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29. 복수의 칼날이 향하는 곳
땅과 하늘은 이어지지 않는다.
마을의 시간이 멈추어도 매일 아침이면 해가 뜨고 밤에는 날이 저물었던 것처럼, 15년 동안 마을의 시간이 멈춰 있었음에도 하늘의 구름은 한 곳에 머무르는 일이 없었고, 그 빛깔 또한 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진흙을 머금은 듯 검고 두꺼운 구름이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 하늘을 날고 있어도, 로스카옌은 하늘을 보며 불길함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마 이 마을의 살아남은 모두가 그러했을 것이다.
천둥이 울고 벼락이 내리고, 태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는 자연재해는 더 이상 그들에게 아무런 위협을 줄 수 없음을.
예상치 못한 일식이 일어나 한낮의 하늘이 깜깜해져도, 그들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저주에 잠식된 마을에서는 자연의 위대함도 경이로움도 어떤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그러나 저주에서 벗어난 지금은.
현실의 시간축에서 떨어져나와 멈춰 있던 바퀴를 억지로 굴려 굴레에 끼워 맞춘 지금은.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저주에 잠식당해야 했던 것처럼, 제 의사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현실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지금은.
제아무리 무거운 먹구름을 몰고 와도 결코 하늘이 무너질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는 것조차 두려웠다.
“하늘이 우는 소리가 너무 커. 속이 울렁거리는 거 보니까 오늘 밤도 못 자겠구나.”
“몸도 안 좋은데 나는 놓고 가지 그러나, 페고라.”
“몸이 안 좋으니까 데려가는 거지. 로스카옌, 네가 방패가 되어 줘야지 않겠니.”
진흙이 들러붙은 긴 백발이 아무렇게나 엉겨 붙어, 얼룩덜룩해진 옷자락 위에 어지러운 문양을 남겼다. 페고라에게 부축을 받는지 끌려가는지 알 수 없는 자세로 무겁게 발을 내딛는 로스카옌의 풍성한 수염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흐린 날은 싫더구나. 기분 나쁘고.”
“자네는 햇빛 아래서 돌아다닐 수 없으니, 맑은 날보다 흐린 날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날이 흐리면 비가 내리잖아. 젖기 시작하면 앞도 안 보이는걸.”
근육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건 오랫동안 누워 있던 탓이라 치더라도, 날 때부터 말썽이었던 시력은 아니나 다를까 저주에서 벗어나도 여전히 흐리멍덩하기만 하다. 이채가 감도는 선명한 눈빛으로도 모든 풍경이 그저 흐릿하게만 보이는 페고라와, 눈빛이 탁해지고 시야가 침침해졌음에도 여전히 길은 제대로 알아보는 로스카옌은 힘겹게 동쪽 첨탑을 향해 걸어갔다.
쿠르릉. 하늘이 우는 소리가 다시 한번 들리더니 퍽, 하고 땅이 패이는 소리가 들렸다.
“비가 오는군.”
“이런 젠장.”
“페고라. 왼쪽 나무 밑으로 붙어. 조금 돌아가더라도 덜 젖는 편이 나을 것 같구먼.”
“몸 사린다고 뭐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아서 말이지.”
페고라는 고개를 털어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고, 로스카옌의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가느다란 팔에 뼈마디가 두드러진 긴 손가락이 구겨진 검은 두루마기를 움켜쥐자, 안에서 뭔가 꿀럭거리더니 뜨끈한 피가 손등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로스카옌. 허리도 다친 거니?”
“그렇지는 않을 게야…….”
한층 가라앉은 음성으로 로스카옌이 느릿하게 대답했다. 검은 진흙 위로 남겨진 두 사람의 발자국 위로 핏방울이 떨어졌다. 보폭도 일정하지 않은 데다 번번이 질질 끄는 탓에 피가 번진 발자국은 사람의 것이라기보다는 병든 짐승의 것처럼 보였다.
