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57화 (157/189)

157화

***

“카밀라, 엎드려!”

“엄마야!”

어둡던 하늘이 눈이 멀 정도로 새하얗게 빛나더니, 마치 그 많은 빛을 하나로 그러모아 화살을 만들어 쏘기라도 한 것처럼 커다란 나무 꼭대기에 내리꽂혔다.

소리가 지나치게 크면 소리가 아니라 진동으로 느껴진다고 하던가. 지진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속이 메스꺼울 정도로 머리가 흔들렸다. 카밀라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양 귀를 틀어막느라 바닥에 엎어진 줄디즈는 얼굴에 진흙이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굴속에 고개를 파묻은 짐승처럼 몸을 웅크렸다. 두 남동생을 짐짝처럼 들고 가던 네나뷔스테는 카밀라가 줄디즈를 내던지다시피 하고 달달 떠는 모습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다가왔다.

“카밀라, 내가 엎드리라고 했지 언제 줄디즈를 내던지라고 했니? 내 동생 다치면 책임질 거야?”

“몰라! 내 뒤에 바로 꽂혔어! 나 죽을 뻔했다고!”

“바로 뒤는 무슨. 한참 멀리 떨어졌는데 엄살 그만 부려.”

“그래, 넌 용감해서 좋겠…… 꺄아악!”

또다시 번개가 내리치는 바람에 카밀라가 기겁하며 네나뷔스테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어린 동생들이 안겨 드는 것에는 익숙해도 다 큰 성인 여자가 달려드는 모습에 안 좋은 기억이 있는 네나뷔스테는 본능적으로 카밀라의 다리를 걷어찼다.

“아악! 아파!”

비명을 지르며 카밀라가 걷어차인 다리를 붙잡고 나뒹굴었다.

“이런, 나도 모르게.”

뒤늦게 아차 싶었으나 갑자기 달려드는 상대를 반사적으로 걷어차는 것은 정당방위였으므로 네나뷔스테는 사과하지 않았다. 줄디즈를 일으켜 주고, 온통 진흙투성이인 얼굴과 머리카락을 대충 치맛자락으로 닦아 주었다.

“줄디즈. 괜찮니? 다행히 번개는 나무에 떨어졌어. 너무 무서워하지 마.”

“언니. 우리 교회로 가야 해.”

줄디즈가 자그마한 손으로 네나뷔스테의 치마를 움켜쥐었다. 동생의 얼굴을 닦느라 진흙투성이가 되었음에도 네나뷔스테의 모습은 이 숲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꼿꼿했다.

“교회라…… 너무 멀어. 광장은 넓어서 비를 피할 곳도 없는데.”

오딜의 거처가 있는 숲은 동쪽. 교회는 서쪽. 넓은 광장을 가로질러 가다가 번개라도 내리치면 피할 곳이 없다. 네나뷔스테는 눈을 가늘게 하고 멀리 보이는 제 집터를 살폈다. 원래도 그리 멀쩡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벼락에 집어삼켜진 남쪽의 집터엔 재밖에 남지 않았다.

“북쪽 숲으로 돌아가야 할까? 그럼 더 오래 걸리는데…….”

“언니, 저기…….”

줄디즈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수십 년을 자란 나무보다도 높이 올라선 첨탑의 꼭대기가 보였다. 출입금지 구역이었던, 동쪽 첨탑이다.

“줄디즈. 저기 있던 교회는 없어진 지 오래야. 첨탑밖에 안 남아있거든.”

“아직, 있어…….”

“첨탑이야 남아 있지만, 저곳이야말로 높아서 번개에 맞기 딱 좋은데? 무너지면 어쩌려고.”

네나뷔스테는 줄디즈가 예언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동생들을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아 최대한 부탁을 들어줄 뿐이었다. 물론 카밀라의 설명을 듣고 그대로 있어서는 위험하다고 판단했던 탓도 있지만.

“……그래. 거기까지라면 아까 버려 두고 온 오딜 아저씨도 어떻게든 끌고 갈 수 있긴 하겠네.”

