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 속의 불-154화 (154/189)

154화

눈앞이 흐려졌다. 세상 모든 것이 뿌옇게 내려앉은 와중에, 검은 머리의 여인이 걱정스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로스카옌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것은 교회 미사실의 구석에 서 있던 자그마한 어린아이였는데, 그 아이는 어느새 어머니를 닮아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있었다.

‘올가를 닮아……? 아니지…….’

나자예프와 오딜은 사비나를 보고 올가를 닮았다고 말했다. 로스카옌도 문득 그런 생각을 한 순간이 있었다.

아름다운 사비나. 조용한 사비나. 의사 표현을 잘 하지 않고, 묵묵히 따르는 사비나. 하지만 속에는 사실 원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표출하고 싶은 감정도 많은 사비나.

그런 점들이 올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비나는 로스카옌을 닮았다.

겁이 많고, 주저하고,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련을 놓지 못하고, 좋아하는 마을을 거두어들일 만큼 강하지도 못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속이고 합리화하며 상처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미련하고 바보 같은 자신을 닮았다.

‘그랬구나. 그래서 마주 보는 것이 힘겨웠던 거였어…….’

죽어 버린 올가를 닮아서, 자신의 죄의 증거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서 사비나를 보기 힘들어했는데.

그마저도 자기기만이었다.

로스카옌은 사비나를 통해 숨기고 싶은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무서웠다.

진실을 밝힐 용기도 없으면서, 그렇다고 도망칠 자신도 없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양손에 가득 쥔 모래가 빠져나가는 것을 울면서 보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마주하는 것이 싫었다.

가장 부정하고 싶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 인간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환상을 덧씌우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던가.

“그래서는…… 안 됐는데…….”

“로스카옌 신부님!”

사비나가 불렀을까? 아니면 에르잔이 불렀을까? 뭐라고 말하는지는 들리는데 목소리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사비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니 아마도 사비나가 부르는 것이리라.

“원하는 대로, 주저하지 말고, 욕망하는 대로 살았어야 했는데…….”

“말씀하지 마세요! 치료를…….”

“아가씨는 꼭 원하는 것을 손에 쥐십시오.”

자신을 향해 뻗어온 사비나의 손을 쥐었다. 손이 아직 움직이나? 어쩌면 잡았다고 생각만 할뿐 이미 몸은 녹아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로스카옌은 희미하게 웃었다.

“아가씨가 원하는 일을 하십시오. 욕망을 좇으십시오. 자신을 먼저 생각하십시오. 자신을 먼저 이해하십시오…….”

울컥 치미는 것이 감정인지, 눈물인지, 아니면 제 기능을 다한 내장이 뒤집어지며 토해 내는 피인지 알 수 없었다. 로스카옌은 뭔지도 모를 액체를 토해 내면서, 제대로 발음되지도 않는 말을 필사적으로 중얼거렸다.

“꼭 기억하십시오. 아가씨가 먼저입니다. 아가씨의 행복이 먼저입니다. 아가씨의…….”

우리 아가. 네가 원하는 대로, 행복해지기 위해 살려무나.

목이 반쯤 잠겨서 제대로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귀에 제 목소리가 들린 것으로 보아 아마도 소리 내서 말을 한 것은 맞는 듯했다.

“로스카옌 신부님…… 로스카옌…… 아……!”

말을 좀 더 빨리하는 버릇을 들였더라면 죽기 전에 <아버지>라는 말을 전해 줄 수 있었을까. 사비나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로스카옌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저주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인간의 몸은 마치 묽은 반죽처럼 힘없이 바닥에 늘어졌다. 피가 엉겨 붙은 새하얀 머리카락과 수염만이 그것이 본래 인간의 몸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왜……!”

“로스카옌이 왜 죽었는지를 묻는 거려나? 저주 때문이잖니.”

페고라는 바로 옆에서 사람이 녹아내리는 것을 보고도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주로 죽어 가는 사람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은 이미 익숙하다는 듯이. 그 끔찍한 광경이 차라리 로스카옌에게 안식을 가져다준 것이 다행이라는 듯이.

“그 말이 아니에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예요? 로, 로스카옌 신부님이 내 아버지라고는, 한 번도……!”

