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주술사는 미래를 예견하는 자.
하지만 사비나에게 미래를 엿보는 능력 같은 것은 없었다.
아버지는 그녀가 죽음의 화신으로서, 가문의 정적이 되는 이들을 제거하며 미래를 <만들어 내는> 강력한 주술사라고 말했지만, 이제는 사비나도 그 말이 거짓임을 안다.
사비나는 주술사가 아니었다.
<죽음> 이후에 만들어지는 <미래>는 없으니까.
생명은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더 이상 새로운 시간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죽음에는 미래가 없이 오직 과거만 존재한다.
죽음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미래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다.
아버지가 만들어 내고자 했던 건 타인의 죽음으로 인해 넓어진 미래의 가능성을, 살아있는 자신 쪽으로 당겨 오기 위해서였으니까.
미래는 다가올 일이기에 기다릴 수 있고, 또한 변화할 수 있지만,
과거는 지나간 일이기에 붙잡아 멈춰 세울 수 없고, 또한 변하지 않는다.
미래가 가변이라면 과거는 불변이고, 현재가 찰나라면 과거는 영원이다.
그래서 생명을 끊는, 미래에 다가올 시간을 차단하는 <죽음>은 가장 강력한 저주였다.
“에르잔. 나는 당신을 만나서,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어요.”
“사비나 아가씨…….”
“웃어 본 것도, 즐거움을 느낀 것도, 지금을 행복하다고 생각한 것도 처음이에요. 어쩌면 아주 과거에 경험해 봤을 테니 처음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는 기억하지 못하니까.”
사비나가 금줄 목걸이를 목깃 속으로 숨기자, 황금빛 목걸이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감쪽같이 옷자락 속으로 숨어 버렸다.
“잊어버릴래요. 그리고 지금부터를 생각할 거예요.”
과거는 지울 수 없다. 바꿀 수도 없다.
그러나 잊는 것은 가능하다.
더는 과거의 고통 속에 붙잡혀 있을 이유가 없다. 과거가 불변인 이상 과거를 기억하는 내내 사비나는 괴로움에 시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를 잊는다면.
죽음만을 바라면서도 정작 죽지 못해 괴로워하던 지난 시간을 잊는다면.
“살고 싶어질지도 몰라.”
“아가씨…….”
“아니, 분명 그럴 거예요. 나는 에르잔과 함께 살고 싶어.”
사비나가 죽음이라는 늪 속에 잠겨 있는 한, 그녀는 에르잔과 함께할 수 없다.
너무나도 소중한 그를 죽음 속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사비나는 에르잔을 멀리하려 했다. 포기하려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에르잔. 나는 당신을 욕망해요.”
상대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감정일진대, 왜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을까.
에르잔을 내보내고, 그가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 평온한 일상을 보내도록 기원하는 것이 그를 좋아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행위일 텐데, 왜 그러고 싶지 않은 걸까.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죽음에서 가장 가까운 동시에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누군가를 죽여야 해서 괴로웠던 것이 아니라, 사라져 가는 것들 사이에서 자신만은 영원히 홀로 남아있는 것이 두려워서이리라.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래요. 난 당신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수 없어.”
“……사과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에르잔. 나랑 함께 있으면 위험해질 거예요.”
“사비나 아가씨. 저는 그런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검은 눈에 물기가 어리더니, 그녀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를 외면한 것은 아니다.
사비나는 에르잔의 손을 꼭 붙잡았다. 커다란 손안에 쏙 감춰지는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처음으로 기운을 되찾은 것처럼 그의 손에 얽혀 왔다.
“나와 함께 있으면, 또 끔찍한 일을 겪게 될 거예요.”
“사비나 아가씨의 곁에 있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감내하겠습니다.”
“무척 아프고, 힘들고, 괴로울 거예요.”
“당신의 곁에 남지 못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에르잔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진저리가 날 만큼 우직한 대답이 꼭 어둠 속을 비추는 빛처럼 사비나의 마음을 밝혔다.
그래서 숨겨져 있던 그녀의 진심을, 적나라하게 비춘다.
'이게 내 진심이구나.'
