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사람을 죽이는 데에 업보가 따른다면, 사람을 살리는 데에도 업보가 따르는 걸까.
주술에 반드시 반동이 뒤따르듯, 주술사가 내다보는 미래를 바꾸고자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어린 줄디즈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자신이 사랑한 모든 것들이 끔찍한 형태로 일그러져가는 미래를 막기 위해, 아이는 제 형제들을 살릴 수 있는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끌어왔다.
그래서 형제들을 모두 잃는 최악의 미래는 피할 수 있었지만, 그것 대신 찾아온 다른 미래가 멀쩡한 형태일 리 없다는 것을 깨닫기에 줄디즈는 너무 어렸다.
줄디즈가 언니와 오빠들을 잃지 않기 위해 다른 미래를 끌어들였기에, 동생인 알마즈는 가족에게서 사랑받는 어린 시절조차 보내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사람을 잡아먹고, 제 형제의 시체로 만든 저주를 집어삼키는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줄디즈는 자신을 향해 천천히 흐르던 검은 물길의 방향을 틀어 버렸다.
주술사는 저주를 피할 수 있어도, 없앨 수는 없다.
줄디즈 자신이 피한 저주받은 미래가 결국 새로운 제물을 찾아가, 또 다른 참혹한 미래를 만들어 내리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다른 선택을 했을까.
과연 다른 선택을 할 수는 있었을까.
줄디즈는 아이베크의 배 위에서 눈을 떴다. 비쩍 말랐는데 배만 툭 튀어나온 제 오라비가 숨을 쉴 때마다 살짝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신기해 관찰한다는 게 그만 베고 누워 잠들었던 모양이다.
부스스 일어나 고개를 돌리니, 구석에 웅크려 자는 자니베크의 모습이 보였다.
관 속에 틀어박혀 있는 내내 움직이지도 못하고 잠만 자야 했으니 자는 일에는 물릴 법도 한데, 두 오라비는 현실이 두렵지도 질리지도 않은지 잠만큼은 참 열심히도 잔다.
닫힌 헛간의 문틈에서 빛줄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네나뷔스테의 목소리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더해진다.
오딜은 아니다. 나자예프도 아니다.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누구일까. 줄디즈는 오빠들을 깨우지 않도록 자리를 벗어나, 엉금엉금 기어가 헛간 문에 바짝 달라붙어 귀를 기울였다.
“다른 사람을 죽인다니, 네나뷔스테! 너 사람 죽이는 얘기를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거 아니야?”
“그래? 카밀라 너는 누군가를 죽이고 살아남느니, 그냥 깔끔히 죽음을 택하는 쪽이구나. 의외네.”
“아니, 죽음을 택한다고는 안 했거든!”
빠르지만 날카롭지는 않은 고음에 강약이 확실한 목소리. 제 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카밀라, 카이라트의 동생이었다.
줄디즈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몸을 움츠리며 더러워진 치마를 부여잡았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는 나쁜 행동을 하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카밀라와 카이라트 남매의 이름을 듣는 것마저 마음이 괴로워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죽을 거야, 죽이고 살 거야? 제대로 대답해, 카밀라.”
“네나뷔스테, 너는 너무 극단적이야.”
“그런 일을 겪고도, 너는 아직 최악을 가정하는 데 익숙해지지 않은 모양이네.”
“난 너처럼 공격적이지 않거든?”
“너도 나만큼 고생을 해 봤으면 달라질걸?”
“얘가 정말……!”
카밀라는 기가 막혀서 혀를 찼다가, 네나뷔스테의 표정이 전혀 바뀌지 않는 것을 보고 조금 질린 표정을 지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카밀라보다 머리 하나가 높은 체격의 네나뷔스테는 팔도 길고 손도 컸다. 이유도 없이 카밀라를 해치지야 않겠지만, 그 <이유>가 카밀라의 예상 범주를 벗어나 있을 때는 반항도 못 하고 곧바로 비명횡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카밀라는 앉은 채로 엉덩이만 뒤로 밀어서 안전거리를 확보했다.
“경계하는 걸 보니까 죽고 싶지는 않은가 봐?”
“……나 대신 누군가 죽는다면, 그래서 덕분에 내가 살아남는다면…… 그 사람한테는 미안하고 고맙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직접 살인을 저지를 생각까지는 안 해.”
“살고는 싶고, 손에 피를 묻히기도 싫다? 욕심도 많네, 카밀라는.”
“그게 무슨 욕심이야! 보통 사람은 그렇게 살인을 태연하게 저지르지 않거든?”
“태연하게 저지르라고는 하지 않았는데.”
“아무튼 싫어. 난 죽기 싫지만, 살인은 생각해 본 적도 없어.”
카밀라는 네나뷔스테로부터 조금 더 멀어져, 문가에 기대앉았다. 여차하면 문을 열고 뛰쳐나가기 위해서였다. 물론 카밀라는 그리 반사신경이 재빠르지 않고, 키가 큰 네나뷔스테라면 금방 카밀라를 붙잡을 수 있을 테지만, 여기서 더 경계하는 티를 냈다간 정말로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나는 그냥 운이 좋았으면 좋겠어.”
“운 좋게 마침 누군가 희생해서, 대신 살아남는 일이 일어났으면 싶다는 거야?”
네나뷔스테의 지적에 카밀라는 시선을 돌렸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염치없는 바람이긴 하지만, 제가 죽거나 누군가를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누군가 알아서 희생해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희생한 이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안고 살아가길 바란다.
