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윽…….”
“카이라트, 움직이지는 마세요. 상처가 더 악회되지 않도록 저주로 붙잡아 놓은 것뿐이지 치료한 건 아니니까.”
“왜, 나를…….”
“나한테 묻지 마세요. 내가 아니라 당신 욕망이 움직인 거니까.”
사비나에게 저주를 컨트롤하는 능력은 없다. 그녀는 그저 욕망의 저주를 흘려보냈을 뿐, 그것이 어떻게 작용할지는 저주받은 사람의 욕망에 달려 있다.
다른 마을 사람들은 <휴식>을 바랐다. 그래서 시름을 잊고 편히 잠들 수 있었다.
카이라트가 바란 것은 <생존>이었다. 그래서 부상의 진행 정도가 멈추었을 뿐이다.
“살아남는 것보다…… 다른 것을 더 우선했다면 깨어나지 못했겠군요.”
사비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지, 카이라트의 시선이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조각조각으로 갈라진 은빛의 욕망은 마치 깨진 거울처럼 바닥에 깔려 있음에도 조금도 날카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카이라트는 잘 움직이지 않는 어깨를 움직여 상체만을 일으켰다. 평소라면 카밀라든, 다른 사람이든 그를 부축했겠지만, 이번에는 누구도 카이라트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카이라트가 끌고 왔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욕망의 샘을 마시고 잠들었다. 남은 것은 그가 궁지로 몰아넣었던 사비나 일행뿐. 그가 몰아세웠던 인질에게 목숨을 구원받다니. 카이라트가 쓰게 웃었다.
“그래서 이제 카밀라를 불러와, 나를 처단할지를 물어볼 겁니까?”
“아뇨. 대책을 세워야죠.”
“대책?”
“아버…… 아니, 당신들이 두려워하는 사람이 오기 전까지 이 마을 사람들이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을 세워야죠.”
바르셀다 앞인지라 사비나는 알렉세이를 <아버지>라고 칭하지는 않았다. 카이라트도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사비나가 일부러 언급을 피하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예. 알렉세이 말이지요? 당신을 이곳에 보낸.”
“……그래요.”
“우리를 도울 셈입니까?”
“난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않을 거거든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해요.”
죽지 않는 사비나와 외부인인 에르잔은 제외하더라도, 이 마을의 모든 이들은 아버지가 이 땅에 발을 들이는 순간 목숨을 잃을 것이다. 아무리 예지능력은 없어도 그 정도는 유추할 수 있었다.
“사비나 당신이 네 개의 핵을 흡수하고, 아페티트를 평범한 인간으로 되돌린 시점에서 이미 이 마을의 존재 가치는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남을 수단도 사라져 버렸지요. 헛수고를 했네요, 사비나.”
“카이라트!”
꼭 사비나를 원망하는 투의 말씨에 에르잔이 호통을 쳤으나 카이라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도리어 내내 사비나를 경계하던 바르셀다 쪽에서 당황하여 말을 수습하려 했다.
“아니, 그게…… 그쪽이 우리를 구해 줬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건 아니에요. 나도 덕분에 고통에서 벗어났으니까.”
“그렇지? 바르셀다. 사비나는 우리의 은인이야. 그러니 마땅히 사랑…… 아니, 감사해야지.”
“그 말을 형이 나한테 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
머뭇거리며 말을 고르던 바르셀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나자예프로부터 멀어졌다.
“당신에게 떠나 달라고 한 건, 알렉세이 형이 다시 우리 마을로 찾아올까 봐 두려워서였어요.”
“반대지요, 바르셀다. 사비나가 떠나면 알렉세이는 이 마을의 존재를 없애 버릴 겁니다.”
바르셀다의 말을 반박하며 카이라트가 땅을 짚고 일어섰다. 부축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인지, 카이라트는 위태롭게 흔들리면서도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사비나는 알렉세이의…… 알렉세이가 보낸 주술사지요. 그러니 그녀가 이곳에 있으면, 우리는 그녀의 존재를 빌미로 협상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비나가 이 마을을 떠나면, 우리를 지켜 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카이라트. 이 사람한테 우리를 지켜 달라고 할 셈이에요?”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이젠 시간을 멈추는 저주도 사라져서, 부상을 입으면 죽을 텐데 말이죠.”
카이라트의 대답에 바르셀다는 얼이 빠졌다.
알렉세이가 보낸 사람이라며 사비나를 경계한 것은 바르셀다 하나뿐이 아니었다. 하지만 바르셀다는 사비나를 경계하면서도 그녀에게 도움을 구할 만큼 뻔뻔하지는 않았다.
사비나를 마을의 구원자로 여기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녀가 저주를 흡수하여 시간을 다시 흐르게 만든 것은 사실이니까.
사비나를 경계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이 마을을 저주에 물들인 알렉세이가 보낸 주술사니까.
하지만 사비나를 경계하면서, 원망하면서, 그러면서도 알렉세이로부터 지켜 달라니?
바르셀다는 카이라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기, 내가 저주받고 있던 사이에 다들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다들 나자예프 형처럼 염치도 양심도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거야?”
“바르셀다, 굳이 나를 비교군으로 들어야 할까?”
“형이 옮긴 거 아니야?”
“옮기긴 뭘 옮겨! 내가 병균이야?”
“병균보다 해로운 건 사실이잖아.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서도…….”
“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바르셀다!”
나자예프의 추궁을 피하며 바르셀다가 다가오자, 사비나는 에르잔에게 물러나라는 듯 손짓했다.
“우리 마을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그러니까 당신들은 그만…….”
“지금은 돌아갈 수 없어요, 바르셀다.”
“왜요?”
“저주를 흡수한 이상, 이건 내가 해결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왜 그렇게까지……!”
