 소리가 안 날 거예요.”

확실히 소리가 멎은 듯했다. 그런데 멎은 것이 맞나? 들을 정신이 없어진 게 아닐까? 맨살을 맞대 오는 사비나의 몸이 너무 따스하고 부드러워서, 에르잔은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아가씨, 저어, 날이 밝았습니다.”

“아무도 안 보잖아요.”

아무리 오두막엔 둘뿐이라고 해도 밖에서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있는데, 사비나는 이불조차 걸치지 않고 에르잔의 몸에 제 몸을 비비적거리며 간지럽게 웃었다. 가슴께에 살며시 닿았다 떨어지는 따끈한 숨결과 가느다란 머리카락의 감촉에 에르잔의 하체가 바짝 긴장했다. 흉물스러운 물건이 눈치도 없이 고개를 번쩍 치들고는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파고들려는 것을 느끼고, 에르잔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제 몸인데 이다지도 통제가 되지 않는다니!

“사, 사비나 아가씨. 너무 가깝습니다. 조금만…….”

얼른 몸을 옆으로 돌려 사비나의 감촉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지만, 사비나는 제 허벅지부터 아랫배까지 멋대로 문질러 대는 버릇없는 맹수를 달래듯 살살 쓰다듬었다.

에르잔이 헉, 숨을 삼키자 그의 귓가에 사비나가 다시 입술을 가까이했다.

“아침에는 원래 이렇게 된다면서요. 숨기지 않아도 돼요.”

“아, 아닙니다! 그게……!”

함께 밤을 지새운 다음 날, 사비나의 알몸을 보고 흥분한 제 것을 가리며 아침 발기라고 둘러댄 것이 문제였던가. 사비나는 에르잔의 성기가 잠에서 깨어나기가 무섭게 다시 활동을 시작하려는 것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신기하네요. 에르잔은 어떻게 구분해요? 이렇게 딱딱한데…….”

“사비나 아가씨!”

고운 손이 꼭 무슨 미지의 대상을 탐구하듯 중심을 훑어 올리자 에르잔은 절규와도 같은 신음을 흘리며 얼른 침대를 벗어났다. 덕분에 에르잔의 위에 거의 걸터앉듯 올라와 있던 사비나가 옆으로 쓰러졌으나 침구와 이불 덕분에 벽에 부딪히지는 않았다.

“아가씨, 저, 죄송…… 콜록!”

떨어진 이불을 주워 들며 하체를 가리면서 다급하게 사과를 한다는 게 그만 혀를 깨물어버렸다. 에르잔이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사비나가 얼른 일어나 다가왔다.

“에르잔, 괜찮아요? 다쳤어요?”

“아, 아니미, 아님히다…….”

아픈 혀를 안으로 마느라 발음이 이상하게 샜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귀 끝까지 벌겋게 된 에르잔이 아래를 가린 채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고, 사비나는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미안해요. 싫었어요?”

“예……?”

“가만히 둬도 가라앉는다고 에르잔이 그랬는데, 내가 괜히 만져서…….”

예민해진 부위에 자꾸 자극을 주면 아프지 않던가. 사비나의 피부가 고운 편이라고는 하나 살갗도 오래 마찰하면 빨갛게 부어오르는 법이다. 에르잔과 관계할 때는 행위를 거듭할수록 이성이 마비되어 쾌락인지 고통인지 잘 구분도 되지 않았지만, 확실히 마찰할 때 살이 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에르잔은 나보다 약하니까, 더 아팠을 거야.’

그를 상처입혔다는 사실에 조금 우울해진 사비나는 에르잔의 손이 생명줄처럼 붙잡고 있는 이불을 살짝 잡아당겼다.

“에르잔. 어디 좀 봐요. 손으로 마찰해서 건조해진 거면 혀로 핥아야…….”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에르잔이 무엇 때문에 쩔쩔매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비나는 제가 또 뭔가 잘못했나 싶어 난처한 얼굴로 손을 되돌렸다. 처음에는 상대의 알몸을 보는 것도, 자신의 알몸을 보이는 것도 부끄러워했지만, 관계를 거듭하면서 에르잔과 주고받은 대화 덕분에 사비나의 상식은 대단히 잘못된 방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사비나가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려 해도 에르잔은 그녀의 표정을 들여다보고 반응을 파악하고자 했고, 몸을 씻겨줄 때도 커다란 손이 제 몸을 쓰다듬는 감각에 어색해하던 사비나와는 달리 에르잔은 담백하게 그녀의 목욕 시중을 들었다.

알몸의 그녀에게 옷을 입혀주거나, 이불을 덮어주는 행위도 그렇지 않았던가.

게다가 무서울 정도로 빳빳하게 솟아오른 성기를 두고도 <아침이면 으레 일어나는 생리현상>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사비나는 에르잔과 섹스하지 않을 때의 신체접촉은 전혀 부끄럽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착각하고 말았다.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 왜곡된 상식과 좋아하는 남자에게는 자꾸 다가가 몸을 비비고 싶은 감정이 더해지니, 지금처럼 남들이 알면 기겁할 일을 하면서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사비나는 이불로 가리고 있음에도 확실하게 두툼한 윤곽이 두드러진 것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욕망대로 행동하는 건…… 역시 나쁜 짓이에요.”

“예?”

“에르잔을 또 곤란하게 했잖아요?”

