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교회의 첨탑에는 무서운 사람이 있으니,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언제였을까.
그리고 누구에게 들은 말이었을까.
시간이 멈추어도 기억은 지날수록 흐려지게 마련이다.
떠올리려 해도 기억이 나지 않아 카림을 얼굴을 찡그렸다.
바르셀다가 나자예프의 상태를 보고 기겁하며 달려와 걱정인지 잔소리인지 불평인지를 늘어놓는 사이, 카림은 슬쩍 자리를 피해 위로 올라갔다.
첨탑을 남겨 두고 나머지를 모두 철거한 까닭에 계단은 없었다. 그러나 몸이 날래고 가벼운 카림에게 계단 없는 탑을 오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덜렁거리는 쇠사슬을 붙잡은 아이는 폴짝 뛰어올라 벽에 발을 디뎠다. 높은 나무에 오르는 것처럼 튀어나온 벽돌과 장식을 밟고 올라가자 어두컴컴하던 주위가 조금 밝아지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난 창이 가까워진 덕분이다.
카림은 뿌옇게 먼지가 앉은 스테인드글라스를 손바닥으로 닦아 냈다. 아이의 손바닥이 까매지고 붉고 푸른 유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15년간 아무도 보수를 하지 않았음에도 유리에는 금이 간 곳 하나 없었다. 카림은 옷자락에 손바닥을 대충 문질러 닦은 뒤 반투명한 유리창에 다시 양손을 짚었다.
아마도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도저히 무게를 버텨 내지 못할 듯한, 종을 매달아 두던 낡은 받침대가 카림이 몸을 기울인 각도를 따라 끼익, 흔들렸다. 종을 매다는 녹슨 사슬을 밧줄 삼아 올라간 탓에 힘없이 늘어져 있어야 할 사슬은 뱀이 또아리를 틀듯 둥글게 몸을 감고 카림의 옆에 고정되어 있었다.
카림은 아래를 보지 않았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은 늘 검은 연못 주위를 홀로 배회했던 까닭일까, 카림은 높은 장소나 깊은 물 속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떨어질지도 모른다. 빠질지도 모른다. 그런 사실이 아이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던 때문이리라.
물론 저주를 벗어난 지금은 앉아 있는 받침대가 부서진다면 떨어져 죽을 수도 있겠지만, 15년을 한결같이 어린아이로 살아온 카림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보다 높은 창 너머로 마을 전체의 풍경이 한눈에 보인다는 사실에 사로잡혔다.
'첨탑에는 아무도 없는데, 왜 어른들은 가지 말라고 했을까?'
바르셀다가 지하에 갇혔던 사실도, 교회를 서쪽으로 이전한 이유가 아페티트를 가두기 위해서라는 사실도 모르는 카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교회의 첨탑은 무척 높지만 그뿐, 괴물이 숨어 살 정도로 넓지는 않았다. 어린아이인 카림이 아니라면 이렇게 높이까지 올라오기도 전에 받침대가 무너져 주저앉았을 것이다. 카림은 제가 발로 뛰어다닐 땐 그렇게 넓게만 느껴졌던 중앙 광장이 손가락으로 만든 고리 안에 들어갈 정도로 작게 보인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꼭 타다 만 빵 반죽처럼 둥글넓적한 공간에 모여 있는 이들은 익숙한 얼굴이지만, 낯선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서운 얼굴로 무기를 든 여자들이 기절한 카이라트를 에워싸고 옥신각신 언쟁을 벌이는데, 멀어서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 반대편에서 두 개의 인영이 광장의 중앙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보고, 카림은 이마가 유리창에 닿을 만큼 얼굴을 창가에 바짝 붙였다.
“잠깐. 저거 사비나 아냐?”
아래서 나자예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휘청거리면서 뛰어가다가 어디에 부딪혔는지 뭐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나고, 바르셀다가 짜증을 내면서 나자예프를 끌고 나갔다. 아페티트는 소리 없이 뒤를 따르려다 문득, 고개를 들어 높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카림은 아래를 보지 않았기에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아래서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거 원, 숨 돌릴 틈이 없군요.”
카림에게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아페티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교회 밖으로 나갔다. 다급해서 카림의 존재를 잊어버린 두 남자와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은 한 남자가 나가고도, 카림은 한참을 그곳에 앉아 있었다.
‘누나하고, 형이잖아? 도망쳐야 할 텐데…….’
가까이서 지켜보았더라면 분명 위험하다며 말렸을 텐데, 높은 곳에서 창 너머로 지켜보니 도리어 현실감이 들지 않아, 카림은 사비나가 욕망의 거울로 사람들을 잠들게 만들고, 기절한 이들을 다시 서쪽 교회로 옮기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뭔가 이상했다.
처음 연못의 반대편에서 사비나를 보았을 때는 처음 보는 어른이라 반가웠고, 그녀가 손을 뿌리쳤을 때는 진심으로 절망했다. 그다음 연못의 물을 맑게 만들고 어머니의 뼈를 건져 낼 수 있도록 해 주었을 때는 마치 경이로운 마법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페고라에게 걷어차인 사비나에게 다가갔다가 손바닥에 화상을 입고, 토굴에 갇힌 그녀를 꺼낼 때까지만 하더라도 카림에게 사비나는 아주 대단한, 그리고 특별한 존재였다.
