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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속의 불-152화 (152/189)

152화

마을 북쪽에 가장 생존자가 많았던 이유는 <체념>이 생존에 그리 치명적인 저주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주의 핵을 품은 페고라의 체념이 인생을 포기한 자의 그것과는 동떨어진 탓이기도 했다.

페고라는 알고 싶었다. 왜 자신이 이런 저주를 받아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자신이 저주로 죽고, 사지가 비틀리고, 고통받을 만큼 큰 잘못을 저질렀던가?

사제의 계율을 깨고 여인과 동침하여 아이를 만든 것은 제 부모인데, 어째서 저주는 태어난 아이인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가.

페고라는 답을 찾지 못했다. 답을 들려줄 아버지는 마을을 떠나 생사조차 모르고, 어머니 또한 죽은 지 오래다. 그리고 같은 상황에 처했던 올가마저 죽고, 딸아이는 실종되었다.

페고라는 묻기를 그만두었다. 답을 구하는 것을 포기했다. 체념하고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해답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고 해서, 품고 있던 의문마저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마을을 이렇게 만들어서, 알렉세이는 행복해졌을까?”

가장 사랑하던 여인인 올가를 차지하지 못했는데.

“알렉세이에게 조력해서 마을을 이 꼴로 만들고, 홀로 늙어야 했던 로스카옌 너는, 그래서 행복을 찾았니?”

페고라의 손톱이 로스카옌의 주름진 눈가로 파고들었다. 실핏줄이 터졌는지 손톱 끝에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간절히 원하는 게 있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서 타인을 짓밟고 절벽에서 밀어내야만 쟁취할 수 있는 게 있어서 우리의 남은 시간과 생명을 제물로 간절히 원하던 걸 성취해 낸 거였다면, 얼마나 쉬웠을까.”

자신이 살기 위해 타인을 죽인다.

자신이 가지기 위해 타인의 것을 빼앗는다.

원하는 자리에 오르기 위해, 그 자리에 서 있던 타인을 밀어 떨어뜨린다.

로스카옌이 욕망을 추구했더라면 그를 원망하고, 이런 짓을 저질러서 만족하느냐고 비꼬기라도 할 텐데.

로스카옌은 15년 동안 한결같이 생존자를 돌보고, 죽은 자를 위해 기도했다. 저주를 뿌린 장본인이라며 네나뷔스테가 폭언을 내뱉어도 담담하게 듣고 있었다. 망나니인 나자예프가 교회에 방문하면 이야기를 들어주고, 빵을 나누어 주었다.

“로스카옌. 네가 바랐던 게 무엇인지 말하렴.”

“……바라는 건 없어. 나는 그저 속죄하고 싶었을 뿐이니까.”

“너는 바라는 것도 없으면서 이런 죄를 저지를 수 있는 인간이니?”

로스카옌의 눈빛이 한층 탁해졌다. 페고라의 눈에는 초점이 맞춰졌는데, 로스카옌의 눈에 초점이 안 맞기 시작했다. 눈가를 찌른 탓인가 싶어 손가락에 힘을 뺐더니, 살짝 고여 있던 핏물이 주르륵 아래로 흘러 떨어졌다.

검은색이었다.

“로스카옌.”

“페고라. 나한테 손대지 않는 게 좋을 게야…….”

풍성한 수염 때문에 입술은 보이지도 않는데, 로스카옌이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참을 수 없이 역겨운 냄새가 풍겨 왔다.

북쪽 우물의 밑바닥을 막아 놓고 그곳에서 모든 것을 체념하고 누워 있으면서도 페고라가 내내 맡아야 했던 냄새.

15년 전 그날의 지옥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의 살이 썩는 냄새다.

“자네는 한번 극복한 저주니까, 큰 해는 없겠지만…… 닿아서 좋을 게 없지 않은가.”

저주는 사비나가 다 흡수하지 않았던가. 마을의 시간이 원래대로 흐르기 시작한 것은 페고라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로스카옌의 몸이 저주로 썩어들어 가는 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페고라와는 달리, 로스카옌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느긋하게 말을 뱉어 냈다.

“이제껏 피하고 있었던…… 업보지.”

손톱이 빠진 주름진 손이 가슴께를 짚었다. 피와 진흙이 엉겨붙어 더 이상 사제복으로도 보이지 않는 두루마기 안에는 한평생 떼어 놓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물건이 없었다.

성인의 모습을 부조한 금줄 목걸이.

알렉세이에게 가야 할, <마을 사람이 받는 저주>를 로스카옌으로 하여금 대신 받아들이게 만들었던, 주술도구.

마을 사람들이 주술이 걸린 범위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가두는 것과 동시에, 주술이 이 마을 밖으로 뻗어 나가지 못하도록 가두는 도구.

“원래는…… 떠난 후에…… 벗으려고 했는데…….”

저주에는 순서가 있어, 주술도구로 제물을 만들어 버리면 그 도구를 착용하기 이전에 걸린 저주는 흡수할 수 없다.

그래서 사비나는 나자예프와 바르셀다의 반지를 먼저 제거하고, 그들의 저주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로스카옌은 사비나가 네 개의 핵을 모두 흡수할 때까지도 목걸이를 벗지 않았다.