만지고 싶어서 만지고, 걱정되어 들여다보지만, 에르잔의 어색해하는 반응을 보니 자신이 잘못한 것이 분명하다. 역시 그가 접촉을 원하지 않을 때는 먼저 손을 대서는 안 되는데. 사비나는 에르잔이 언제 그녀를 끌어안고 입을 맞춰도 기분 좋고 설레지만, 에르잔이 꼭 사비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자신의 감정을 기준으로 삼아 행동하면 처지상 거절하기 어려워하는 에르잔만 곤란해질 것이다. 사비나는 뒤로 물러나 침대에 다시 앉았다. 몸을 가리지 않은 까닭에 그녀의 가슴 사이에 자리한 황금색 목걸이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기다릴 테니까, 가라앉히고 오세요.”

“……그, 그 이야기는 제발 그만하십시오!”

아직도 엉거주춤한 자세로 아래를 가린 에르잔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헛간으로 뛰쳐나갔다가, 얼른 바지와 겉옷만을 걸치고 다시 들어왔다.

“교회에 들러, 사비나 아가씨께서 갈아입으실 옷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아가씨는 여기서…….”

“나는 이거면 돼요.”

사비나는 에르잔이 방을 나설 때 흘리고 달아난 이불을 끌어 올려 어깨에 걸쳤다. 어디서 나왔는지 묘하게 익숙한 긴 끈으로 천을 고정한 사비나는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그러모아 흘러내렸다.

“카밀라의 옷을 계속 더럽힐 수는 없잖아요.”

“사비나 아가씨…….”

벌써 몇 벌이나 찢어 버렸던가. 카밀라는 안 입는 못이니 괜찮다고 말했지만 이 작은 마을에서 옷을 갈아입을 일이 얼마나 있다고. 카밀라가 보유한 옷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이 마을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던 사비나는 이불로 대충 몸을 가리고, 나자예프에게 받은 머리끈을 허리띠 삼아 둘러맸다. 깨끗하게 세탁은 했지만 원단이 고급은 아닌 까닭에 대충 걸친 차림새가 보기 좋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사비나는 애초에 겉모습에 신경을 쓰는 편이 아니었다.

지금이 옷차림에 신경을 쓸 상황도 아니고.

“카림이랑 페고라는 아직 동쪽 첨탑에 있겠죠? 어제 비가 내려서 광장을 가로질러 서쪽까지 가지는 못했을 테니까…….”

“예. 그럴 겁니다.”

페고라를 만나 어제 들었던 이야기의 진상을 캐물으려는 건가. 그리고 로스카옌 사제의 시체도 수습해야 한다.

녹아내린 모양이 그 꼴인지라 대체 어떻게 장례를 치르면 좋을까 막막했으나 어쩌면 사비나의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에르잔은 난감해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꾹 다물고, 사비나의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땋아 목 언저리를 가려 주었다.

“에르잔?”

“차림새를 조금 정돈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은데…….”

“제가 그러고 싶습니다.”

이제 와서 두 사람의 관계를 숨긴다고 뭐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녀의 몸에 남은 키스마크나 잇자국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로스카옌이 그렇게 되고, 카림에게 오해를 받고 울면서 뛰쳐나온 사비나와 에르잔이 무슨 짓을 했는지 다른 사람들이 안다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때 사비나는 무너져 내리기 일보 직전인 상태였고, 진상 파악이나 용기보다는 위로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두 사람의 앞에 닥친 모든 현실을 미뤄두고 밤을 보냈기에 사비나는 겨우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후회하지는 않지만, 뭇 사람의 비난이 사비나를 향하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던 에르잔은 사비나의 몸에 남은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도록 꼼꼼하게 이불보를 싸맸다.

별로 단정한 모양새는 아니지만, 넓은 이불보와 머리카락으로 몸을 가린 덕분에 그녀가 걸치고 있던 금줄 목걸이도 감쪽같이 감춰졌다.

“이제 되었습니다. 사비나 아가씨. 동쪽 첨탑으로 가시겠습니까?”

“네. 카림에게 사과하러 가야죠.”

“사비나 아가씨. 사과라니요?”

“나 때문에 카림이 울었잖아요.”

“아가씨. 아가씨께선 잘못하신 것이 없습니다. 페고라가 한 말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고…….”

“기억이 있어요.”

어머니와 떨어져 낯선 병사들에게 끌려갈 때, 불타는 마을과 사람들의 비명을 들었던 것이 확실히 기억난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다. 끔찍해서 잊어버리고 싶어도 잊히지 않을 만큼 생생한 과거가 내내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던 이유를, 모른 체하고 있었을 뿐이다.

“전부 다…… 나 때문에 죽은 거예요. 카림의 어머니도.”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큰 원망의 감정은 없다. 죽음의 화신을 만들기 위해 사라져간 목숨의 무게에 짓눌려 괴로워하던 그때는 그저 눈앞에 닥친 공포를 마주하느라 알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몸속에 깃든 <죽음>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를.

“전부 다, 내 안에 있어요. 그래서 흡수할 수 있었던 거야.”

사비나라는 죽음의 화신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아니, 단지 <수많은 사람>이 아니라, 그녀의 고향에서 함께 나고 자라온 이들이 죽었다.

죽음의 무게는 동등하다고 생각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들의 죽음이나, 사비나가 아는 이들의 죽음이나 비통한 것은 매한가지라고.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나 때문에 시작된 저주니까, 내가 끝내야죠. 에르잔, 힘을 빌려줘요.”

사비나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은색의 빛이 반짝였다.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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