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카밀라도 없는데 솔직하게 말씀하시죠. 나한테 연구 자료를 건네준 건 당신이지 않습니까.”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카이라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부상 때문에 휘청거리다가 다시 주저앉았지만, 그는 눈을 부릅뜬 채로 아페티트에게 소리쳤다.
“그건 내 보물이야! 너 따위한테 보이려고 만든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럼 아이를 시켜 저한테 보내지 말았어야지요.”
“아이라니? 무슨 아이! 그때, 내 아이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어라? 그럼 심부름을 온 그 아이는 누구죠?”
아페티트가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까딱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듣고 있던 이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부상 때문에 정신이 몽롱한 상황에서도 말투만은 예의를 잃지 않던 카이라트가 흥분해서 소리 치는 모습을 처음 본 것도 놀랍지만,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더 가관이었다.
“아페티트. 카이라트가 당신에게 연구 자료를 건네줬다고요?”
“전 그게 연구 자료인지도 몰랐습니다. 알렉세이에게 가져다주라기에 대충 짐작은 했지만 말이죠.”
“그 연구 자료를 가져온 게 어떤 아이였나요?”
사비나의 질문에 아페티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과거를 떠올리는 모양이었지만, 아페티트는 애당초 기억력이 그리 좋지 않았다. 게다가 마을 사람과 거리를 두던 까닭에 나자예프처럼 튀는 존재를 제외하면 이름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나마 알렉세이나 카이라트는 연령대가 비슷한 까닭에 오며 가며 자주 마주쳐서 이름과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얼굴 한번 본 어린아이가 누군지는 알지 못했다.
알렉세이와는 다른 이유였지만, 그만큼 아페티트는 마을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굉장히 작은 아이였습니다. 제 무릎께에 간신히 올까 말까…….”
“아이의 인상착의는 기억나는 게 없나요? 성별은?”
“여자아이였죠. 한 서너 살쯤 되었을 겁니다.”
19년 전, 카이라트의 연구 자료를 훔쳐 내 아페티트에게 건네준 어린아이.
원래도 글을 아는 사람이 적은 마을이지만, 네다섯 살이면 더욱 주술이나 연구서에 대해서는 모를 나이다.
“말을 더듬더듬 할 정도로 어린아이라 당연히 카이라트가 보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페티트. 그 아이가 당신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나요?”
“…….”
아페티트는 입술을 비뚜름하게 올렸다.
기억이 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린아이의 말을 따라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치고는 상당히 어색한 표정으로 큼, 목을 가다듬고는 아페티트가 혀 짧은 목소리를 내었다. 굳이 목소리까지 따라 할 필요는 없다고 모두가 생각했으나 말의 내용이 더 중요했던 까닭에 그 부분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이거. 아페티트 아저씨가 알렉세이 아저씨한테 가져다주세요.>
새벽이 밝아오던 시간. 창백하게 보일 만큼 밝은 백금발의 소녀가 양손으로 들기에도 버거워 보이는 종이 뭉치를 아페티트에게 건넸다. 어린아이가 혼자서 이른 아침에 자신을 찾아올 리는 없으므로, 아페티트는 당연히 어른이 심부름을 보냈으리라 생각했다.
종이 뭉치에 적힌 깨알 같은 글자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이 마을에서 서책을 만들 정도로 글을 잘 아는 사람의 수는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누구의 것인지를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건 카이라트가 만든 건가?>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페티트는 왜 자신에게 이런 것을 건네주는지 물었지만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알렉세이에게 건네주라는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하고 도망치듯 뛰어가는 어린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린아이니까, 그냥 전달해 주라는 심부름을 받고 왔다면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판단했기에.
“아페티트. 그 아이는 누가 보낸 거예요?”
“그걸 제가 어찌 압니까? 전 당연히 카이라트가 보냈다고 생각했지요.”
“그때 카이라트의 아이는 태어나지도 않았다면서요.”
“병사들이 쳐들어오기 전이니 애들도 많았지요. 어느 집 아이였는지는 관심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어린아이가 혼자서 당신을 찾아왔을 리는 없잖아요!”
아페티트를 추궁하려던 사비나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날카로운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19년 전, 말을 더듬더듬 할 정도로 어린 백금발의 여자아이.
이 마을의 시간은 15년 전에 멈추었으므로, 아페티트에게 서책을 건네줄 당시 서너 살이었다면 참극이 일어날 당시 아이의 나이는 일고여덟 살이 된다.
<그 오빠가 있을 때 떠나지 않으면, 언니도 멈춰 버려요.>
그날 아침 줄디즈에게 들었던 말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린아이의 말이니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사비나는 줄디즈가 주술사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설마 줄디즈가 미래를 내다보고, 카이라트의 연구 자료를 훔쳐 아버지한테 보냈다는 거야? 어째서?’
주술사는 미래를 예견하는 자.
줄디즈가 만약 미래를 내다보았다면, 카이라트의 연구자료를 알렉세이에게 건넸을 때 마을에 어떤 비극이 일어날지도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연구자료가 알렉세이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해야 할 텐데, 어째서 그것을 건네주었을까.