사비나가 흡수하지 못한 저주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마을 사람>으로 간주할 때는 외부인인 로스카옌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저주는, 그가 목걸이를 벗는 순간 통제력을 잃고 노쇠한 몸을 잡아뜯기 시작했다.

넝마가 된 사제복 안에는 인간의 몸이 아닌, 썩기 시작한 고깃덩이가 들어 있을 뿐이다.

“안에서 썩으면 냄새가 날 테니, 밖으로 끌어내 달라고 하고 싶은데…… 이렇게 비가 내려서야 원, 무리겠구먼.”

“올가를 위한다는 핑계로 도망치고, 속죄한다는 핑계로 도망치더니. 이젠 죽음으로 도망치려는 거구나.”

“……내가 살아있을 때 분노를 향하지 그랬나. 받아들였을 텐데.”

“나는 아무에게나 화풀이를 하고 싶은 게 아니란다. 그저 알고 싶었을 뿐이지.”

처음부터 답을 들려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로스카옌마저 죽어 버린다면 페고라는 그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다.

왜 이런 일을 자신들이 겪어야 했는지.

무엇을 잘못해서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지.

혹은 무엇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것을 빼앗기자마자 이렇게 되었는지.

차라리 알렉세이가 타인을 죽이는 데 쾌감을 느끼는 살인마라서, 그래서 사람들이 죽어간 거였더라면 이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차라리 로스카옌이 올가와의 비밀을 들키는 게 두려워서, 의심 가는 모든 이들을 죽이고자 마음먹은 거였더라면 이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우리의 불행에는 이유가 없어. 우리의 고통에도 이유가 없지. 분노는 가시지 않는데, 그것을 향할 곳은 없어. 겨누기도 전에 과녁이 사라져 버리거든.”

“……미안하네…….”

“무엇이 미안하지? 분노의 대상이 되어 줄 수 없는 것이?”

페고라의 비난에 로스카옌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을의 저주는 풀렸고, 사비나는 에르잔이 구하러 갔다.

햇살 같은 청년은 저주가 통하지 않는 몸으로, 사비나를 무척 아끼고 있으니 분명 그녀를 지켜 줄 것이다.

사비나가 이 마을에 남을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도망칠지는 알 수 없지만, 에르잔이 있는 한 사비나가 불행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비겁자인 자신에게 사비나의 행복을 지켜볼 자격은 없다.

그러므로 로스카옌은 미련이 없었다. 진실을 밝히지 못하는 것도, 다시 한번 올가를 닮은 그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도.

15년간 저주로 고통받아 온 이들이 해방이라는 이름의 허무를 맞이한 순간에, 15년간 저주를 피해 온 로스카옌은 비로소 죽음이라는 안식을 얻게 되었다.

얄궂은 일이다.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알렉세이를 미치게 만든 원흉인 자신이 가장 편안한 죽음을 얻는다니.

로스카옌은 공허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첨탑만을 남기고 철거한 교회의 천장은 아득할 만큼 높은데, 그 안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제임을 저버린 인간은 곧 숨이 끊어질 것이고, 답을 구하지 못한 채 버려진 인간은 영원히 분노를 쏟아 내지 못할 것이다.

“페고라…… 내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지?”

“말하지 마. 네가 입을 열 때마다 썩은 내가 풍기니까.”

“나는…… 원하는 게 두려웠어…….”

아름다운 올가를 원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녀의 곁에 남편으로서 떳떳하게 설 수 없는 자신이 초라했다.

그녀의 행복을 지켜 줄 자신이 없다는 사실이 혐오스러웠다.

로스카옌이 그런 죄를 저질렀음에도 마을 사람들은 그를 여전히 사제로 여기고 믿고 따랐는데.

그는 제 존재조차 모르는 아이 하나를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저버렸다.

아버지도 없이 태어나 자란, 자신을 닮은 검은 머리와 눈을 가진 어린아이.

한 번도 밝힌 적 없는, 그래서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지킬 수밖에 없었던 아이.

세상 모든 이들을 죽음의 늪으로 밀어 넣어 버리는 악마가 되어서라도 살리고자 했던, 그의 딸.

“원하는 게 너무 두려워서…… 죽음은 별로 두렵지 않아.”

그렇다.

떠나는 올가를 붙잡으려 해도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던 그때에 비한다면, 죽어 가는 이들의 비명을 외면하며 교회에 틀어박혀 기도를 하던 그때에 비한다면, 몸속으로 파고드는 저주가 살갗을 찢고 내장을 후벼 파는 고통은 별로 끔찍하지 않다.

페고라는 과연 자신의 대답에 만족할까.

로스카옌이 흐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다 눈을 감으려면 순간, 문에 기대 놓았던 벽장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카림! 혹시 아직 여기에 있니? 대답해!”

때마침 번쩍, 창밖으로 섬뜩한 빛이 내렸다. 귀에 들리는 소리가 나무문이 삐걱대며 열리는 소리인지, 하늘의 노성이 지상에 내리꽂히는 소리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로스카옌 신부님?”

조금만 더 일찍 눈을 감았더라면 마주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왜 답을 해 주겠다고 미적거렸을까.

로스카옌이 페고라에게 진심을 들려주기 위해 죽음을 잠시 뒤로 미룬 사이, 그가 가장 그리워하면서도 또한 가장 두려워하는 검은 머리의 여인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늪 속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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