위험해도, 불안해도, 두려워도 끔찍해도 고통스러워도.
소중한 에르잔을 떠나보내기에 자신은 너무나도 탐욕스러운 사람이다.
욕망의 핵을 흡수했기에 더욱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천국으로 가는 문이 열려 있고, 단 한 사람만이 그 문을 지날 수 있다면.
사비나는 에르잔을 천국으로 보내기보다, 그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끌어안고 나락으로 추락하는 길을 택할 것이다.
“에르잔. 내가 불 속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나와 함께 있어 줄 거죠?”
“기꺼이.”
사비나의 손을 붙잡은 에르잔의 손에 힘이 실렸다.
평소에는 차마 부러질까 두려워 제대로 쥐지도 못했던 손에, 아플 만큼 힘이 실려 온다.
사비나에게는 그 통증마저 달콤했다.
“가요, 에르잔. 마지막 저주를 흡수하러.”
“마지막 저주라고요? 네 개의 핵은 전부 흡수하신 게…….”
“핵을 분산한 건 과정이에요. 저주의 주술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그렇게 말하며, 사비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나무들 사이에서 흰 그림자가 안개처럼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당신이 정확히 봤어요, 페고라.”
“…….”
“내가 마지막 <저주>예요.”
***
바람 한 점 없는데 숲이 소란했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도 아닌데 어디선가 메마른 잎사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 카밀라는 어깨를 움츠렸다.
바스락 바스락. 힘없이 무언가가 짓밟혀 부서지는 소리가 마치 작은 생명들의 단말마처럼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
“네나뷔스테. 나 좀 무서워.”
“시체를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면서 뭘? 오딜 아저씨한테서 냄새나던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아니, 그게 아니라…… 힉!”
가림막이 걷히면서 송장처럼 누워있는 오딜을 보고, 카밀라가 작게 숨을 삼켰다.
손톱이 다 깨졌는지 손끝이 얼룩덜룩한 피로 뒤덮여 있었고, 이마가 깨졌는지 거미줄 모양의 핏자국이 얼굴을 덮고 있었다.
카밀라는 저도 모르게 네나뷔스테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지만, 그녀는 성가시다는 듯 카밀라의 손을 휙 뿌리쳤다.
“엄살 피우지 마. 피는 다 굳었어.”
“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분명 저주가 풀렸는데…….”
“저주가 풀렸으니까 한 번에 돌아온 거겠지.”
“뭐?”
카밀라의 질문에 네나뷔스테는 가림막을 다시 내려 오딜의 몸이 보이지 않도록 하고, 헛간으로 통하는 문을 반쯤 열어 동생들이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도로 닫았다.
“새벽에…… 아니, 아침이었나? 오딜 아저씨가 피를 토하면서 쓰러졌어.”
네나뷔스테는 느낄 수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멈춰 있던 마을의 시간이 다시금 흐르기 시작했을 때 느껴지던 기묘한 해방감과 두려움을 깨닫지 못할 만큼 저주에 둔하지는 않았으니까.
마을의 북쪽으로 간 세 사람을 따라가지는 않았지만, 네나뷔스테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사비나가 네 개의 핵을 흡수하였기에, 이제 이 마을은 평범하게 시간이 흐르고, 자신들도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하지만 안도할 수는 없었다.
해방감과 동시에 찾아온 두려움에는 이유가 있었다. 오딜이 피를 토하면서 쓰러진 것이다.
구멍 난 손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지저분하지만 튼튼한 것만은 분명했던 손톱이 갈라지고 깨져 검붉은 피가 꼭 진흙처럼 손끝을 감쌌다.
듬성한 앞머리로 가려져 있던 이마에 붉은 점이 솟아오르더니, 마치 거미줄이 쳐지듯 사방으로 핏줄기가 뻗어 나갔다.
놀란 동생들을 헛간으로 내보내고 오딜의 상태를 살피려던 네나뷔스테는, 오딜이 목을 감싸고 있던 지저분한 천이 피로 흥건하게 젖은 것을 발견했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천을 끄집어내자, 칼로 베인 듯한 목의 상흔 주변이 끔찍할 만큼 곪아 있었다.