페고라는 슬슬 시야를 가로막기 시작하는 빗줄기 사이로 우뚝 선 첨탑을 확인했다.
“교회가 작아졌구나.”
“첨탑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서쪽으로 옮겼으니 말이야.”
“실종된 녀석…… 아페티트라고 했지. 그 아이를 가두려고 옮겼다는 말은 들었는데.”
“남겨 두어서 좋을 것이 없지 않나.”
“죄악의 증거니까?”
로스카옌은 대답하지 않았다. 페고라도 더는 묻지 않았다.
끼익. 낡은 문이 열렸다.
잠겨 있지 않은 문을 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무겁게 삐걱대는 소리와는 달리 속이 썩어 비어버린 나무문은 가볍다기보다 허술했다. 외부인은 물론이고 밖에서 들이치는 비바람조차 막아주기 버거울 만큼.
페고라는 로스카옌을 비가 들이치지 않는 구석자리에 앉혀주고, 문을 닫은 뒤 반쯤 부서진 벽장을 끌어 와 기대 두었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은 다 철거한 모양이구나.”
“지하로 가는 계단만 남아 있다네.”
“하늘이 무서워서 지붕으로 가로막은 것도 모자라 땅속으로까지 파고드는 게 영락없는 도망자 꼴이네.”
“나는 도망치지 않았네만.”
“도망쳤지. 지금도 도망치는 중이고.”
빛이 바랜 스테인드 글라스에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페고라는 흐릿한 시야를 촉감으로 보완하려는 듯 손으로 벽을 짚으며 천천히 걸었다. 15년이나 보수하는 사람이 없었던 까닭에 벽화는 군데군데 뜯겨 나가 있었다.
“원래는 이쪽 문 너머에 통로가 있었지 않니? 올가가 고해성사를 하는 동안 여기서 기다던 기억이 나.”
“……있었지.”
“미사를 볼 때는 아이와 함께 그 옆에 서 있었던가? 나는 맑은 날에는 돌아다니기 힘들어서 거의 참석하지 않았지만.”
“미사를 보는 내내 그곳에 서 있었어. 아이와 함께.”
페고라가 작게 웃었다.
“그래도 미치지 않았던 걸 보면 넌 아버지보다는 신경줄이 굵었던 모양이야.”
“……아버지?”
로스카옌은 가물가물하던 눈을 떠 페고라를 올려다보았다.
밖은 먹구름으로 가득해 어둠이 내려앉고, 첨탑만을 남기고 전부 철거해 버린 동쪽 교회에는 남아 있는 전등조차 없다. 가끔 천둥이 치고 나면 부연 창 너머로 번쩍이는 빛이 들어와 페고라의 실루엣을 그려내고는 사그라들었다.
“내 아버지도 여기서 미사를 올리고는 했거든.”
마을이 저주에 물들기보다 더 전, 올가가 아이를 임신하기보다도 더 전.
로스카옌이 이 마을에 신부로 부임해오기 전부터, 이 마을은 부정한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올가가 나를 이끌고 교회에 왔을 때도 거기 서 있었는데. 구석인 자리가 사람에 가로막힐 일이 없어 단상이 더 잘 보인다면서.”
“…….”
“올가는 시력이 좋아서 몰랐던 모양이더구나. 나는 눈이 나빠서 그 정도로 멀리 떨어지면 사람 얼굴 같은 거 구분 못 하거든. 그래서 난 그토록 오랫동안 보아 놓고서도, 내 아버지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지 못해.”
“페고라. 자네…….”
“그런데 아버지 눈에는 내 모습이 아주 잘 보였던 모양이야.”
로스카옌이 이 마을에 방문하기 전부터, 교회에는 미사를 올리는 신부가 있었다.
나이를 먹어 치매가 와, 더는 예배를 볼 수 없게 되자 로스카옌은 자신이 남기로 하고 신부를 교구로 돌려보냈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신을 모시는 자가 똑같은 죄를 저지르다니, 은총이 아니라 저주를 받았다고 해도 무리가 아닌걸.”
