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사비나 아가씨……!”
에르잔의 눈이 커다래졌다.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상황에 꺼내기엔 적절한 말이 아니었으니까.
“이상하죠? 미친 것 같죠? 그래요. 보통 사람이라면 이럴 수가 없어.”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이런 절망을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하나요? 해결법을 탐색하려 하겠죠? 아니면 하다못해 나를 끌어들이는 절망의 정체가 무엇인지라도 파악하려 하겠죠? 그런데 나는 그렇게 못하겠어.”
페고라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따져보아야 한다거나, 죽은 로스카옌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러야 한다거나, 사비나를 원망하며 눈물을 흘리는 카림을 달래고 사정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거나, 평범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것이다.
그러나 사비나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평범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정말 속에서 체념하고, 포기하고, 끝내 자신을 혐오하기로 결론을 내버린 것처럼.
자신이 이제까지 믿어 왔던 모든 것이 뒤집어지고 발밑이 무너지는 지금, 사비나는 놀라기보다, 당황하기보다, 두려워하기보다, 해결책을 찾아보려 하기보다, 회피하고 있다.
“나…… 나,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어. 그냥 매달리고 싶어요.”
흐느끼는 목소리가 빗소리에 지워졌다. 그런데도 에르잔은 사비나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검은 속눈썹에 맺힌 빗방울이, 사비나가 눈을 깜박일 때마다 눈물과 섞여 하나가 되어 흘러내린다. 하늘이 우는 것처럼 그녀도 울고 있었다. 비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처럼 그녀도 흔들리고 있었다.
사비나의 어깨가 약하게 들썩이더니, 에르잔의 팔에 손톱자국을 남길 정도로 강하게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이 빠졌다.
“도망쳐요, 에르잔. 나는 결국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내 절망 속으로 당신을 끌어들이고 말 거야.”
늪에 빠진 자신에게 드리워진 구원의 밧줄이 진짜라고 한들 무슨 소용일까.
자신은 그 밧줄을 잡고 늪을 빠져나가기보다, 자신을 구원하러 다가와 준 밧줄을 끌어당겨 함께 잠겨 버리고 말 것을.
“제발…… 이번이 마지막 기회예요. 더는 당신을 배려할 자신이 없어…… 당신을 위해 내 욕심을 포기할 자신이 없어…….”
빗줄기에 얻어맞을 때마다 가녀린 몸이 휘청거렸다. 에르잔은 팔을 뻗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사비나의 몸을 지지했다. 사비나의 몸이 차가웠다.
이렇게 차가운데도 눈빛이 뜨거웠다. 가녀린 몸이 떨고 있는데도 맞닿은 부위를 통해 울리는 심장의 고동만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크게 뛰고 있다. 울먹이며 하는 말은 빗소리에 지워져 흐릿한데, 어째서 귓가에 스며드는 말의 의미는 이토록 달콤하기만 할까.
“역시, 로스카옌 신부님의 말이 옳았습니다.”
“네……?”
“아가씨께서는 누구도 위하지 않고 계십니다. 누구도 배려하지 않고 계십니다.”
더는 사비나에게 관계하지 말고, 어서 멀어지라고.
다른 주인을 찾아보라고.
사비나는 그것이 <에르잔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틀렸다.
에르잔은 단 한 번도 그런 것을 바란 적이 없다.
사비나가 에르잔을 배려해서 밀어낸다고 하지만, 그것은 배려가 아니다.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욕망하는 대로 요구하십시오. 한 사람…… 아니, 저에게는 그러셔도 됩니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타인을 이해할 수 있을까.
자신을 배려하지 못하는 자가 타인을 배려할 수 있을까.
잘못된 이해.
그리고 잘못된 배려.
로스카옌이 죽어가면서 후회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가 사비나에게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에르잔은 알 수 있었다.
“저도 당신을 원합니다.”
순간 비가 그쳤다고 생각했다. 한 걸음 정도 떨어져 있던 거리가 급격하게 가까워지면서 에르잔의 팔이 사비나의 몸을 에워쌌다. 단단한 턱이 그녀의 정수리에 닿았다. 바늘처럼 몸을 찌르는 빗줄기도, 얼어 버릴 듯이 차가운 바람도 느껴지지 않았다.
맞닿은 가슴에서 전해지는 고동이 두 사람의 심장이 함께 뛰고 있음을 전해 주었다.
그래. 함께 뛰고 있음을.
“에르잔? 왜…….”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왜 마을에 이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는지, 그녀가 이런 절망을 겪어야 하는지, 자신이 그녀를 놓지 못하는지 이유는 모른다.
그러나 에르잔은, 사비나가 위험에 처했을 때 말려들면 안 된다며 그를 밀어내기보다, 도와 달라고 매달려 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녀가 욕망을 좇기를 바란다.
그를 배려하지 말고.
그녀의 욕망과 그의 욕망이 맞닿아 있는 한, 사비나가 욕망을 포기하는 건 에르잔에게 어떤 배려도 되지 못하니까.
“매달리고 싶다고 하셨지요? 얼마든지 그러십시오.”
“에르잔…….”
“제게 요구하십시오, 제발.”
도와 달라고, 구해 달라고, 위로해 달라고, 슬프고 아픈 일은 모두 잊게 해 달라고.
사비나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에르잔의 욕망이니까.
“저도 포기할 자신이 없으니까요.”
사비나를 원하는 마음을. 그녀의 곁에 있고 싶은 자신을. 처음으로 얻은 정당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싶은 욕심을.