<언니랑 오빠들이랑 함께 있고 싶어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비나에게 건네던 아이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사비나의 표정이 창백해져 가는 것을 본 에르잔이 물었다.
“사비나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아니, 괜찮지 않아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럴 이유가 없는데.”
“무엇이 말입니까?”
“아페티트. 카이라트. 줄디즈가 주술사라는 걸 당신들은 알고 있었어요?”
“줄디즈?”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와, 두 남자의 표정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28. 행동하는 자가 미래를 바꾼다
아이가 꾼 꿈은 차라리 잊어버리고 싶을 만큼 참혹했다.
제 몸속으로 꾸역꾸역 기어들어 오는 검은 진흙과도 같은 저주. 비명을 질러도 목구멍이 틀어막혀 소리를 지를 수 없고, 완전히 늪에 잠겨 버린 몸은 움직이는 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다.
속에 있는 것을 토해 내면, 더 역겨운 것이 밀려 들어온다. 마치 제 배 속을 집어삼키려는 듯 파고드는 저주에 잠식되어 가는 아이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어떠니, 줄디즈. 이제는 이 아저씨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겠니?>
줄디즈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알렉세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알렉세이는 그 표정이 가상하다는 듯이 미소 지을 뿐이었다.
<역시 피가 섞이지 않은 타인은 거부하는 모양이로구나. 네 언니와 오빠들을 데려오면 만족할까?>
줄디즈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주에 온몸이 사로잡힌 탓에 고개를 저었는지도 명확하지 않지만, 경악에 물든 눈동자를 알렉세이가 알아보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그래. 너희 남매는 참 사이가 좋았지. 같은 부모를 두었기 때문이려나.>
알렉세이는 나긋하게 중얼거리고는 검은 시트를 걷어 냈다. 그 안에는 사지가 묶인 채 입을 재갈로 틀어막힌 제 형제들이 있었다.
네나뷔스테. 아이베크. 자니베크.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동생인 알마즈를 제외한, 줄디즈의 세상을 구성하던 가장 소중한 형제들.
알렉세이의 손짓 한 번에 그녀의 세상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사지가 뜯기고 갈라진 배 사이로 내장이 흘러나오는 참혹한 형제의 시체를 마주하고도 줄디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검은 저주에 붉은 피가 섞이기 시작했다. 줄디즈의 눈에서 흐르던 눈물에도 붉은 피가 섞이기 시작했다.
제 형제를 죽여 만들어진 원한을 차마 삼킬 수 없었던 줄디즈의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그리고 꿈이 끝났다.
“아아악!”
비명과 함께 깨어났을 때, 줄디즈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이는 눈도 비비지 않고 얼른 침대에서 내려와 무거운 방문을 끙끙거리며 당겨 열었다. 뒤늦게 소리를 듣고 깨어났는지, 그녀의 어머니가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나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줄디즈. 왜 그러니. 악몽이라도 꿨어?”
악몽?
그런 것이 아니다.
줄디즈는 금방이라도 비명을 지르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바들바들 떨며 주저앉은 줄디즈에게 다가온 어머니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직 아침 해가 뜨려면 멀었는데…… 엄마랑 같이 잘까?”
줄디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제 형제를 찾았다. 네나뷔스테는 다른 방에서 자고 있고, 아이베크와 자니베크는 어머니의 옆에서 곤히 잠든지라 줄디즈의 비명도 듣지 못한 듯했다.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두 오라비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시체처럼 보여, 줄디즈는 몸을 파르르 떨며 어머니의 품을 벗어났다.
“줄디즈. 왜 그러니?”
“어, 엄마…… 언니…….”
“네나뷔스테는 저쪽 방에서 자고 있단다. 언니 옆에서 자려고?”
어머니의 물음에 줄디즈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가로젓지도 못하고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이가 악몽을 꾸고 일어나 어머니나 언니를 찾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그녀의 어머니는 아직 부스스한 줄디즈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아이를 방 밖으로 내보냈다.
그만 방으로 들어가 자라는 뜻이다.
어깨에 얹혀 있던 따스한 손이 떨어지고, 방문이 닫히자 줄디즈의 몸이 다시 떨려 왔다.
‘언니, 언니가…… 오빠들도…….’
꿈속에서 본 가족들의 참혹한 시체가 눈에 보일 듯 선명하게 떠올라, 줄디즈는 진저리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새벽조차 찾아오지 않은 적막한 시간. 어두운 광장 너머에 세 채의 집이 보였다.
눈으로 보기에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지만, 어린아이의 발걸음으로는 한참이 걸릴 듯한 거리였다.
“언니, 오빠……. 죽으면 안 돼…….”
자그마한 손이 파르르 떨리다가, 주먹을 꼭 쥐었다. 아이는 끙끙거리며 울타리를 넘어가서는, 맨발로 뛰기 시작했다.
제 형제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