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27. 은빛의 샘, 금빛의 불
사비나는 복수를 꿈꾸지 않았다.
자신에게 잔혹한 명령을 내리는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제 처지를 비관하면서도, 차라리 죽기를 소망할지언정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복수를 원하지 않은 것은 아버지에게 <죽음의 저주>가 통하지 않아서는 아니다.
물론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도 아니다.
아버지가 증오스럽지 않아서는 더더욱 아니다.
사비나는 살인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저로인해 누군가가 고통받고 죽어 가는 것이 싫었다.
만약 사비나가 아버지를 어떻게 해서든 죽이고자 했다면, 그래서 성공했다면, 그녀는 더 이상 살인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최소한 억지로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고통에서는 해방되었을 것이다.
우습게도, 그 한 번의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사비나는 셀 수조차 없는 학살을 저질러야 했다.
한 사람의 목숨과 수많은 사람의 목숨.
타인의 생명을 빼앗아 권력을 쥐고자 하는 아버지와, 그렇지 않은 수많은 무고한 자들의 목숨.
그 어떤 저울에 매달아 무게를 재어 보아도 추는 오른쪽으로 기울 것이다.
그런데도 사비나에게는 <자의로 저지른 한 번의 살인>이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이루어진 학살>보다 더 두렵게 느껴졌다.
“불사의 몸이면서, 나는 뭘 그렇게 두려워했던 걸까요?”
사비나에게 조금만 더 용기가 있었더라면, 결단을 내릴 각오가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녀의 인생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사비나 아가씨. 그렇지 않습니다.”
“겁쟁이에, 나약하고, 용기도 없고. 그래서 이제까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죠.”
“자책하지 마십시오. 그건 아가씨의 탓이 아닙니다.”
“자책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알 수 있었으니까요.”
겁이 많고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강제로 수많은 학살을 저지르게 될지언정 스스로 살인을 저지르는 일만은 피하고 싶어 할 만큼 어리석었기 때문에.
사비나는 <마을 북쪽의 생존자>들을 이해할 수 있다.
“복수를 원했던 사람들은 벌써 땅으로 돌아갔을 거예요. 여기에 남은 사람들은, 복수보다 다른 것을 더욱 강하게 열망했던 이들뿐이죠.”
마을을 이렇게 만든 주모자가 누군지 찾아내기보다.
자신들을 이렇게 만든 원흉을 찾아 복수하기보다.
저주로 인해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며 괴로워하면서도, 그래도 살아 있고 싶다고.
이 끔찍한 저주에서 벗어나, 평온한 일상을 되찾고 싶다고 열망했을 것이다.
그래서 체념한 이들은 저주에 물들어 괴로워하면서도 죽지 않았다. 죽은 듯이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마을의 시간이 멈추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는 믿음을 놓지 않기라도 한 듯이.
“진실한 욕망을 감추지 마세요.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부터 달아나면,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절대로 알 수 없으니까.”
사비나의 말이 마치 주문이라도 된 양, 길게 흐르던 은빛의 물길이 넓게 퍼지며 마을 사람들의 발밑에 둥근 원형의 웅덩이를 이루었다.
녹이 슬고 여기저기 떨어진 무기를 쥔 투박한 손, 오랫동안 누워 있던 탓에 눌린 부분이 빨갛게 물들어 아직 제 색을 되찾지 못한 뺨과 이마, 무료할 때마다 바닥을 긁어 댄 탓에 끝이 갈라진 손톱…… 욕망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본 순간 그들은 깨달았다.
지금 그들은 복수를 위해 칼날을 가는 자의 얼굴이 아니라, 한계까지 피폐해져 휴식이 필요한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을.
‘제발 이제 그만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괴로워. 하지만 죽고 싶지 않아. 살고 싶어.’
‘예전처럼 평온한 일상을 되찾고 싶어.’
굶주린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의 식량을 빼앗은 자의 처단이 아니라 그가 먹을 새로운 음식이고, 벼랑에 서 있는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몬 자의 처단이 아니라 구원의 밧줄이다.
“먼저 자신의 욕망이 있고, 근본적인 욕망이 충족된 후에 사람은 그다음을 원하죠.”
주린 배를 채우고 나서야 자신의 식량을 빼앗은 자가 누구인지 알고자 하고, 구원의 밧줄을 붙잡고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뒤에야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은 자가 누군지 알고자 한다.
궁지에 몰린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
그것은 복수가 아니라 구원임을 사비나는 모르지 않았다.
그녀가 바로 에르잔의 존재에 의해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산 증인이니까.
“더는 싫어…….”
은색의 샘을 바라보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이어서 연장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툭. 철컹. 쨍그랑. 갈퀴며 낫이며 용도를 알 수 없게 부러진 녹슨 기구들이 그녀들의 손을 떠나 땅으로 떨어졌다.
“알렉세이가 미워.”
“녀석을 붙잡아 사지를 뜯어 버리고 싶을 만큼 증오해.”
“그런데…….”
“이제까지 15년의 세월을 허비했는데, 녀석에게 복수하느라 내 남은 인생까지 걸고 싶지는 않아.”
저마다 한마디씩 토해 내는 음성이 실로 꿴 조각보처럼 이어졌다.
