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생명을 빼앗는 저주, 병에 걸리는 저주, 독에 물드는 저주, 분노로 미치게 만드는 저주, 시간을 멈추는 저주…….
그것들은 모두,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기 위해 만들어진 주술이다.
사비나는 떠올렸다. 짐승처럼 신음하던 바르셀다와 잔뜩 예민해져 작은 행동에도 과민하게 반응하던 네나뷔스테, 그리고 빛도 들지 않는 지하에서 단지 누워 있을 뿐이었던 페고라.
그리고 저주의 핵을 품고 있던 나머지 세 사람과는 달리, 전혀 고통받지 않았던 아페티트.
‘욕망의 저주는…… <저주>가 아니야. 이건 저주의 한계를 넘어선, 주술인 거야.’
아페티트는 단지 욕망의 핵을 품은 네 개의 제물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아페티트는 본래 아버지가 만든 <욕망의 화신>이었고, 그를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아페티트를 가두기 위해 욕망에서 발현되는 세 가지 감정을 저주로 만들어 균형을 이룸으로써 이 마을의 시간을 멈추게 만들었다.
바르셀다는 분노로 이성을 잃었고.
네나뷔스테는 일체를 불신하며 사방에 증오심을 내뿜고.
페고라는 체념하여 마을 북쪽에 살던 이들과 함께 시체처럼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아페티트는?
아페티트가, 욕망에 미쳐 있는 상태였던가?
“에르잔. 저주는…… 주술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에요.”
“일부라도, 좋지 않은 것이 아닙니까?”
“아뇨.”
저주는 인간의 육신과 생명을 좀먹지만, 모든 주술이 인간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모든 주술이 다 생명에 해롭기만 하다면, 귀족 가문에서 저주를 피하거나 막아 내기 위해 주술사를 고용할 이유도 없으니까.
“주술사가 해를 입는 건 반동을 받을 때뿐이에요.”
“그렇다는 건, 주술 그 자체에는 해를 입지 않는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내가 죽지 않는 것처럼요.”
아페티트는 타인을 조종하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하는 힘을 얻었으나, 욕망에 미쳐 버리지는 않았다. 그는 이성적이고, 여유롭고, 알렉세이가 약속한 대로 사비나를 먹어 치우려 하면서도 사비나가 밀어 내면 강요하지 않았다.
이성이 없는 사람이라면, 저주에 물들어 미쳐 버린 사람이라면, 그럴 수가 없다.
“에르잔. 지금 마을 사람들이 분노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이 마을에 저주를 내린 것이 사비나 아가씨의…… 아, 아니. 콘바야젠 백작이라는 사실을 알고,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럼 저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복수를 원할까요?”
“그야 당연히…….”
“그들이 가장 욕망하는 것이 <복수>일까요? 정말로?”
사비나가 재차 질문하자, 에르잔은 입을 다물었다. 대답할 수 없었다.
15년 동안 저주에 갇혀 고통받아야 했던 그들이 느낀 감정이 무엇일지 에르잔은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의 분노는 이해할 수 있다. 한마을에 함께 살았던 남자에게 배신당한 것도, 그 남자가 마을을 떠나 권력을 손에 넣어 고향을 엉망으로 만든 것도, 그리고 모르는 척 자신의 딸을 보내 그들을 구원하도록 내버려 두었던 것도.
기만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분노는 온당했다.
에르잔은 다만, 그 분노의 화살이 사비나에게 향하지 않도록 그녀를 지킬 뿐이다.
“하지만 복수를 원하는 게 아니라면,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알렉세이의 사과와 반성?
이런 참혹한 짓을 저질러놓고 원하는 것이 겨우 그런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물질적인 보상과 어떤 혜택?
이미 이 마을은 황폐화되었고, 그들이 경험한 고통은 어떤 물질적인 보상으로 만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비나는 에르잔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건넸다.
“에르잔. 내가 했던 이야기 기억해요? 절망의 늪에 빠졌을 때, 왜 희망을 밧줄을 잡을 수 없는지.”
“그것이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렇다고 말씀하셨지요.”
“나는 저주 속에서만 살아와서 몰랐어요. 절망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희망을 붙잡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나를 뒤덮고 있는 절망이 너무 커서, 도저히 희망의 빛이 들지 않는 것 같았어요.”
어둠뿐인 늪 속에 한 줄이 햇빛이 스며들었다. 희망의 빛이었다.
사비나는 늪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그저 그 빛을 바라보기만 하면서, 빛이 꺼지지 않기만을 애타게 바랐다.
혹여라도 제가 손을 뻗었다가 늪이 혼탁해져 겨우 반짝이던 빛마저 잃어버릴까 봐 걱정했다.
그녀가 잠겨 있는 늪은 너무나도 깊고 어두워서, 얼마나 강력한 희망의 빛이 내리비친다 한들 여전히 한 줄기 이상은 파고들지 못할 것 같았다.
“빛이 꺼지지 않고, 더 강해지기만을 바랐죠. 바보처럼 그냥 기다리기만 했어요.”
