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줄디즈, 왜 그러니? 악몽이라도 꿨어?”
“망가져…… 여기, 다 없어질 거야…….”
“괜찮아. 안 없어져. 오딜 아저씨가 대충 지어 놔서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이긴 하지만 날뛰지만 않으면 무너질 일도 없는걸.”
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흙을 발라 벽을 만들고, 세간살이도 별로 없는 집이라 무너진다고 한들 크게 다치지는 않을 것이다. 어린 제 동생들만 안전하게 보호하면 된다고 판단한 네나뷔스테는 줄디즈의 걱정을 흘려들었다.
그러나 카밀라는 눈에 띄게 떨리는 아이의 손을 보고 불현듯 아침에 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줄디즈 말이 맞아. 무너질지도 몰라.”
“카밀라. 괜히 불안하게 하지 마.”
“정말이야. 나도 아침에 우물이 무너지는 걸 봤단 말이야.”
“우물이?”
새벽에 사비나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고, 집에 돌아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혼자 있는 시간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것이 마을의 저주가 풀리고,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게 된 까닭이라는 것을 깨닫기는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분명 저주가 풀렸으니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혼자 집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무서웠다.
지나치게 고요한 집안이 마치 무덤처럼 느껴졌다고 할까. 이상한 징조도 없는데 괜히 꼭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 카밀라는 두려워져 교회로 뛰어가 에르잔을 찾아갔다. 사비나를 걱정해 찾아가려 하지만, 북쪽 숲을 통과하지 못해 난감해하는 에르잔에게 다른 통로를 알려 주려고 서쪽 우물가로 데려갔다.
그리고 우물이 무너져 내렸다.
에르잔이 힘으로 때려 부순 것도 아니고, 원래 금이 가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해 보였던 것도 아니다.
마치 모래성이 무너지듯이 우물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에르잔이 베어 낸 나무가 제집을 깔아뭉갤 때는 어떠했던가. 보통 그런 나무가 떨어지면 천장이 박살 나고 안은 엉망이 될지언정 벽체는 남아 있어야 하는데, 15년 동안 멀쩡히 살고 있던 제집과 카이라트의 집, 그리고 연구실까지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계속 시간이 멈춰 있었잖아. 그러다가 갑자기 돌아왔으니…….”
“사람 몸은 15년이면 다 썩고도 남지만, 집이 무너질 일은 없어.”
“하지만 눈으로 봤는걸? 부서질 만한 충격이 아닌데. 아니, 부서져도 형체는 남아야 하는데……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어.”
카밀라가 벽으로 다가가자, 네나뷔스테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자신도 집 안에 있는 이상 카밀라도 벽을 부술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힘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기도 했고.
그러나 손으로 더듬어 본 벽의 질감은 그녀가 익히 알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네나뷔스테. 이리 와서 벽 좀 만져 봐.”
“헛간에서 아이베크랑 자니베크가 자고 있어. 무너뜨릴 생각은 하지도 마.”
“부수라는 게 아니라, 만져 보라고.”
카밀라가 재촉하자 네나뷔스테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하면서도, 줄디즈를 한 팔로 고쳐 안고 벽으로 다가갔다. 화상 자국이 사라지지 않은 긴 팔이 벽으로 향하고, 카밀라보다 마디 하나씩은 더 커다란 손바닥이 벽 위를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
“……어?”
네나뷔스테가 이제까지 만져 왔던 흙벽이 아니었다. 축축하지만 단단한 벽을 이루는 거친 흙의 알갱이가 네나뷔스테의 손길을 따라 미세하게 움직였다.
낡아서 먼지나 흙 알갱이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알갱이들은 마치 자석에 끌려가는 철 가루처럼, 네나뷔스테의 손이 벽에서 떨어져도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라 그녀의 손바닥을 향해 달라붙어 왔다.
“이게 왜 이래?”