<오딜 아저씨, 아저씨! 정신 차려!>
머리를 다친 탓에 함부로 흔들었다간 정말로 잘못될 것 같아, 네나뷔스테는 오딜의 뺨을 두드리며 그를 불렀다. 그러나 초점을 잃은 흐리멍덩한 눈은 더 이상 그녀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왜지? 설마…… 시간이 다시 흐르면서 15년 동안 쌓여 있던 게 한 번에 돌아오는 거야?’
네나뷔스테는 제 옷소매를 걷어 올렸다. 에르잔의 정화의 불꽃에 당해 입은 화상 자국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수포가 올라오지도 진물이 흐르지도 않고 가려움도 멈추었다. 만약 시간이 멈춰 있던 동안의 치유력이 주술이 깨지면서 과거에 입은 상처까지 모두 되돌려내는 거였다면, 네나뷔스테의 팔에서도 피가 흐르고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이어져야 정상이다.
그러나 네나뷔스테는 아프지 않았다. 헛간으로 내보낸 동생들도 아파하는 듯한 소리는 내지 않았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파악할 수 없어 불안해하는 네나뷔스테의 귀에, 오딜이 헛소리처럼 중얼거리는 이름 하나가 들어왔다.
<올가…….>
지키지 못했던 여동생의 이름.
발음도 불분명하고 소리도 꺼져가는 촛불처럼 작았으나 기척에 예민한 네나뷔스테는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오딜 아저씨. 올가 언니는 죽었어.>
<…….>
<15년 전에 죽은 사람을 불러서 뭐 해? 이제 와선 사과도 하지 못하는데.>
초점이 없던 오딜의 눈이 황망하게 허공을 배회했다. 네나뷔스테는 우선 지혈이라도 하려 환부를 감쌀 만한 천을 찾았으나, 마땅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화상을 입었을 때 오딜이 치료하느라 빨아 둔 천이 아직 있을 터인데. 그런 생각을 하며 일어나려던 네나뷔스테의 발목을 오딜이 붙잡았다.
<오딜 아저씨? 정신이 들어?>
<……잡아서 미안하다.>
<뭐?>
<놓아주었어야 했는데…….>
실핏줄이 다 터져 붉어진 눈에서 피 섞인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네나뷔스테의 발목을 잡고 있던 오딜의 손에 힘이 빠졌다. 그대로 눈을 감은 오딜은 시체처럼 늘어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네나뷔스테는 우선 오딜의 끔찍한 몰골이 바로 보이지 않도록 가림막을 쳐서 가려 두고, 헛간으로 건너가 아직 불안에 떨고 있는 동생들을 달래 주었다.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글 흐르기 시작하자마자 아이들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피로와 배고픔이었다. 네나뷔스테가 다 말라 비틀어진 빵 조각을 입에 넣어 주자, 아이들은 그걸 침으로 불려 억지로 씹어 삼키고는 곧 잠에 빠져들었다.
마을의 저주는 분명 풀렸는데, 느낌이 어쩐지 좋지 않았다.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확인하려는데 숲 쪽에서 카밀라의 비명이 들려 달려갔더니 북쪽에 틀어박혀 있던 반송장들이 하나같이 무서운 눈으로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판단했으나, 네나뷔스테가 위급 상황에서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것은 정해져 있었다.
동생과 자신을 위협하는 모든 것을 멀리할 것.
무기를 들고 있던 북쪽 사람들과, 15년 전 남들이 다 싸우다 죽어갈 때 혼자서 시체 사이에 숨어 피신했던 카이라트를 믿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내보냈는데, 카밀라가 따라왔다.
카밀라 혼자서는 네나뷔스테에게 어떤 위협도 되지 않았으므로 쫓아내지 않았다.
잠든 동생들과,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오딜을 두고 혼자 오두막을 지키기란 지금의 네나뷔스테에게 버거운 일이었다.
이 끔찍한 불안감을 나눌 상대가 필요했던 건, 네나뷔스테도 마찬가지였다는 뜻이다.
“카밀라.”
“으, 응?”
“너, 다른 사람을 죽여서라도 살고 싶어?"
늪 속의 불