“올가가 로스카옌의 아이를 가진 건 맞아.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의 딸을 낳은 것도 맞고. 네가 올가의 딸이라고는 나도 생각 못 했지만.”

별로 안 닮았거든, 이라고 덧붙이면서 페고라가 눈을 감았다. 원래도 시력이 나쁜 데다 몸까지 피로한 터라 어차피 눈을 뜨고 대화하든 감고 대화하든 차이는 없었다.

“네가 올가의 딸이라면 아버지는 로스카옌일 테고, 알렉세이의 딸이라면 어머니는 다른 사람일 테지. 뭐, 전자든 후자든 네가 이 마을의 원수라는 건 변하지 않지만.”

“뭐라고요?”

“마지막 저주이자, 최초의 저주지. 죽음의 화신은 이 마을 사람들의 죽음 위에 만들어졌으니까.”

주술을 완성하기 위해 죽어 간 사람들. 카이라트가 연구했던 불로불사의 주술.

그것을 융합하지 않고 4개로 나누어, 알렉세이는 단지 <불사>만을 만들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언제고 사라져야만 하는 것을, 위대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른 <불사>의 저주를 사비나가 받아들임으로써 그녀는 죽지 않는 몸이 되었다.

다른 모든 이들의 죽음을 제물로 삼아.

“이, 이 마을이…… 저주받은 게, 나 때문이라고요……?”

“마을 하나를 초토화시켜서 만든 죽음의 화신치고는 어리숙하지만 말이야. 희생된 사람의 숫자가 많았으면 더 똑똑해졌으려나?”

“페고라!”

“나한테 소리치지 마. 머리 울리니까. 원망은 네 아버지에게 하렴.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방관하던 로스카옌이든, 널 그렇게 만든 알렉세이든 간에.”

거기까지 말하고, 페고라의 고개가 푹 꺾였다. 순간 죽은 줄 알고 손을 가까이하려는데 에르잔이 먼저 페고라의 어깨를 붙잡더니 바닥에 눕혔다. 목과 턱 사이의 맥을 확인하고는, 괜찮다는 신호를 보낸다. 아마도 무척 지친 탓에 기절한 것이리라.

“사비나 아가씨. 우선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페고라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진실이라면요?”

“사비나 아가씨. 진의는 나중에 파악해도 늦지 않습니다. 우선 쉬셔야…….”

“이 마을이 이렇게 된 게, 나 때문이라면요? 내가 아버지도 아닌 사람에게 끌려가 이제까지 사람을 죽여 왔던 게 사실이라면요?”

사비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무릎에 걸쳐져 있던 로스카옌의 사제복이 스르륵 떨어져 바닥을 덮었다.

“난 지금까지 무엇을 해 온 거죠?”

“사비나 아가씨. 진정하십시오.”

“난 나 때문에 죽고 병든 사람들을, 구원하겠다는 염치도 없는 짓을 하고 돌아다녔던 거예요?”

“누나가 그랬어요?”

뒤에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비나와 에르잔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비쩍 마른 팔다리를 바들바들 떨면서도, 아이는 휘청거리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우리 엄마도, 누나 때문에 죽은 거예요?”

“카림…….”

“나는 엄마를 죽인 사람한테, 엄마를 구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한 거예요?”

밖에서 콰르릉, 하고 하늘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꼭 사람의 머리를 망치로 내리치는 소리 같다고 사비나는 생각했다.

카림의 회색 눈동자가 원망으로 물들었다.

아이의 눈에 눈물이 차오른다.

저주의 검은색도, 피의 붉은색도 아닌, 투명한 눈물이.

“카림, 나는…….”

뭔가 말하려다가, 혀를 깨물었다. 물론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발음이 씹힌 것으로 보아 그런 게 아닐까, 하고 느꼈을 뿐이다.

카림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모습도 흐려졌다. 공허한 첨탑에 을씨년스럽게 울리던 심장 소리가 어느새 쏟아지는 빗소리에 감춰졌다.

사비나는 뛰고 있었다.

발에 밟히는 것은 교회 바닥의 돌이 아닌 풀밭이었다. 검은 숲을 집어삼킬 듯이 쏟아지는 비가 자신의 몸을 때리는 것을 느끼고, 사비나는 어느새 자신이 첨탑에서 뛰쳐나왔음을 깨달았다.