페고라가 로스카옌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표정이 눈이 나빠서 그런 것인지, 불쾌한 기억을 떠올려서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창백한 손등 위에 갈색으로 말라붙은 피가 꼭 나무뿌리를 그린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 눈에는 내가 악마처럼 보였던 모양이야.”
“그분은…… 페고라 자네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시진 않았을 게야.”
“음. 나도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지. 내가 이런 모습만 아니었더라면 당당하게 죄를 밝혔을지도 모른다고. 하필이면 이런 모습으로 태어나 버려서 운명이 어그러진 거라고.”
알비노에 양성구유라니, 돌연변이도 이런 돌연변이가 없다. 페고라의 존재는 마치 신을 저버린 사제에게 내린 천벌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아이를 인정할 수도, 그렇다고 자신의 죄를 부정할 수도 없었던 인간은 미쳐버렸다. 현실에서 도망쳤다. 자신의 죄업이 닿지 않는 곳으로.
“그런데 너를 보니까 아닌 모양이야.”
“…….”
“아버지는 나를 부정하고 스스로 망가졌는데. 로스카옌 너는 네 대신 네 아이와 올가를 망가뜨렸어.”
“……올가가 바란 일이야.”
“아니, 네가 바란 일이지.”
페고라가 로스카옌의 앞으로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너는 올가에게 미움받는 게 두려워서, 올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침묵하는 삶을 선택했잖아?”
“그녀의 바람을 듣지 않고, 진실을 밝혀야 했다고 말하는 건가?”
“아니. 뭘 해야 했다고 이제 와서 지적하려는 게 아니야. 네가 비겁했다고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고.”
로스카옌이 페고라의 아버지와 비슷한 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페고라가 로스카옌에게 보복해도 된다는 정당성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페고라의 목적은 로스카옌을 비난하거나 괴롭히는 것이 아니었다.
“욕망에서 도망치면 불행해져. 남을 위해 살고자 하는 인간은 늘 비참해지지. 자기만 비참해지면 차라리 나은데, 꼭 남까지 비참하게 만들었구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페고라.”
“왜 원하는 대로 하지 않았어?”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니까, 자신이 저지른 일에는 책임을 져야 하니까 진실을 밝힌다.
올가가 원하지 않으니까, 그녀가 자유롭게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삶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
의무와 희생.
로스카옌의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뭘 원했어?”
페고라는 로스카옌의 주름진 이마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노인의 거칠고 질긴 피부는 손톱으로 가볍게 긋는 정도로는 자국조차 생기지 않는다.
“오딜이 올가를 위한다는 책임감만 내던졌더라도, 둘 다 행복해질 수 있었을 거야. 오딜은 오딜 대로 어린 동생을 챙긴답시고 여기저기 날을 세우고 다니지 않아도 되고, 동생을 윽박지르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괴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서 적당히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가정도 꾸렸겠지. 올가도 그럴 거고.”
“…….”
“자신의 욕망을 좇았으면 둘 다 행복해졌을 텐데, 그러지 않아서 둘 다 불행해지는 걸 너도 봐 왔잖아. 그래서 너는 그러지 않을 줄 알았어.”
“올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건가?”
“아니, 나는 그저 궁금할 뿐이야. 왜 너는 욕망대로 살지 않는지. 아버지는, 오딜은, 다른 죽어간 많은 이들은 왜 원하는 대로 살지 않고, 꼭 무언가를 책임지거나 희생하려 들다가 타인까지 불행의 늪으로 끌어들이려 하는지.”
초점이 맞지 않던 페고라의 눈이 정확히 로스카옌을 향했다.
“괴물을 만들고, 저주를 씌우고, 사람을 해치고 고통에 빠뜨리고. 그러면서도 그게 <원해서 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 분노를 대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알려 달라고 말이야.”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