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저주에 걸린 이들은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없지만, 만에 하나 무슨 수단을 써서 빠져나갔다면 저주의 영향에서도 벗어난다. 외부인인 로스카옌이 이 마을 안에서 홀로 나이를 먹었던 것처럼, 마을 사람인 알렉세이가 밖으로 빠져나갔다면 그는 두 동생들과는 달리 나이를 먹었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알렉세이의 얼굴은 바르셀다가 기억하는, 15년 전 그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정확히는 달라진 부분이, 꼭 억지로 만들어 붙여놓은 것 같아 어색하다고 할까.
단정하게 다듬은 검은 머리카락. 형제지만 서로 닮은 곳 하나 없는 외모. 총명한 눈빛에 어울리지 않는 수염이 합쳐져 청년도 중년도 아닌 기묘한 인상을 자아냈다.
“변하지 않은 줄 알았는데 변하기는 했구나.”
그것은 바르셀다에게 하는 말일까, 마을 풍경에 대고 하는 말일까, 아니면 알렉세이 자신에게 하는 말일까. 바르셀다는 꿀꺽 침을 삼키고 어깨를 긴장시켰다.
제대로 나이를 먹었다면 40은 족히 되었을 터인데, 일부러 기른 턱수염과 느슨한 옷차림을 제외하면 알렉세이는 아직도 20대 중반으로 보였다.
바르셀다는 알렉세이의 검은 눈동자를 보고 몸이 굳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하늘에선 이토록 밝게 해가 내리쬐고 있는데, 왜 갑자기 태양빛이 가리워진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일까.
“바르셀다.”
“안 돼.”
본론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이름을 불리자마자 반사적으로 거절하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오른쪽 팔다리를 쓸 수가 없어 이상한 자세로 엎어져 있는 나자예프의 앞을 바르셀다가 가로막았다. 물론 나자예프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멀리 뒤로 보이는 교회로 가는 길을 막기 위해서였다.
“알렉세이 형, 다가오지 마.”
“인사조차 하지 않고 대뜸 형에게 명령부터 건네다니, 건방져졌구나, 바르셀다.”
“제발, 더는 형이랑 연관되고 싶지 않으니까 돌아가 줘.”
“더는? 나는 한 번도 너희와 연관된 적이 없는데.”
알렉세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뒷짐을 진 채로, 느긋하게 마을 풍경을 둘러보았다. 간밤에 비와 번개가 휩쓸고 지나가 폐허가 된 자리를 훑고 지나가는 시선에는 동정도 연민도 없었다. 오히려 <깨끗하게 청소해야 하는데 왜 덜 치워졌느냐>는 불만족스러움이 섞인 눈빛에 가까웠다.
“얌전하게 말은 잘 듣던 것도 벌써 옛날 일이로구나. 단정하게 다듬을 게 아니라면 묶기라도 할 것이지, 지저분하게 머리는 산발을 하고.”
“나는 제대로 묶고 다녔어. 지금은 머리끈을 다른 데 놓고 와서 어쩔 수 없이 풀고 있는 거거든?”
자세를 바로잡을 힘은 없어도 입을 움직일 힘은 남아 있었던 나자예프가 냉큼 변명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나자예프는 상대할 생각조차 없었다는 듯, 알렉세이는 바르셀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 형제 가운데 막내지만 키만은 가장 큰 바르셀다를 올려다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알렉세이는 턱을 들고 눈을 내리깔았다.
“아주 엉망이야.”
바르셀다의 머리카락은 비교적 결이 좋은 편이긴 했지만, 저주의 핵을 품고 있을 때에는 내내 지하에 갇혀 있느라, 그다음에는 부상을 치료하느라 내내 누워 있느라 정리되지 않은 부스스한 꼴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자예프에 비하면 훨씬 단정한 모습이었지만.
“챙겨 주는 사람이 없다고 한들 나이를 먹었으면 네 앞가림 정도는 스스로 해야지. 내가 없다고 꼴이 아주 엉망이로구나.”
“스스로, 알아서 할 테니까, 더는 다가오지 마.”
“그래서 멈춰 서 있지 않니?”
잔뜩 긴장한 바르셀다와는 대조적으로, 알렉세이가 나긋하게 대답하며 가볍게 고개를 기울였다. 듬성한 나무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벼락이 마을의 남쪽 숲을 거의 쓸어버린 까닭에 본래는 숲에 가려져 보이지 않아야 할 뒤쪽까지 탁 트여 있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왜…… 안 보여?”
“음?”
“병사들 말이야.”
“병사들?”
“형이, 혼자서 여기까지 왔을 리가 없잖아?”
바르셀다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알렉세이가 혼자서 이 마을을 찾아올 리가 없는데. 다시 방문한다면 15년 전 그때처럼 병사들을 끌고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숲 너머 계곡까지 시야가 트여 있음에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다고 한들, 인원이 많다면 티가 날 수밖에 없는데 그런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형제간의 살가운 교류는 없어도, 한집에서 살면서 가장 가까이서 겪어 왔던 만큼 바르셀다는 알렉세이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판단했다. 알렉세이는 동생도 주술의 제물로 쓸 만큼 비정한 성격이지만, 동시에 무척 겁이 많고 신중한 성격이었다.
바르셀다와 나자예프에게 주술도구를 씌워 저주가 제대로 제물에게로 향하는지를 확인한 후에야 겨우 안도하듯 내뱉었던 말을 기억한다.