“사비나 아가씨!”

뒤따라 뛰어왔는지 에르잔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기절한 페고라는, 울먹이는 카림은 어쩌고 왔어요?

그렇게 물어야 하는데, 사비나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은 전혀 다른 소리였다.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해요?”

“사비나 아가씨…….”

“내가 원해서 한 일도 아닌데…… 나는 그저 억지로 끌려가서, 세뇌받고, 저항할 힘이 없었던 것뿐인데……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해요? 왜 이런 식으로 원망하는 소리를 들어야 해요?”

죽은 자들에게는 죄가 없다. 마을에 일어난 일은 비극이었고, 학살을 저지른 것은 알렉세이가 이끈 병사들이다. 그 과정에서 죽어 없어진 사람들의 원망을 그러모아 만든 저주를 어린 사비나의 안에 욱여넣었다. 차라리 저주를 감당하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면 편했으련만, 사비나의 몸이 그 많은 저주를 버텨 낸 까닭에 그녀는 죽음을 부리는 저주의 화신이 되어 버렸다.

사비나는 아버지를, 아니, 아버지를 사칭한 알렉세이를 원망했다.

사람을 죽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자신을 원망했다.

그녀의 저주에 의해 죽어가는 이들이 원망을 해도, 죽은 이의 가족이나 친구가 원망을 해도, 마땅히 자신이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은 이와 관련이 없더라도, 죽음의 화신인 그녀가 그저 보기 껄끄럽고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욕하고 멸시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비나는 원망을 듣는 데 익숙했다. 경멸하는 눈빛과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아도, 모욕적인 폭언을 퍼부어도, 부당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죽음의 화신이니까. 콘바야젠 백작가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일평생 학살자의 길을 걸어야 하니까.

그때는 자신을 향해 얼마나 많은 화살이 날아오고, 얼마나 예리한 칼날이 파고들어도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냐는 거냐고요, 왜!”

사비나가 제 몸을 아끼지 않고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보면서, 카밀라는 그녀를 <강하다>고 평가했고 오딜은 <무모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아니었다.

사비나는 강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척이나 약했다.

살이 베이고 뼈가 꺾이는 고통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주를 흡수했던 건, 거창한 사명감 때문도 아니고 상처받는 것이 아무렇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때만큼은 잊을 수 있었으니까.

자신이 학살자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으니까.

자신의 행동이 위선이라는 것을 안다.

마을을 구원하고자 나선 것이 아니라, 그저 이제까지 저질러온 일에 대한 죄책감을 지우기 위해 저주를 흡수하고 다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사비나는 카밀라의 호의를 받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늘 <내가 저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며 자책하고자 했다.

언제고 진실을 알게 되면 그들이 그녀를 원망하겠지만, 비록 사비나가 위선자로 불릴지언정, 그들이 저주에서 해방된 것은 사실이니 그들에게 행복을 주었다고 자위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죄책감을 지우고, 타인을 구한다는 알량한 자기만족을 위해 저지른 일이 이토록 큰 절망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그녀가 그들을 구원한 일이, 그들에게 더 큰 불행을 안겨주는 일이 될 줄은 몰랐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사람들이 죽었어요…….”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을 구하면, 죄책감을 덜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 마을 사람들이 죽어가고, 또한 살아남은 이들마저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이유는 사비나를 저주의 화신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들을 구한 줄 알았는데, 저주에서 벗어나게 해준 줄 알았는데, 처음부터 그들을 저주의 늪에 밀어 넣은 것이 사비나였다. 내내 고통 속에 몸부림치던 이들에게 선심을 쓰듯 구원의 손을 내밀었다.

<나는 엄마를 죽인 사람한테, 엄마를 구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한 거예요?>

카림의 원망 섞인 질문을 듣는 순간, 사비나의 안에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스스로 구원자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카림에게 <나는 너희 엄마를 구하지 못했다>고 분명히 말했던 것도 기억난다.

그러나 사비나는 그저 좀 더 일찍 저주를 흡수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을 뿐이다.