사비나는 타인과 진지하게 마음을 나누고 교류했던 경험이 없지만, 지치고 피폐해진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구나, 사비나.>
가장 증오스러운 아버지가 그녀에게 알려 주었던 명쾌한 해답.
“당신들이 직접 손을 더럽힐 이유는 없어요. 목숨을 걸어야 할 이유는 더욱 없죠.”
그녀들의 발밑에 고여 있던 은빛의 샘 표면에, 마치 거울이 깨진 것처럼 금이 갔다.
“저주의 반동은 반드시, 술자에게 되돌아갈 테니까.”
사람을 괴롭히고,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저주의 주술.
만약 그 저주의 주술이 피해자를 늪으로 끌어들인 채 끝난다면 그만큼 불합리한 일이 있을까.
저주의 주술에는 반드시 반동이 있고, 제물이 사라진 이상 그것은 반드시 술자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네 개의 핵을 품고 있는 사비나의 머릿속에, 금줄 목걸이가 내는 음울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에르잔. 내가 내린 저주를 정화해 줘요.”
“예?”
“할 수 있어요. 당신이니까.”
사비나가 에르잔을 향해 손을 내밀자, 그가 조금 주저하다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저주를 정화한다고 하면 늘 대상을 불태우는 것밖에 하지 못했던 에르잔은 혹여 사비나의 몸에 불이 붙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사비나의 몸이 불타지 않는 것이 과연 에르잔이 정화의 능력을 자제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멋대로 날뛰지 않고 쉬고 있을 뿐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
“사비나 아가씨,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우선은 손을 놓으시는 게…….”
“에르잔. 나를 좋아하죠?”
“아가씨…….”
“내 곁에서 떠나지 않을 거죠?”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 창백한 피부. 그 입술에서 사람의 음성이 흘러나왔다는 것이 거짓말처럼 다물어진 입술. 발밑의 은빛 샘이 그녀의 그림자를 덮어 버렸기 때문일까. 에르잔은 문득 사비나가 무채색의 조각상처럼 느껴졌다.
그녀를 자신의 색에 물들게 하면, 어떻게 달라질까.
“곁을 맴도는 건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요?”
“당신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부디 이 빛이, 색이, 불꽃의 열기가 그녀를 상처입히지 않기를. 조각상을 일그러뜨리고 녹여버리는 일이 없기를.
에르잔은 간절한 소망을 담아 사비나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발치에 고여 있던 거울 같은 샘에서 황금색의 빛이 일어났다.
***
카이라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숨이 가빠 오고 심장이 머리에서 울리는 것처럼 귓전이 울리는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네나뷔스테가 휘두른 갈퀴에 베여 상처를 입었다. 베인 상처에서 열이 오르고 피가 흐르는 고통보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욱 크게 다가온 탓이리라.
눈이 멀었을 때도, 혀를 베였을 때도, 카이라트는 괴로워하지 않았다.
시간이 멈추었다고 해서 고통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니다. 카이라트는 맹인일 때도, 아페티트의 조종으로부터 벗어났을 때도 끔찍한 고통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때는 고통스러울지언정, 두렵지는 않았다.
눈이 멀어도, 혀를 베여도, 걷어차여서 멍이 들고 피를 토해도 느끼는 것은 육체적인 고통뿐, 시간이 멈춘 마을에서 자신은 반드시 죽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을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고, 주술로 인한 회복력도 사라져, 평범한 인간이 되어 버린 지금은?
녹이 슨 갈퀴에 베였으니 파상풍에 걸릴지도 모르고, 상처가 곪아 다른 질환으로 변질될지도 모른다. 통증으로 인해 감각 마비라도 일어나는 날에는 그것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는 보장조차 없다.
‘안 돼. 저주가 풀렸는데……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뒤집힌 시야가 빙빙 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친 걸까? 아니면 고통으로 인해 신경이 마비되어, 빛을 인지할 수 없게 된 걸까.
“큭…… 으흑…….”
카이라트는 바닥에 누운 채로 버둥거렸다. 자신이 팔다리를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으나, 몸을 비틀 때마다 등과 뒷머리가 바닥에 쓸리는 느낌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모든 감각이 차단된 것은 아닌 듯했다.
“카이라트.”
어둠으로 점멸했던 시야가 일순 밝아지더니, 찬물에 빠진 것처럼 섬뜩한 감각이 그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정신을 추스르지 못할 만큼 어지러운 그의 귓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카이라트. 당신의 욕망은 뭔가요?”
“……욕망……?”
카이라트의 욕망.
그가 주술을 연구하고자 했던 근본적인 이유.
지식욕의 충족?
진리의 탐구?
카이라트가 몇 날 며칠을 새워 가며 주술의 연구에만 몰두했던 건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카이라트가 불로불사의 주술을 추구했던 근본적인 이유.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나는 살아야 합니다…….”
“살고 싶어요?”
당연한 질문을 건네온다. 카이라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신의 <욕망>을 받아들이면 돼요.”
물보라가 이는 것처럼 시야가 어지럽게 흩어졌다가, 다시 까맣게 흐려졌다. 갈퀴에 베인 상처에서 나던 열기는 사라지고, 카이라트는 마치 우물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추락하는 느낌을 받았다.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