영웅이라고 할까. 구원자라고 할까. 가까워지고 싶고, 없어서는 안 될, 반드시 따라야 하는 존재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높은 첨탑에서 멀리 구경하고 있노라니, 사비나의 이질적인 힘이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힘에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픽픽 쓰러졌는데, 그들을 옮길 때는 마법처럼 들어 올리는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업어서 질질 끌고 간다는 게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사비나는 한 번도 그녀 자신이 만능이라고 말한 적 없지만, 마음속에서 사비나를 아주 대단한 구원자로 여기던 카림은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조금 기분이 상했다.
마치 악몽을 꾸지 않도록 밤새 노란 불빛이 되어 지켜 주다가 새벽이 되면 쏙 숨어 버리는 나무요정의 정체가 어머니가 놓고 간 촛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기분이라고 할까. 카림은 조금 아연해져서 창가에서 손을 뗐다. 광장에 사람들이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창밖으로 뭔가 흐르는 것을 보니 어느새 비가 내리기 시작한 모양이다.
끼익. 문이 열리고 또다시 사람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로스카옌과 페고라였다.
로스카옌의 상태가 무척 안 좋아 보였다. 카림은 바로 내려가서 안부를 물어야 하나, 아니면 페고라가 아직 무서우니 조금 더 숨어 있어야 하나 고민했다. 위험하게 왜 그런 높은 곳에 올라가 있었냐는 꾸중을 들을 것이 두려워 미적거리던 사이 내려갈 타이밍을 놓쳤다.
로스카옌의 목소리는 멀어서 잘 들리지 않는데, 페고라의 목소리는 쉰 듯한 금속성인데도 또렷하게 잘 들렸다.
앉아 있는 받침대는 흔들리지 않는데, 이상하게 몸이 떨려왔다. 카림은 혹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 두 사람이 제 존재를 알아차릴까 두려워 몸을 납작 엎드렸다.
깡마른 어린아이라도 받침대 하나에 몸을 완전히 숨기는 것은 무리였지만, 페고라도 로스카옌도 위를 올려다보지 않았던 까닭에 카림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 순간 일어났다.
“카림! 혹시 아직 여기에 있니? 대답해!”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닫혔던 문이 다시 열렸다. 카림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낼 뻔했다가,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문가에 서 있던 사비나와 에르잔은 반송장이 된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얼어붙은 듯했다. 덕분에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가, 못된 생각을 한 것 같아 눈을 질끈 감고 자신을 책망했다.
“로스카옌 신부님? 페고라?”
눈을 감고 있는데, 손도 닿지 않는 거리에 있는데, 사비나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기분 탓일까? 사비나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부터, 귀가 더욱 밝아진 느낌이 들었다. 페고라의 목소리는 물론이고,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던 로스카옌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아가씨…….”
“로스카옌 신부님! 어디를 다치신 거예요? 상처가…….!”
페고라가 로스카옌의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비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를 향해 뛰어왔다. 그러나 로스카옌의 몸에 손을 대기도 전에, 창백하게 질려서 뒤로 물러났다.
이 먼 거리에서는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야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카림의 눈에는 사비나의 표정이 똑똑히 보였다.
“로스카옌 신부님, 어떻게…….!”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 거지만, 내가 한 짓은 아니란다.”
“대,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분명 저주는 제가 없앴, 아니, 흡수를 했는데…….”
페고라의 변명은 듣지도 못한 듯, 사비나는 말을 더듬으며 다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검은 두루마기 안의 몸은 거의 녹아내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비나는 로스카엔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저주를 흡수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손을 떨었다.
뒤따라 들어온 에르잔이 시체 썩는 냄새에 표정을 굳히자, 페고라가 로스카옌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등을 벽에 기대고 앉았다.
“당황할 것 없어. 업보니까.”
“뭐라고요?”
“내 옆에 있는 이 저열한 송장은 너 하나의 목숨과, 이 마을 전체를 맞바꾼 바보거든.”
페고라의 지적에 로스카옌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는 숨이 찬 듯 어깨를 들썩이다가 힘들게 기침을 하고는 다시 축 늘어졌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머리가 잘 안 돌아간다고는 하지만 말이야, 참 어리석지? 자기가 이대로 죽으면, 살아남은 이들이 너에게 복수하지 않을 거라고 착각한 모양이야.”
“페고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아, 이 송장은 아직 몰라. 네가 올가와 알렉세이의 딸이라고 말하면서 카이라트가 자매들을 데려갔다는 걸.”
만약 사비나가 알렉세이의 딸이라고만 말했더라면, 페고라도 그 말을 믿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페고라는 올가가 낳은 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페고라는 카이라트를 수상하게 여겨 한 발 뒤로 물러났지만,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따르는 다른 자매들을 말릴 여력은 없었다.
“페고라, 그만…….”
“왜. 이제 와서 들키기는 싫다고? 내가 왜 네 부탁을 들어주어야 하지? 사랑하는 올가보다도 딸의 목숨을 택한 저열한 남자의 부탁을.”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