15년간 울면서 연못가를 배회했을 카림의 처지를 안타까워했을 뿐이다.

더는 아이가 상처받고 우는 일이 없기를 바랐을 뿐이다.

이 참극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진실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았다.

수상하다며 경계를 사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의심을 받아도 개의치 않았다. 구원자인 척 나서서 이 마을 사람들을 기만한 위선자라며 욕을 듣는 것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각오는 한 적이 없다.

“아버지의 명령에 억지로 따라도, 내 의지로 저주를 흡수하고 다녀도, 결과는 똑같아요. 나는 누군가를 죽이고, 상처 주고, 불행하게 만드는 일밖에 하지 못해.”

“사비나 아가씨,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로스카옌…… 신부님은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한 거죠?”

차마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로스카옌의 이름을 뱉은 뒤 사비나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창백했던 입술에 잇자국이 나더니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요?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없는데? 나는 죽지 않는데?”

죽음의 화신인 자신은 그저 빨리 죽어 없어져야 한다. 아니면 아무도 찾지 못하는 저주의 늪을 만들어 그 속에 잠겨 있거나.

죽거나, 죽은 듯이 숨어 살거나. 그런 미래밖에는 그리지 않았다.

그러나 사비나에게는 어느 쪽도 불가능했다.

죽음의 화신인 사비나는 죽지 않고, 어디에 숨어 있다고 한들 콘바야젠 백작은 반드시 사비나를 찾아내 다시 백작가로 끌고 들어갈 것이다.

“내가 원하는 일은 할 수가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기 싫은 것뿐이에요. 이미 수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대체 얼마나 더 죄를 지어야 한다는 거예요?”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사비나는 에르잔을 노려보았다.

에르잔의 탓이 아니다. 에르잔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녀를 죽음의 화신으로 만든 콘바야젠 백작은 이 자리에 없고, 그녀에게 원하는 대로 살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던 로스카엔 사제는 죽어버렸다.

상처를 준 사람도, 방황하게 만든 사람도 따로 있는데, 에르잔에게 화를 내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안다. 폭발하듯 쏟아져나오는 감정을 에르잔이 받아 주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에르잔이야말로 이 사건에서 가장 무고한 인간이니까.

정작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느냐>고 반문해야 하는 건 에르잔이니까.

그걸 알고 있는데, 멈출 수가 없었다. 사비나는 손을 뻗어 에르잔의 팔을 붙잡았다. 옷소매가 찢어진 까닭에 드러난 굵은 팔뚝에 가느다란 손가락이 엉겨 붙었다.

“내가 말했잖아요. 나와 함께 있으면 불행해진다고…….”

“불행해지지 않았습니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으로 한참 젖어 버린 사비나의 얼굴을 바라보는 에르잔의 눈은 절망의 구름을 이고 빗물처럼 피를 내뿜는 먹색의 하늘과는 달리 무척 푸르렀다.

“사비나 아가씨와 함께 있으면서…… 저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건 에르잔이 행복을 몰라서 그래요.”

“아가씨도 모르시지 않습니까.”

내내 우두커니 서 있던 에르잔이 한 걸음 다가왔다. 비가 이토록 쏟아지는데, 몸이 가까워진 것만으로 차갑게 젖은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사비나가 왜 이런 절망을 겪어야 하는지. 비참한 진실을 알아야 하는지. 이유는 알지 못한다.

에르잔이 왜 버려졌는지. 왜 힘들게 기사단에서 살아남아 시험에 합격하고도 내내 기다려야 했는지. 사비나를 따라 이 마을에 와야 했는지. 이 또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이유는 모르지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 누구와 함께하고 싶은지는 알고 있다.

“로스카옌 신부님께서 사비나 아가씨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해 주셨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라는 게, 나한테 필요한 말이라고요?”

“마을을 떠나라는 충고를 들었던 날, 아가씨께서는 <이 마을에 남고 싶다>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때처럼, 하고 싶은 대로 하시면 됩니다.

빗소리에 잠겨 버린 에르잔의 뒷말이 유달리 또렷하게 들려왔다.

“에르잔.”

“예, 아가씨.”

욕망을 구하라고 말한다면, 사비나가 지금 이 순간 원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나는 당신을 원해요.”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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