에르잔이 다가와 주기를.
말로 하지 않았음에도 꼭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에르잔은 사비나의 표정을 다시금 확인했다.
“처음부터 잘못 생각했던 거예요. 절망 속에서 희망이 보이니까, 그것에만 매달렸죠.”
나자예프도, 카밀라도 사비나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녀가 마을의 저주를 모두 흡수해, 저주로 괴로워하는 다른 사람들을 구원해 주리라고.
사비나는 자신을 믿어 주는 이들에게 미안한 한편, 그 믿음에 위안을 받았다.
하지만 사비나가 저주를 흡수해도, 그들은 완전히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희망이 나를 절망에서 꺼내 주는 게 아니에요. 절망이 내가 희망을 잡는 걸 가로막고 있을 뿐이죠.”
“사비나 아가씨…….”
“에르잔. 내가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가더라도 따라오겠다고, 분명히 대답했죠?”
“……물론입니다.”
에르잔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절망을 없앨 거예요.”
절망의 늪에 침잠하면서도, 희망을 놓지 못한다면.
희망이 더욱 강력해져 자신을 구원해 주길 바랄 것이 아니라, 희망을 가로막는 이 절망의 늪을 태워 버리면 되는 일이 아닌가.
사비나와 에르잔이 숲을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고 마을 사람들은 기겁했다.
그들을 이끌어 줄 카이라트는 상처를 입고 의식이 없는 상태고, 도움을 요청할 오딜은 만나지도 못했으니.
다들 눈치를 보며 주춤거리면서도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겨누는 것을 보아하니 사비나와 에르잔을 <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당신들은 무엇을 원하나요?”
“뭐, 뭐야!”
“15년 동안 저주에 갇혀 살면서, 당신들을 이렇게 만든 원흉에게 복수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나요?”
사비나가 에르잔과 맞잡고 있던 손을 풀고, 광장으로 나아가자, 무기를 잡고 있던 손에 힘줄이 튀어나올 만큼 힘이 들어간 것이 보였다.
“다가오지 마, 저리 꺼져!”
“더 이상 저주 따위로 우리를 괴롭히지 마!”
“배신자의 딸 주제에…… 알렉세이 겁쟁이 녀석은 널 남기고 숨었지?”
“알렉세이를 끌어내는 미끼라고 해서, 우리가 너를 공격하지 못할 거라고 단정하면 오산이야.”
무기보다도 날카로운 말들이 사비나를 향해 쏟아졌다. 그러나 사비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에르잔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사비나를 바라보면서도,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지 못하고 두 걸음 정도 거리를 남겨 둔 채 지켜보고 있었다.
<손발이 맞지 않으면 여기 있는 네 사람 목은 다 날아가는 거야.>
불현듯 오딜이 했던 충고가 떠올랐다. 사비나와 함께 행동하고자 한다면, 여기서 그녀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아가씨를 믿자.’
에르잔은 주먹을 쥐고 깊이 숨을 내쉬었다. 사비나의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옷자락은 여기저기 찢어져 넝마가 되었음에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서 있는 사비나는 조금도 추레해 보이지 않았다.
“저주에 걸려 죽어 가는 사람들이 가장 간절히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아요.”
사비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서 욕망의 저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광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기겁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헉……!”
아니, 그것은 저주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저주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할까.
저주가 모두 검은색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었다. 녹색도, 보라색도, 피처럼 붉은색도 있었다. 색이 선명하고 탁하고는 있을지언정, 불길한 저주란 모두 어두운 빛깔을 띠는 법이다.
그러나 사비나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저주는 검지도, 어둡지도, 탁하지도 않았다.
바닥에 닿는 순간 기화하지도 않았다.
유리처럼 맑은 샘물이 사비나의 옷깃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바닥에 고여 작은 웅덩이를 만들 만큼 많은 양이 아니었다면, 순간 그것이 사비나의 눈물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저, 저게…… 뭐야?”
“물? 사람 몸에서 무슨 물이 저렇게 나와? 그것도 투명한…….”
“아니, 잠깐만. 투명한 게 아니야.”
처음은 작은 물웅덩이에 불과했던 것이 차츰 규모를 키우더니, 경사를 따라 아래로 흐르기 시작했다.
냇물처럼 흐르는 그 <저주>는 투명하지 않았다.
투명하다면 분명 물 아래의 밑바닥이 보여야 할 터인데, 그 물은 거울처럼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하늘을 비추고, 숲의 나무를 비추고, 광장의 끝까지 뻗어 와 그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비추고.
“욕망은 흡수하는 게 아니에요.”
혼탁한 연못을 맑게 만들 때도, 저주로 일그러진 상처를 치유해 줄 때도, 사비나는 그것을 제 몸으로 빨아들였다. 욕망의 핵이 분진 형태라고 생각했을 때도, 그것을 흡수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진짜 <욕망>이 아니었다.
아페티트로부터 진짜 욕망을 건네받는 순간, 사비나는 자각했다.
“욕망은, 마주하는 거예요.”
늪 속의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