이기적이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다들 그렇지 않을까. 스스로 죄를 짓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15년 전에 그런 일을 겪고서도 그랬다.
얼굴이 일그러져서 더는 거울을 볼 수 없게 되어도, 다리가 아파서 짧은 거리도 한참을 걸려 걸어가야 해도, 그래도 카밀라는 자살 같은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로스카옌을 찾아가 제 삶의 기구함을 한탄했지만 죽어서 벗어나고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죽을 만큼 괴로워하면서도, 정작 죽는 것은 두려워했다.
“다들 그렇지 않아? 그게 평범한 사람이잖아.”
“평범한 게 아니라 무책임한 거지. 그리고 멍청한 거고.”
“네나뷔스테. 너 말이 좀 심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누가 대신 희생해 주길 바라는 너한테 내가 무슨 소리를 하길 바라는데?”
“그래서 내가 너한테 희생해 달라고 했어? 나는 그냥 네 질문에 대답한 것뿐이야!”
카밀라가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하자, 내내 날카롭던 네나뷔스테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졌다. 웃지는 않았지만, 무서운 얼굴은 아니었다. 카밀라는 얼른 눈을 굴려 네나뷔스테의 손을 확인했다. 그녀의 손에는 아무런 무기도 들려 있지 않고, 곧 일어나 카밀라를 덮칠 듯한 자세도 아니었다.
네나뷔스테는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비로소 제가 안전한 상황임을 자각한 카밀라는 어깨에 힘을 빼고 웅크렸던 몸을 바로 했다. 팔이 뻐근했지만 네나뷔스테 앞에서 긴장하고 있었음을 티 내고 싶지 않아 고민하던 중, 헛간 문의 틈 사이에 부스스한 백금발이 삐져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줄디즈 깬 모양인데?”
“뭐?”
네나뷔스테가 얼른 뒤로 돌아 헛간 문을 열자, 내내 웅크린 채 엿듣고 있던 줄디즈가 히익, 하며 뒤로 넘어갔다. 그저 앉아 있던 자세에서 뒤로 발라당 드러누웠을 뿐이지만 잔걱정이 많은 네나뷔스테는 혹시라도 제 동생이 어디 다치지는 않았나 얼른 안아 들고 상태를 살폈다.
“줄디즈, 괜찮니? 안 다쳤어?”
“으, 응…….”
“자다 깬 모양인데 다치긴 뭘 다쳤겠어? 우리가 얘기하는 소리에 깬 모양이네.”
“카밀라 네가 너무 시끄러워서 그래. 쓸데없이 말도 많고.”
“네가 말이 많을 만한 질문을 한 게 먼저잖아!”
“줄디즈. 조금 더 잘래? 언니는 카밀라랑 나가 있을게.”
카밀라를 무시하며 네나뷔스테가 다정하게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자, 줄디즈는 고개를 가로젓고 네나뷔스테의 치마폭에 폭 안겼다.
“가지 마, 언니…….”
“멀리 안 가. 주위에 있을 거야. 너는 좀 더 자렴. 깨어 있으면 배가 고플 테니까.”
“언니, 가지 마…….”
오딜도 저런 상태고, 로스카옌을 찾아가 식량을 얻어올 생각도 없으니 동생들은 재우는 게 답인데, 아무래도 줄디즈는 다시 잠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쩌지……? 먹일 것도 없는데.”
“애들 데리고 교회로 갈래? 빵이 좀 남아 있을 거야.”
“거기는 싫어.”
“교회가 제일 안전해. 침대도 여기보다는 편하고. 그리고 지금 로스카옌 신부님 안 계시거든.”
로스카옌이 부재중이라는 말에 솔깃한 듯 네나뷔스테가 줄디즈를 고쳐 안았다.
그녀는 열린 문 너머로 잠든 두 남동생을 보고는 다시 조용히 문을 닫았다.
“아이베크랑 자니베크까지 깨워서 이동하면 들킬 거야. 그렇다고 동생들을 두고 자리를 비울 수는 없어.”
“나 혼자 다녀오라는 말은 하지 마. 난 교회로 돌아가면 다시 안 나올 거니까.”
“요즘 나자예프랑 붙어 다니더니 겁이 옮았나 봐?”
“네나뷔스테. 해도 될 말이 있고 안될 말이 있는 거야. 함부로 선 넘지 마.”
나자예프와 비교된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불쾌하다는 듯 카밀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기분이 상하지만 네나뷔스테를 상대로는 말싸움 외에 다른 걸 할 수도 없는지라 인상만 쓰고 있는데, 문득 네나뷔스테에게 안겨 있던 줄디즈와 눈이 마주쳤다.
“카밀라……언니, 무서워…….”
“미안. 하지만 내 인상이 더러운 건 네 언니 때문이라는 건 알아 둬.”
“언니도, 무서워…….”
“뭐?”
어깨를 바르르 떨며 네나뷔스테의 품으로 파고드는 줄디즈는 여전히 뭔가를 두려워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관에 가둬 두었을 때부터 내내 들어온 말이라 네나뷔스테는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트라우마 비슷한 것이리라. 적당히 달래서 재우려고 등을 토닥이는데, 줄디즈가 몸을 뒤척이더니 카밀라를 향해 팔을 뻗었다.
“우리 여기서 나가야 해. 안 그러면 다 죽어.”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