네나뷔스테는 얼른 손을 털어 버렸다. 알갱이가 달라붙는 힘이 털어 내는 힘보다는 약했는지, 그녀가 손을 털고 치마에 문지르자 흙 알갱이들은 파스스 떨어졌다.
“지금 벽이 움직이고 있는 거야?”
“움직이는 게 아니라, 고정할 힘을 잃어버린 거라고 했어.”
“누가 그래?”
“……에르잔이.”
단단히 결집되어 있어야 할 벽과 몸체가 응집력을 잃어버린다면 먼지처럼 흩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만약 누군가 이 오두막을 큰 힘으로 들이받는다면 원래의 형체조차 남지 않고 부서져 버릴 것이다.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아니, 오히려 사실이면 위험하지는 않은 거 아니야? 우리한테는 영향이 없다는 거니까.”
갈라진 기둥에 얻어맞거나 부러진 판자에 찔리기라도 한다면 다칠지도 모르지만,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버린다면 그냥 먼지만 흠뻑 뒤집어쓰는 꼴이 되는 게 아닌가. 코로 들이마시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한테도 영향이 있을지도 몰라.”
“먼지 좀 뒤집어쓴다고 우리 몸이 흙 인형처럼 부서지기라도 한다는 소리야?”
“글쎄…….”
카밀라가 줄디즈를 쳐다보자, 아이는 흠칫거리며 네나뷔스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부스스하게 뻗은 뒷머리와 가늘게 떨리는 어깨. 등을 토닥여 주는 언니의 손길에도 줄디즈의 목소리는 겁먹은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언니…… 우리 나가야 해…….”
“카밀라. 네가 괜히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줄디즈가 겁먹었잖아.”
카밀라에게 핀잔을 주려는데, 줄디즈가 네나뷔스테의 머리카락을 부여잡았다. 장난치거나 괴롭히려고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눈길을 끌기 위한 행동이었다.
“우리가 있던 곳이 첫 번째, 그다음은 여기야…….”
네나뷔스테가 네 명의 동생을 지키던 남쪽이 첫 번째.
바르셀다가 첨탑에 감금되어 있던 동쪽이 두 번째.
오딜의 거처인 이 허름한 오두막은, 동쪽 숲에 자리하고 있다.
“언니, 우리 빨리 나가야 해…….”
줄디즈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이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논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제 동생이 금방이라도 두려움에 기절할 것 같다고 판단한 네나뷔스테는 줄디즈를 얼른 카밀라에게 넘기고, 헛간 문을 열어 잠들어 있던 두 남동생을 깨웠다.
“아이베크, 자니베크! 일어나!”
“응, 으…… 누나…….”
“우우…… 아파…….”
“어서! 꾸물거리면 누나한테 혼난다!”
여전히 잠이 덜 깨 비틀거리는 두 동생을 옆구리에 하나씩 끼고 나오는 네나뷔스테를 보며 카밀라가 조금 기가 찬 한숨을 뱉었다. 체구가 작은 줄디즈도 몸을 떨면 카밀라의 어깨까지 같이 떨리는데, 네나뷔스테는 그보다 큰 두 남동생을 짐짝처럼 하나씩 둘러업고도 무겁지도 않은 듯 성큼성큼 문밖으로 걸어 나왔다.
“오딜 아저씨는 어쩌지?”
“어쩌긴. 끌어내야지. 카밀라. 네가 아이베크랑 자니베크 좀 봐 줘.”
오두막이 무너지더라도 휘말리지 않을 정도로 안전거리를 확보한 네나뷔스테는 카밀라에게 제 동생들을 맡겼다. 15년 전 그날 이후로 누구도 믿지 않는다고 공언한 네나뷔스테였으나 지금은 다른 수단이 없었다.
“오딜 아저씨! 얼른 일어나! 내가 막 끌고가다가 어디 잘못 건드려서 불구가 되어도 나는 책임 안 진다?”