“나자예프가 말했잖아요. 그 말대로예요.”
“예에?”
이곳은 사비나의 고향. 그들은 사비나의 이웃이며 먼 친척들이다.
그러니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
비록 바르셀다에게는 밝힐 수 없지만.
“카이라트. 나는 당신만큼 주술에 대해 해박하지 못해요. 그러니 당신이 알려 줘요.”
“뭘 말입니까?”
“네 개의 핵을 한곳에 모으면, 어떤 주술이 완성되는지.”
분노. 욕망. 증오. 체념.
네 개의 핵을 따로 나누어 놓으면 시간이 멈춘다. 여기까지는 아버지가 이 마을에 내린 저주를 경험한 것으로 확인이 가능했다.
하지만 네 개의 핵을 한 몸에 흡수한 지금, 사비나의 몸에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카이라트는 분명 네 개의 핵을 결집하면 불로불사, 혹은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주술이 만들어질 거라 말했는데, 사비나가 느끼기에 욕망의 저주를 하나 더 쓸 수 있게 된 것 외에는 자신에게 별다른 능력이 생긴 것 같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연구자료는 도둑맞았다고.”
“당신이 한 연구잖아요. 기억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사비나의 질문에 카이라트의 시선이 아페티트에게로 향했다.
아페티트. 사비나 이전에 만들어진, 최초의 저주의 화신. 알렉세이에게 버림받은 실패작.
그러나 그라는 실험체가 있었기 때문에, 알렉세이는 사비나를 죽음의 화신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아페티트가 실토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갑자기 저를 물로 늘어지시는지?”
“제 연구자료 말입니다. 무슨 수로 빼돌린 겁니까?”
카이라트가 연구하던 불로불사의 주술. 연구실의 수많은 서책들 가운데 그가 마지막으로 모으고 모은 정보만은 집약해서 만들어 놓은 최종 결과물.
연구 자료를 훔쳐 간 범인이 글을 모르는 아페티트라면, 무엇이 가장 핵심적인 자료인지 알 리가 없다. 차라리 연구실의 서책을 모두 가져간 뒤, 알렉세이에게 읽고 판별하게 한다면 모를까.
범인이 알렉세이라면, 시간적인 순서가 맞지 않는다. 20년도 더 전에 마을을 떠난 그가 어떻게 하룻밤 만에 카이라트의 연구실에 숨어들어와 연구 자료를 빼돌렸단 말인가.
연구 자료가 없어진 건 사실이지만, 그것을 가져갈 만한 사람은 이 마을에 없다.
그 사실 때문에 카이라트는 제가 연구한 주술로 15년 동안 정지된 시간 속을 살아가면서도, 범인을 유추해 내지 못했다.
“알렉세이가 직접 가져갔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그에게 어떻게 하룻밤 만에 다시 마을로 돌아와 연구실에 잠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알렉세이는 직접 도둑질을 할 남자는 아니니까.”
“그건 맞는 말이야. 형이라면 절대로 자기 손으로는 그런 짓 안 하지.”
나자예프가 뒤에서 맞장구를 쳤으나 카이라트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아페티트. 어떻게 훔쳐 간 겁니까?”
“왜 제가 훔쳐 갔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군요.”
“소거법으로 범인이 아닌 자를 제외해 나가면 가장 마지막에 남는 것이 당신이니까요.”
카이라트는 연구실을 비우는 일이 거의 없었다. 끼니를 거르기는 일쑤고, 잠도 연구실에서 잘 때가 많았으니까. 오죽하면 신혼인 그의 아내가 그보다 카밀라와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 더 많았을까.
연구 자료가 없어진 날이 정확히 며칠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었던 자료이니만큼 어느 사이에 없어졌는지는 기억하고 있다.
연구실에서 쪽잠을 자다가 피로해져 제대로 침대에서 자기 위해 집으로 돌아간 그날 밤까지만 하더라도, 카이라트의 연구 자료는 분명 책장 한가운데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 연구 자료가 사라졌음을 알아차린 것이 다음 날 아침이었다.
한밤중, 그것도 겨우 몇 시간밖에 되지 않는 사이에 연구실에 들어와, 정확히 최종 연구 자료만을 가져간다. 글을 알아도 주술에 능통하지 않으면 바로 골라내는 것이 불가능하고, 주술에 능통해도 글을 모르면 무엇이 중요한 자료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최종 결과물, 단 한 권만을 가져갈 수 있었을까.
카이라트가 노려보는 것을 빙긋 웃는 얼굴로 받아 흘린 아페티트가 팔짱을 꼈다.
“부당한 오해를 받은 적이 많기도 하고, 딱히 변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말하지 않았는데, 카이라트. 저는 당신 연구실에 발을 들여본 적도 없습니다.”
“그럼 글을 아는 누군가를 시켜서 빼돌린 겁니까?”
“그 시기라면 저는 아직 사람을 조종하는 욕망의 저주를 얻지도 못했을 때인데요.”
“그렇다면 대체 무슨 수로…….”
아페티트의 시선이 사비나와 에르잔을 향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담긴 의구심을 알아차린 아페티트는 조금 속이 뒤틀렸다. 욕망의 저주를 모두 넘겨주었음에도, 사비나는 여전히 아페티트를 의심한다.
이제는 아무 힘도 없는데, 아페티트를 경계한다.
저주를 품고 있었을 때는 그 시선이 오싹한 즐거움으로 다가왔을 텐데, 힘없는 인간이 된 지금은 어쩐지 불쾌하게 느껴졌다.
“책임지기 싫어서 연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최후의 발악입니까? 보기 흉하네요, 카이라트.”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카밀라도 없는데 솔직하게 말씀하시죠. 나한테 연구자료를 건네준 건 당신이지 않습니까.”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