다른 것은 몰라도 좋다. 더 나은 것이 있다고 한들 알고 싶은 생각도 없다.
처음 가진 것으로 충분하다. 이것이 유일이 되기를 바란다.
사비나가 고개를 들었다. 고개가 위를 향하고 있는데도 빗물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하늘이 온통 검게 물든 와중에도 빛을 잃는 일이 없는 새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나…… 너무 무서워요…….”
“지켜 드리겠습니다.”
더듬거리며 뽑아 낸 사비나의 말과는 대조적으로, 에르잔의 대답은 무척이나 단호했다.
마치 그녀가 이렇게 말해 오기를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
동쪽 첨탑에서 두 사람이 머물던 오두막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지만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덩치가 크고 발이 빠른 에르잔에게 거리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발로 문을 걷어차고 들어온 에르잔의 눈에 정리되지 않은 침실이 들어왔다. 그러나 청소 같은 것을 할 여유는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미 두 사람의 몸부터가 빗물로 흠뻑 젖은 상태였으니까.
“에르잔. 추워요…….”
“따뜻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옷이 젖어 피부에 들러붙은 탓에 잘 벗겨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에르잔의 손은 놀라울 만큼 간단하게 사비나의 옷을 벗겨 냈다. 하얀 피부에 달라붙는 검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훑어 내며 창백한 뺨에 입을 맞추자, 사비나가 에르잔의 목 뒤로 팔을 둘러왔다.
내내 숲에서 구른 데다 비에 젖기까지 했는데, 피부가 맞닿는 순간 불쾌한 감각은 싹 날아가 버렸다. 에르잔은 어차피 제구실을 못하는 옷을 한 손으로 찢어 버리고 다른 한 손으로 사비나의 허리를 휘감았다. 차갑게 젖어 있던 늘씬한 허리가 남자의 팔 안에서 미끄러지면서 비로소 온기를 내뿜었다.
“에르잔, 더 가까이…….”
“걱정하지 마십시오.”
맞닿은 가슴이 비벼지며 울리는 심장 소리가 팔딱거리는 게, 꼭 급하게 보채는 아이의 칭얼거림처럼 느껴졌다. 아주 어릴 적 이후로 한 번도 어리광을 부려본 적이 없는데, 라며 사비나가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온몸을 깃털로 간지럽히는 듯한 자극에 에르잔이 큼, 목을 울리고는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을 내려 탐스러운 엉덩이를 꽉 쥐었다.
“아!”
갑작스런 자극에 당황한 듯이 높아진 소리를 입술로 빨아들이자 사비나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발뒤꿈치에 닿는 침대의 감촉을 확인한 듯 그녀가 몸에 힘을 빼는 것이 느껴졌다. 에르잔은 사비나를 침대에 눕히지 않았다. 그녀와 온몸을 밀착한 채로 거듭해서 입을 맞추며 커다란 손으로 매끄러운 피부 위를 간질였다.
“응, 에르잔…… 아…….”
“제게 맡기십시오, 사비나 아가씨.”
하는 말은 평소와 같은데 움직이는 손이나 아랫배에 닿는 흉흉한 물건의 부피감은 그렇지가 않다. 젖은 피부가 마찰할 때마다 차가운 빗물이 뜨겁게 데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느낌이 아니라 진짜일 것이다. 창백한 피부가 붉게 물드는 것이 보였으니까.
“아직도 추우십니까?”
“으응…….”
사비나는 에르잔의 시선을 외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계속하라는 의미임을 에르잔은 모르지 않았다. 춥고, 춥지 않고는 결국 구실일 뿐이다. 서로를 욕망하는 마음을 드러내기 부끄러울 때 둘러대는 변명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에르잔은 부끄러움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았지만.
“많이 추우신 모양입니다. 아직도 이렇게 떨고 계시니…….”
입가에 흐르는 타액을 빨아 마시며 내려간 입술이 쇄골에 다다르자 가느다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더 해 달라고 조르는 듯한 동작에 에르잔이 사비나의 몸을 번쩍 안아 들어 벽으로 밀쳤다. 사비나는 벽에 몸을 기대지 않고 몸을 에르잔 쪽으로 바짝 웅크렸다. 꼭 커다란 짐승에게 매달려 포식자를 피하려는 작은 짐승처럼.
어떤 포식자를 피하려는지는 몰라도, 두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은 짐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비나가 헐떡거리며 에르잔의 어깨에 손톱자국을 낼 때마다 그녀의 다리 사이를 문지르는 흉포한 성기는 부피를 더욱 키워 가기만 했다.
빗물로 흠뻑 젖었던 두 사람의 몸이 다른 액체로 젖기 시작했으나 둘은 상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즐거워했다. 허공이 다리가 뜬 채로 사비나가 다리를 허우적거릴 때마다 질척이는 소리가 울리는 것이 꼭 물장구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에르잔, 좋아…….”
열이 오를수록 착 달라붙어 오는 말랑말랑한 여자의 몸과는 달리 남자의 몸은 흉곽이 크게 부풀고 힘줄이 도드라졌다. 핏줄까지 불거진 목에서 짐승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굶주린 짐승에게 먹이를 주듯 사비나가 고개를 들어 에르잔의 입술을 살짝 깨물어 빨아들였다.
사비나는 검은색과 흰색. 에르잔은 황금색과 푸른색.
서로 공통점이 없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의 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