<겨우 검증이 끝났군. 이제는 안심하고 나도 쓸 수 있겠어.>
그때는 알렉세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당시 바르셀다는 저주에 휩쓸려 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으니까. 알렉세이가 걸친 주술도구가 무엇인지 파악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나자예프에게는 알렉세이가 걸친 목걸이가 무엇인지 알아볼 눈썰미가 없었다.
바르셀다는 보지 못해서, 나자예프는 보고도 인지하지를 못해서 남은 두 동생은 제 첫째 형이 어떤 방식으로 저주를 피하고 있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이렇게 마주하고 나서야, 마을을 떠나고 나서도 전혀 나이를 먹지 않은 모습을 보고 나서야, 실감할 수 있었다.
제 형은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잔혹한 인간임을.
“나는 몰려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알지 않니?”
“형이 저주를 걸었다는 걸 모를 줄 알아?”
바르셀다가 경직된 어깨를 움직여 가까스로 숨을 내뱉었다. 붉은 눈동자가 쉼 없이 떨리고 있었다.
“교회엔 아직 생존자가 많아. 형이 혼자서 왔다는 사실을 알면, 다들 가만 있지 않을걸.”
“가만 있지 않으면, 어쩌려고?”
알렉세이가 피식 웃었다. 생존자들이 그가 저지른 짓을 깨닫고 죽이려 달려들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한다는 듯이.
아니, 달려든다 해도 자신에게는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할 것을 확신한 듯이.
“발버둥쳐 봐야 늪에 더 빨리 가라앉는 것을. 바르셀다, 반항은 추하단다.”
“우리 모두를 죽이려고 온 거야?
“궁금한 건 그것뿐이니?”
“제일 중요한 거니까.”
“그래서 네가 제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거란다, 바르셀다.”
알렉세이의 대답에 바르셀다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 바르셀다에게 가장 궁금한 것은 자신의 생존 여부다. 알렉세이가 그들을 죽이려 하는가, 그러지 않을 것인가.
제 목숨이 가장 소중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알렉세이가 왜 이곳에 왔는지,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앞으로 무엇을 어쩔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은 한가득이지만, 그 어떤 사실도 바르셀다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가, 없는가보다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알렉세이는 마치 그들이 살고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따로 있는 것처럼 의연한 얼굴로 먼 곳을 보았다.
동쪽 첨탑이다.
“분노해서 이성을 잃으면 앞이 보이지 않아.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지 못하고, 순간순간의 감정만을 따르게 되지.”
“형. 내 질문에 대답부터 해 줘.”
“네가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을 건넬 만큼 영리했더라면, 반쪽이나마 피를 이은 정을 베풀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야.”
알렉세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르셀다가 무릎을 꿇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것이 아니다. 마치 억지로 몸을 비틀어 바닥에 구겨 놓은 것처럼, 다리가 이상하게 꺾여 버렸다.
“읏……!”
다리가 뒤틀린 고통보다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공포감이 더욱 크게 엄습했다. 몇 걸음 떨어져서 마주해도 내려다보았던 알렉세이가, 지금은 고개를 한참 들어올려야 바라볼 수 있을 만큼 높아 보였다.
“형을 내려다보는 건 예의가 아니지. 그렇지, 바르셀다?”
빙긋 웃는 알렉세이의 옷섶에서, 뭔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
간밤의 세찬 빗소리와 천둥 번개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깊게 잠들었던 에르잔을 깨운 것은 기묘한 물소리였다.
아니, 물보다는 진흙 같다고 할까. 액체와 고체 사이의 덩어리지면서도 질펀한 무언가가 꾸물거리며 움직이는, 불쾌한 소리였다.
특별히 호불호를 말하지 않는 에르잔의 귀에도 듣기 껄끄러운 소리였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자, 이마에 고운 손이 와 닿더니 사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르잔. 괜찮아요?”
“……사비나 아가씨.”
“미안해요. 깨우려던 게 아닌데……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창밖에서 빛이 쏟아졌다. 동그란 어깨 너머로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이 마치 금가루를 뿌린 듯해, 에르잔은 방금 전까지 불쾌한 소리에 시달리던 것도 잊고 넋을 잃은 얼굴로 사비나를 바라보았다.
“에르잔. 왜 그렇게 봐요? 어디 아파요?”
“아닙니다. 아가씨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 말을 하려다가 막상 부끄러워져, 에르잔은 입을 다물었다.
알몸으로 침대에서 함께 잠든 것이 처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비나의 몸을 빤히 보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 시선만을 돌렸다. 시선을 돌린다고 한들 감각은 멀쩡한지라, 걸친 것 없는 남녀의 육체가 맞닿아 있는 것은 생생하게 느껴졌지만.
“아가씨, 너, 너무 가깝습니다. 저어…….”
간밤에는 그런 행위를 해 놓고도 아침이 되면 왜 사라졌던 부끄러움이 샘솟는지, 에르잔이 말을 더듬으며 사비나의 어깨를 감싸 밀어내려 했다. 가느다란 금속 줄이 손가락에 걸려 흔들리자, 또다시 귓전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
“에르잔?”
눈을 돌려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에르잔은 사비나를 마주 보았다.
둘 다 알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물론 사비나의 몸에는 옷자락 같은 것은 하나도 걸쳐있지 않지만, 다른 것이 걸려 있었다.
성인의 모습을 부조한 금줄 목걸이.
로스카엔 사제가 에르잔에게 건넸다가, 다시 사비나가 가져간, 그녀의 아버지의 유품이 그녀의 목에 걸려 있었다.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