네나뷔스테는 내려온 숲길을 돌아보았다. 비는 둘째치고 천둥 번개가 내리치는데 자기보다도 덩치가 큰 오딜을 끌고 올 재간이 없어 그를 두고 오는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의 목숨은 하늘에 맡기자며 흙과 짚더미로 덮는 것을 보고 카밀라가 무덤부터 미리 만들어 두는 거냐고 한 소리를 했다. 상황이 급박해 무시했지만 내심 오딜이 마음에 걸렸던 네나뷔스테는 두 남동생의 등을 철썩 쳐서 스스로 일어서게 하고는, 줄디즈에게 다가갔다.

“줄디즈. 오빠들 따라서 동쪽 첨탑으로 가 있을래? 언니는 오딜 아저씨를 끌고 갈게.”

“네나뷔스테. 나부터 좀 도와줘. 다리 부러진 것 같아…….”

“무슨 나자예프같은 말을 하고 그래? 다리가 부러졌으면 기어서라도 가.”

“야, 네가 걷어찼잖아!”

카밀라가 치마를 걷어 피멍이 든 다리를 보여 주었으나 네나뷔스테는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나한테 달려든 네가 잘못이야. 그리고 어차피 카밀라, 너는 한쪽 다리 절면서 걷는 거 익숙하잖아?”

저주에 씌었을 때, 얼굴 한쪽이 녹아내리고 다리를 절며 힘들게 길을 거닐던 카밀라의 모습을 네나뷔스테는 기억하고 있다. 네나뷔스테는 동생들을 지키느라 남쪽을 떠나지 않은 까닭에 카밀라와 카이라트 남매와 얽힐 일은 없었지만, 광장은 탁 트여 있어 멀리까지 보이는 데다, 서쪽 교회의 로스카옌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으므로 카밀라가 교회에 들락거리는 모습은 자주 보았다.

“와. 네나뷔스테, 너 진짜 못됐다. 어떻게 그때 이야기를…….”

“말만 많은 너보다는 행동하는 내가 낫지. 기어서 갈 자신이 없으면 벼락이 피해 가길 기도하면서 거기 웅크려 있으면 되겠네.”

네나뷔스테는 겨울바람처럼 싸늘하게 카밀라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카밀라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네나뷔스테를 노려보았다가, 노려본다고 뭐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아픈 다리를 문지르며 일어섰다. 자신이 지켜야 하는 동생들과, 은혜를 입은 오딜 외에는 냉정하기 그지없는 네나뷔스테가 아닌가. 카이라트를 주저 없이 갈퀴로 후려갈길 때 알아봐야 했거늘.

“줄디즈. 손잡을래? 나 걷는 것 좀 도와줘.”

“……언니가, 아이한테 도움을 청하는 어른은 수상한 사람이랬는데…….”

“네나뷔스테는 대체 동생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말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었으나 순식간에 수상한 사람 취급을 억울했던 카밀라는 괜히 성질을 부리며 네나뷔스테가 떠난 자리에 침을 뱉었다. 아이베크와 자니베크가 카밀라를 부축하려 다가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 서로 눈을 피하며 걸음을 돌렸다. 카밀라가 씩씩거리는 얼굴을 보고 아직 힘이 남아 있다고 판단한 줄디즈는 조용히 두 오라비의 뒤를 따랐다.

“줄디즈, 같이 가!”

15년 동안 절뚝거리면서도 마을 안을 쏘다닌 경험이 헛되지 않았는지, 카밀라가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세 아이를 따라갔다.

30. 해는 동쪽에서 뜬다

날이 밝았다. 천둥 번개가 요란하게 내리치던 것이 거짓말처럼 날씨가 맑았다. 검은 사철나무에 가려져 어두워야 할 숲에도 햇볕이 발을 들였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오늘 날씨가 좋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을을 빙 둘러싸고 있어야 할, 빽빽한 울타리와도 같은 검은 숲은 꼭 커다란 짐승이 한 입 베어 물고 달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듬성듬성하게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벼락을 맞고 두 쪽으로 갈라진 나무가 쓰러지면서 다른 나무를 내리치기라도 한 건지 곧게 솟아 있는 나무보다 옆으로 눕거나 허리가 꺾여 바닥에 드러누운 나무가 더 많았다.