기절한 건지 깨어 있는 건지도 불분명한 상태의 오딜을 질질 끌면서 네나뷔스테가 짜증을 냈다. 가뜩이나 무거운데, 의식이 없으니 끌어내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무너지는 집에 깔리거나 말거나, 그냥 내버려 두고 가고 싶지만 오딜은 네나뷔스테와 그녀의 동생들을 그동안 돌봐 준 은인이었다. 사람은 믿지 않아도 은원은 확실히 갚는 주의였던 네나뷔스테는 끙끙거리며 오딜을 집 밖으로 끌어냈다.
“네나뷔스테, 대단하다…… 너 혼자 아저씨도 끌고 나올 수 있구나?”
“어깨 빠질 것 같으니까 보기만 하지 말고 좀 도와 줘!”
카밀라가 얼른 달려가 네나뷔스테를 도우려 했지만 힘의 차이가 너무 명백하여 도움은 되지 않았다. 처음엔 질질 끌다가 나중에는 그냥 바닥에 굴려 가며 오딜을 세 동생들이 있는 곳까지 데려갔을 때, 멀리서 천둥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 * *
사비나 일행은 기절한 이들과 부상을 입은 카이라트를 우선 교회로 옮기기로 했다. 저주에서 벗어났다고는 하나 광장에 내내 쓰러져 있어서야 감기에 걸릴 것이다. 게다가 맑았던 하늘이 다시 꾸물거리기 시작하는 것이, 곧 비라도 올 듯하여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나자예프. 당신은 무리하지 마세요.”
“아니야. 손 하나가 아쉬운데 나라도 한 사람 몫을 해야지.”
나자예프는 여전히 절뚝거리면서도 사비나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히 웃어 보였다. 물론 태연히 웃을 만큼 상태가 괜찮은 것은 어디까지나 기절한 이들을 옮기는 걸 에르잔과 바르셀다에게 맡기고 있기 때문이었으나, 원래부터 양심이 없었던 나자예프에게는 동생을 비롯하여 다른 이들에게 제 할 일을 떠넘기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형은 한 사람 몫은커녕 손 하나도 제대로 안 쓰고 있는데?”
“바르셀다. 닥치지 않으면…… 아니, 좋은 말로 할 때 입 다물어라.”
저주받은 오른팔이야 움직이지 않는다 치더라도, 왼손은 사비나가 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거나, 그녀 대신 문고리를 잡아 문을 열거나, 시트를 가져와 덮어 주는 일밖에 하지 않는다. 사비나가 뿌리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녀의 어깨를 붙잡거나 손을 잡고 이끄는 일도 했을 테지만, 아무튼 기절한 마을 사람들을 교회로 피신시키는 일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나자예프를 향해 바르셀다가 눈을 치켜떴다.
“에르잔은 묵묵히 일 잘하잖아. 우리 마을 사람도 아닌데. 바르셀다, 넌 수양이 부족해.”
“나자예프. 거기서 비켜라.”
교회의 의자가 사람을 눕히기에는 폭이 좁은 까닭에, 에르잔은 의자째로 나자예프를 밀쳐 내서 공간을 확보했다.
“사비나 아가씨. 우선 광장에 쓰러져 있던 이들은 다 옮겼습니다.”
“카밀라는 오딜의 거처로 갔다고 했죠? 네나뷔스테와 그 동생들은 거기에 있을 거고…….”
페고라는 아직 북쪽 숲에 있을까. 상처를 입었다는 로스카옌 사제를 데려오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한 사비나의 눈에 나자예프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아페티트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페티트. 왜 그러고 있어요?”
“저한테까지 일 시킬 생각은 하지 마시죠. 당신 말이라면 뭐든지 듣는 충실한 개나, 어른이 시키면 일단 따르고 보는 바르셀다와는 달리 저는 이곳 생존자들에게 자비를 베풀 필요를 느끼지 못하거든요.”
“그게 아니라…….”
사비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카림은 어디 있어요?”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