분명 광장은 마을 중앙에 있었는데, 마을의 남쪽이 완전히 쓸려 나가 꼭 광장이 남쪽으로 길어진 것처럼 보였다. 붉고 검게 타들어 간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더라면 간밤에 내리친 것이 벼락이 아니라 태풍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바르셀다에게 거의 업히다시피 한 나자예프가 폐허가 된 남쪽과 반쯤 타들어 간 동쪽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우와…… 장난 아니네. 나왔다간 우리도 휩쓸릴 뻔했어.”

“형은 어차피 나올 생각 없었잖아.”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을 뿐이거든? 이건 불가항력이야!”

“천둥 소리가 무섭다고 내 이불까지 뺏어들고 갔으면서 무슨…….”

“바르셀다. 너 형한테 말하는 게 점점 도를 넘는다? 이 새파란 애송이가 한동안 못 본 사이에 많이 컸어, 응?”

“난 저주에 걸리기 전부터 형보다 컸는데.”

의미가 통하지 않지만 어차피 통해도 의미 없을 대화를 주고받으며 바르셀다는 동쪽 첨탑을 바라보았다. 비록 저주로 인해 엉망이 된 마을일지라도 교회는 신성한 장소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동쪽 숲의 반이 타들어 갔음에도 제가 갇혀 있던 첨탑은 멀쩡했다. 조금 떨어진 장소에 위치한 오두막은, 몇 개는 멀쩡하고 몇 개는 간밤의 비를 견디지 못하고 폭삭 주저앉은 듯했다.

“그 여자…… 카림이랑 같이 동쪽 첨탑에 있겠지?”

“그렇겠지. 사비나는 무사할 거야. 벼락이 내리치면 에르잔이 대신 맞아서라도 구해 주겠지. 나는 에르잔을 믿지 않지만, 에르잔을 믿는 사비나는 믿거든!”

“……말을 말아야겠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내내 교회 안에서 기절한 이들을 보살피느라 바르셀다는 밤을 꼬박 새웠다. 천지가 흔들린다고 느껴질 정도로 우렁찬 천둥 번개가 내리쳤음에도 다들 깨어나지 않는 것을 보고 걱정하는 바르셀다에게, 아페티트는 <휴식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밀어내니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겁니다>라고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그 사비나라는 여자……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알렉세이 형과 한패 같지는 않아 보였는데…….’

그녀가 사악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수상쩍다는 생각은 지워지지 않는다. 차라리 알렉세이에게 속아서 이 마을의 저주에 휘말린 거라면 당황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자신에게 향하는 원망은 또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자신이 지은 죄는 아니지만 네가 화내서 속이 편해진다면 받아 주겠다는 듯한 그 담담한 태도가 꼭 로스카옌을 생각나게 해, 바르셀다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래서 날이 밝자마자 교회에서 뛰쳐나왔다. 도와줄 생각은 없지만 방해할 생각도 없어 보이는 아페티트에게 사람들이 잘 자는지 지켜봐 달라는 일방적인 부탁을 하고.

하필이면 도움도 되지 않는 나자예프가 같이 데려가 달라며 매달려온 것이 문제였지만.

“떼어 놓기 귀찮다고 업고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바르셀다. 너 지금 내 욕하지?”

“형은 정말 도움이 안 돼.”

“야! 네가 나한테 도움이 되어야지! 원래 동생은 형에게 부려먹히기 위해 태어나는 존재야!”

“그래. 그건 맞는 맞이지. 멍청하긴 해도 아주 돌머리는 아니었구나.”

바람에 익숙한 목소리가 실려 왔다. 바르셀다의 걸음이 멈추었다. 업고 있던 나자예프를 안은 팔에 힘이 풀려, 나자예프가 바닥에 떨어졌으나 그도 이번에는 아프다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폐허가 된 남쪽. 원래는 수풀 사이로 좁은 오솔길이 나 있었을 자리를 걸어오는 기다란 인영이 보였다.

“오랜만이구나, 바르셀다.”

“……알렉세이, 형……?”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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